첫번째,

시작된 역사

-창세기 1장 1절, 26~31절

                                        

0. 지난 주 이야기


  여러분, 다시 역사 위에 섭시다. 역사는 우리 역사, 니네 역사 없습니다. 벌어진 사실은 하나 뿐이고, 다만, 그 하나의 사실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건 니 역사지'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이건 대화하지 않겠다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과 나는 사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의 사실을 매개로, 당신과 나의 해석이 상관 없을 리 없습니다. 설령 해석이 완전히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대해서 대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함께 찾아야 합니다.


     물론, 그 해석 중에는 옳은 해석, 잘못된 해석이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찾는 것은, 나를 버려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것은 그렇게 얻어질 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이 어떠했든, 우선은 믿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잘못된 해석들의 덤불을 지나, 사실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앎과 삶의 이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모두'의 역사를 다시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정직한 이야기 안에 함께 서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두 가지 잘못된 역사의 해석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는 '진보의 신화'입니다. 이것은 진화론적 낙관주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저 세상은 생겼고, 지금 나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왜 생겼는지, 어떻게 나아지는지 말해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위에서 사람은 뜻도 없고 열정도 없거나, 혹은, 뜻 없는 열정만 있는 사람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현실에 생긴 악의 문제에 대해서 이 진보의 신화를 믿는 사람들은 그저 '성장통'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장통과 우리 몸에 생긴 암을 구분 못하면 안 되지요. 진보의 신화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역사를 그릇 해석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목적 없는 사람, 악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처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두번째는, '영지주의의 신화'입니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물질은 악하다'에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로 이루어진 이 세상도 악하고, 물질로 이루어진 우리의 육체도 악합니다. 그들은 바랍니다. 이 세상과 몸을 떠나 얻게 되는 영혼의 자유를 바랍니다. 세상과 몸을 떠나 영혼의 상태로 맞는 최후 결말에 대한 생각은 대부분의 종교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독교에는 천국이, 불교에는 극락이 있습니다. 그러나 A.D.1세기의 예수 공동체는 이 영지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했습니다. 예수 공동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영지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의 창조가 악할리 없기 때문입니다.(이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룰 것입니다) 둘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이 세상의 최후 결말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사상, '진보의 신화'와 '영지주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오늘날 현대인들도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제 3의 해석을 보려고 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이 땅의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역사에 대한 바른 해석 말입니다. 출처는 성서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위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그 역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1.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1) 창조는 선하다.

2) 이 세계는 두 가지 차원으로 창조되었다.

3) 하늘과 땅의 관계


2. 인간

1)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

2) 하나님의 형상


3. 하나님-인간-세계




1. 창조는 선하다.



   성서는 역사의 시작을, 이 문장으로 열어 재낍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 창세기 1:1


   바로 이 문장에서 우리는 역사의 바른 시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내용들에 주목해봅시다.



1) 먼저는 창조는 선하다는 것입니다. 


       이 지어진 세계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지어졌습니다. 이 좋다는 말을 히브리어로 '토브' 라고 합니다. 즉, 창조 세계는 선하신 하나님을 닮아 '토브'인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악한 하나님'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을 악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 악한 세상을 창조한 신 역시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선합니다.


       생명이 태어났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정말 그것이 악하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난 것일까요? 우리는 아무 의미 없이 태어난 사람과 동물을 보며 의미 없는 아빠 미소를 짓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지으신 세계는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2) 이 세계는 두 가지 차원으로 창조되었다.


        '하늘과 땅'입니다. 즉, 성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하늘과 땅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늘은 그저 푸르른 하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씩 생각해봅시다.

        먼저 '하늘'입니다. 잘못된 두 가지 이해를 살펴봅시다. 그림 그리는 주일학교 아이와, 우주 비행사의 경우입니다. 아이들에게 천국을 그려보라고 하면 어떻게 그릴까요? 하늘위에 있는 궁전을 그립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받아줄 것만 같은 수염 많은 인자한 할아버지를 그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하늘이 아닙니다. 잘못된 이해는 아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에 다녀온 어느 우주 비행사는 지구로 귀환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늘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확실하다" 이 두 가지 경우는, 성서에 나오는 '하늘'의 의미를 모르고 하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하늘'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거든요. ‘하늘’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그냥 우리가 보는 '하늘'이라는 의미

        (2) 우주. 유대인들에게는 '우주'라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하늘이란 단어로 우주를 표현.

