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서론 : 절망의 바다 한가운데




0.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지금 절망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절망'스럽다는 것은, 그냥 해본 소리나 수사가 아닙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주변에 있는 친구를 붙잡고 물어보세요. "너는 왜 살고 있어?", "너는 왜 공부 하고 있어?" 우리는 무슨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왜 하는 지 이유를 대답할 수 없는 그 일 때문에 괴로워하고, 이 일은 전 지구적으로 벌어집니다. 의미를 모르고, 뜻을 모르는 일에 모두가 열심이요, 그 열심에 다른 사람을, 자연을 착취하는 일상이 반복됩니다. 날마다 사람들은 부당하게 죽어나가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절망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는 정말 소망이 있는가?' 
'소망이 없다면, 왜 그러한 것인가?' 
'소망없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하며 무엇을 행해야하는가?' 

     오늘 우리의 배움은 먼저, 1) 이 절망스러운 시대의 소망없음을 밝힐 것입니다. 혹은 소망인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는 가짜 소망들의 정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성서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그것은 "무조건 성서가 옳아" 라고 소리치는 것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2) 성서에서 말하는 소망을 우리가 앎과 삶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소망의 출처인 3) 성서 본문을 연구하는 것으로 오늘 수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아래 내용은 톰라이트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의 요약입니다.
인용표시는 모두 이 책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1. 이 시대의 절망


    우리는 지난 주, '다원주의 사회'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다원주의는 국가주의에 미쳐있던 인류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즉, 국가가 아닌 모든 소규모 집단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그 다원주의는 이름뿐인 다원주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적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다원주의였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이성이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진리의 기준이 됩니다. 과학이 인정하면 사실이고, 과학이 인정하지 않으면 거짓입니다. 그리고 '아직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은 많은 신념들'이 남겨집니다. 다원주의는, 과학이 다루는 사실의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신념들에 대해서,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하자는 것이 다원주의입니다.

     오늘날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전통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내용입니다. 사실과 신념이 분리된 이상한 세계에 우리는 익숙합니다. 우리가 모시는 왕은 이성이고, 과학적 전통은 그 뒤에서 막후정치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과 300년밖에 되지 않은(그 300년 동안 인간의 삶은 나아졌습니까?) 생겨난지 얼마 안되는 전통입니다. 그러나 