        (3) 그리고 하늘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 하나님의 차원'.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을 생각해보세요. 위의 의미를 적용한다면, 그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 하나님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는, 하나님의 차원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땅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영역’입니다. 다음 구절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늘은 주님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다. (시 115:16)



3) 하늘과 땅의 관계


        그리고 이제 중요한 것은, 하늘과 땅의 관계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의 물음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믿음들이 있고, 그 믿음들은 다 이 하늘과 땅의 관계와 상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너무도 밀접한 이야기들이니까, 들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먼저는, 하늘과 땅이 같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리켜 '범신론' 이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인 경우는, 인도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신의 일부분이야" 그들에 보기에 하나님의 세계는 곧 인간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의 신적 세계는 곧 인간의 세계인 것입니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이 신이 됩니다. 나무도, 돌도, 소도 거룩한 신의 일부입니다.


     또한 하늘과 땅이 결코 만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역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에피쿠로스가 그러합니다. 흔히들 에피쿠로스 하면, 쾌락추구라고 알고 있지만, 그 쾌락은, 신은 나를 도와줄 수 없으니, 내가 알아서 가장 바르고 검소하게 살아서 삶을 기쁨을 누리자는 쾌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상이 나중에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현대에 찾아왔습니다. 이것을 '이신론'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은 시계공과 같아서, 지구를 정밀한 원리로 창조해놓고, 이 지구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즉, 하늘과 땅이 만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신적 차원이 있더라도 오늘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럼 하늘과 관계를 이렇게 엮은 두 가지 사상의 문제를 짚어봅시다. 먼저, 범신론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악의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악을 악이라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악의 문제조차 신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인도에는 카스트제도가 있습니다. 인간을 태어나면서부터 4종류로 나눕니다. 이러한 분명한 차별과 착취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바꿀 생각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카스트 제도 역시 신의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악과 부조리를 만났을 경우, 이 사람들의 태도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샬라!"




     그럼 이신론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현대에는 자신이 이신론자인줄 모르는 무수한 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일만이 중요해집니다. 정의, 진실, 사랑, 아름다움은 중요하지만 뒷전이 됩니다. 아니면, 완전 극단의 반대의 경우로 떨어지는 이신론자들도 있습니다. 즉, 하늘과 땅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어보고자, 상식에서 벗어난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진화론적 낙관주의와 영지주의를 읽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대 세계관 속에, 저 근거 없고 아름답지 않은 소망들이 섞여 있습니다. 근거가 없다는 말은, 역사와 상관이 없다는 말이고,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웠던 것을 정리하는 다음의 표를 확인해봅시다. 미래에 대한 소망 없는 사람 없고, 하늘과 땅의 관계와 상관없는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표로 그려봤습니다. 저 유형 안에서, 인간과 세계를 보는 여러 가지 해석들을 확인해봅시다. 

        

        먼저 C부터 봅시다. C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 사람은 미래에 대해서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즉, 하늘이 없거나, 아니면 있어도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결국 나아질 것이라는 미래를 믿고 있죠. 이 사람은 우리가 살펴봤던 사람들 중, ‘진보의 신화’를 믿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혹은, 신 자체인 이 세계의 자연치유를 믿는 ‘범신론자’가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B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 사람은 내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해서는 비관적입니다. 이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삶의 자세는, 한 가지 뿐입니다. 비관적인 미래를 보이고 있는 이 세상을 떠나, 자신이 믿고 있는 내세에서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영지주의자들’들, 혹은 ‘이신론자들’이 여기 속할 것입니다.


        D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이 사람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 비관적입니다. 게다가 내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삶의 자세는 한 가지 뿐입니다. 삶이 공허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비관적인 세계 속에서, 탈출구조차 없기 때문에 그 삶의 이유를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혹은 이러한 사실조차 인식 못할 만큼 둔해져 그 어떤 희망도 붙잡지 않을 것입니다. D를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회의주의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A. 저는 이 사람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고, 내세도 믿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삶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미래는 나아질 것이라 믿고 있고, 내세도 믿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 최선을 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A를 '유사 기독교인'이라 부르려고 합니다.


        문제를 더 극명하게 드러내봅시다. 저, A,B,C,D 유형의 사람들이, 악의 문제를 대면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를 상상해봅시다. A가 악의 문제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잘 될 것이라 믿고, 내세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B는 염증 나는 이 세계를 떠나 내세로 도피하는 일일 것입니다. C는 신의 일부인 그 악을 그저 받아들이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대면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꿀떡 삼켜야할 문제라 생각할 것입니다. D는 회의주의자입니다. 그저 의심하고 피하고, 쓴 웃음을 짓는 것이 고작일 것입니다.


        악의 문제 앞에서, A,B,C,D는 모두 무너집니다. 어느 것 하나, 악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피하거나, 무관심하거나, 그저 잘되리라 믿는 것외에는 의지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결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각해봅시다. A,B,C,D,중에 어느 하나의 삶의 자세를 갖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일반적인 일입니다. 세상을 비관적이거나, 낙관적으로, 일관되게 보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들을 낙관이든 비관이든, 내세가 있든, 내세가 없든, 그 머리에서 일관적으로 꿰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B,C,D,는 인간에 생각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논리의 귀결입니다.


        그러나 만약,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도 아니고, D도 아닌 삶의 자세가, 수천년간 전해져 내려왔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 생각하며,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인간에게 참된 의미와 목적을 주며, 무엇보다도 악의 문제를 대면하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하는 새로운 길이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가 이제 말하려는 것은,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도 아니고, D도 아닌, 세상을 보는, 역사를 읽는 새로운 시각입니다. 출처는 성서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위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다시 하늘과 땅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선하게 지으신 하늘과 땅을 보며 생각해봅시다. 하늘이 곧 땅인가요? 아니면 하늘과 땅은 만날 수가 없는 것인가요?



        하늘은 언제나 땅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땅과 결코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더불어, 이 다양성과 공존하는 조화로움도 보이십니까? 예술가의 손길입니다) 하늘과 땅은 언제나 붙어 있지만, 분명 다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역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인간의 영역과 분명히 분리가 되면서도, 언제나 인간의 영역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고 있는 '하늘'입니다. 신적 차원과 인간의 차원의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는 범신론도 아니고, 이신론도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차원은 인간의 차원과 분명히 분리되지만, 그럼에도 공존한다는, 이 독특한 해석이, 좁은 길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역사의 해석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늘은 땅을 지휘하는 관제탑이다." 즉, 하늘은 언제나 같은 공간 속에서 땅 위에 있으면서, 그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이 보이는 세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과, 그러한 땅, 즉, 이 하늘과 땅이 중첩된 세계가, 우리가 실제로 발 딛고 있는 세계의 참 모습이자, 이제부터 펼쳐질 인간에 대한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2. 인간


     이제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인간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사상들이 말하는 인간들을 먼저 생각해봅시다. 먼저, 진화론적 낙관주의입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화론적 낙관주의는 인간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목적 없이 만들어진 진화의 산물일 뿐입니다. 인간은 무엇이냐는 물음에 진화론적 낙관주의는, 그저 '이 세상에 우연히 존재하게 된 생명체'라는 답 외에 다른 것은 줄 수 없습니다. 

     범신론이 말하는 인간은 어떠할까요? 그저 세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악에 대해서도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세계 앞에 무력한 인간이었습니다.

     영지주의적 인간은 어떻습니까? 이 악한 세계에 존재하게 된 인간은, 이 악한 세계를 떠나는 것만이 소망인 가련한 존재입니다.

     이신론이 말하는 인간은, 척박한 세상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개척하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아래서는 이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들떴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는? 어제의 결과는 오늘입니다. 오늘날 인간에 의한 유토피아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계몽주의의 꿈은 한여름 밤의 꿈으로 날아가버리고, 계몽의 꿈을 잃어버린 현대에는 디스토피아의 비관적 전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서가 말하고 있는 '땅의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26~31)


     창세기 1:26~31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내용은 다음의 네 가지 질문입니다.


-인간은 왜 창조되었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일까요?


-인간과 창조 세계는 어떠한 상관이 있을까요?


-먹고 사는 문제를 얘기해봅시다.




1)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


        인간도 창조되었습니다. 시간처럼, 창조 세계처럼 말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 선하게 지음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존재하게 된 인간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품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스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다스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선한 창조 세계에 대한 다스림.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의 관리자로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죠. 다스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창조주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다스림을 인간에게 일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그래서 이 세상의 일들이 인간의 손에 쥐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그 세계를 인간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신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제 인간에게 맡겼으니, 더이상 이 땅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일을 인간과 함께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이 땅을 다스리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으로 창조의 선함이 유지되는 것.

          칸트의 말이, 이 내용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칸트는 행복이 조건으로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할 일입니다. 둘은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셋은 사랑하는 대상과 함께 만들어가는 희망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인간 창조 이야기에는 이 세 가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할 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땅을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떠맡긴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일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인간과 세계는, 생명으로 더욱 풍성해지는 미래를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 성서의 인간관을 요약하면, 

‘하나님과 함께 사랑의 교제 안에서 그 분의 창조세계를 다스리기 위하여 창조 된 것’입니다.


        목적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있게 된 것도 아닙니다. 세계 앞에 무력하게 굴종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악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떠나기를 갈망해야만 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홀로 이 땅에서 고분분투 해야 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2) 하나님의 형상


(창 1: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성서는 그 인간에 대해서 말할 때,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말합니다. 앞서 말했던 인간은 하나님의 예술작품이라는 유비, 그리고 위에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다는 이야기의 근거가,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 따라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이 인간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놀이터에서 친구와 흙장난 하던 아이가, "이건 불공평해" 하고 말하는 순간, 그 아이는 정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정의를 인식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내어주는 누군가를 보며, 그 희생과 사랑에 눈물짓습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며, 올바르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만약 우리가 우연히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왜 우리 마음에 이러한 기준이 생긴 것입니까? 만약 악 조차도 신이라면, 우리는 왜 악을 인식할 수 있습니까? 성폭행 당하는 여자 옆을, 그저 지나친 당신의 밤은, 죄책감에 짓눌려 잠이 오지 않는 밤일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 입니다. 우리 안에, 옳음을, 사랑을, 정의를 인식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적으로 표현하자면, 누군가 우리에게 이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옳음, 완전한 사랑, 완전한 정의를 해본 적도 없으면서,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완전한 옳음과,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정의를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해보지도 못한 완전한 것들을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진화의 과정을 거쳤던 그 어떠한 생물도 정의를 알지 못합니다.(자기의 새끼를 잡아먹는 구피에게 정의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그럴 수 있습니다. 유한하면서도 영원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고 말하는 이상한 존재. 인간입니다. 왜 입니까? 선하신 누군가로부터 우리에게 그것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옳음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우리를 그렇게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느낍니다. 해보지도 않고 끄덕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인간의 잘남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 땅을 진리로, 정의로, 사랑으로, 다스리게 하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유비로 소결론을 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탁월하신 하나님의 탁월한 '작품'입니다. 그것도 예술가의 '의도'가 들어있는 작품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이기에, 하나님을 닮았고, 하나님의 의도가 있기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혹, 이러한 반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서의 관점으로 인간을 보는 것은, 인간의 무한함을 제한하는 것이다. 축소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만약, 정말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가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 창조주의 의도는 결코 인간을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들판에 나가 꽃을 보세요. 창조주의 의도는 다양함 그 자체 아닙니까? 허나 빨갛고, 노랗고, 다양한 색깔 안에서 우리는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각각의 모든 개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창조주의 손 길을, 우리는 자연 속에서 확인합니다. 그러한 창조주의 인간에 대한 의도가, 천편일률적이거나, 인간을 축소시키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 사실이라면,(이러한 조건문이 저에게는 어불성설이지만) 그 분의 의도는, (너무도 당연히) 인간이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는 것일 것입니다.


   이러한 유비는 어떻습니까?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된 한 작가의 전시회 장면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같이 그림을 모르는 사람들은, '왜 그림들이 다 그게 그거야?'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각각 그림들의 고유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저와 달리 각각 작품들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그치지 않고, 그 전시회 전체 작품들은 모여서, 한 사람 예술가의 인격을 이해하게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각각 다양하지만, 그것은 각자 따로 놀기 위한 개별화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창조주의 의도 안에서 모두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삶은, 한 분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게 하는, 창조주의 작품들입니다. 이것을 유비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분의 의도가 너무 커서 상징이나 비유 아니고서는, 적절한 언어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인간-세계


        지금까지 우리가 다루었던 내용들을 정리해봅시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나뿐인 세상을 해석해보자 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잘못 읽고 있는 여러 사상들을 다뤘습니다. 진보의 신화, 영지주의, 범신론, 이신론이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세상을 제대로 읽느냐, 잘못 읽고 있다는 것은 ‘악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답변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판단됩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네 가지 사상들은, 악의 문제에 대해서 체념하거나 도피할 뿐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참된 희망을 줄 수 없는 해석들이었습니다.


        그러한 해석들을 살펴본 이후에, 우리는 성서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로 시작되는 그 문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악의 문제에 대한)참 희망의 이야기인가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성서 이야기의 배경부터 살펴보았습니다. 그 배경은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신적 차원과 인간의 차원이 중첩된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 위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해서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탁월한 작품,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지음받은 인간의 존재 목적에 대해서, 예술가와 작품에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오늘의 마지막 퍼즐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하나의 그림 안에 종합하는 일입니다.




  

    신약성서에 보면, 인간을 '주인의 재산을 맡은 종' 이나 '청지기', '포도원 주인', '목자', '왕'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인간-세계'의 그림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의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인간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땅을 다스려야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마치 주인의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종처럼, 하나님의 양 떼를 치는 목자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을 다스리는 왕처럼.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창조된 세계를 가꾸고 다스리도록 인간은 창조되었고, 다스리는 왕으로, 세상을 섬기는 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의해, 하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음 주 예고!> "응? 먹고 사는 문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을 다스리는 인간은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하는 인간을, 하나님이 굶기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먹는 것보다 소가 먹는 것이 3배나 많은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인형 뽑기 하듯 들어서 미국 땅에 집어넣어도 인구밀도가 우리나라의 4분의 1입니다. 즉, 하나님은 일부러 적은 자원을 주시고, 인간에게 배틀로얄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구는 정말 넓고, 정말 풍족합니다. 하나님의 뜻 따라 이 땅이 다스려지면, 아무도 굶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창 1:29,30)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거리로 준다"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늘의 하나님이, 땅의 인간에게 복을 베풀어주십니다. 그 복이 인간을 통해 이 세계로 퍼집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 땅에 실현할 책임이 있고, 그러한 다스림 속에 먹고 사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됩니다. 지금도 매년 우리나라 인구만큼 아이들이 굶어 죽습니다. 지금도 수원역에는 노숙자들이 즐비합니다. 입에 김밥을 물고 달려가는 회사원의 발걸음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오늘날 전혀 해결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아니, 좀 더 적실하게 말하면, 오늘날 이 땅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뤄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로부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다음 시간에 배울, '타락의 역사'에 대한 단초를 얻은 것과 다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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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은 다음 주의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지금까지 우리가 스케치한 것들을 다시 정리해봅시다. 

우리가 처음 봤었던, 다음의 키워드들을 사용해서, 오늘 내용들을 정리하자는 것입니다.


[진보의 신화, 영지주의, 선한 창조, 하늘과 땅, 범신론, 이신론, 악의 문제,

인간의 존재 이유,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인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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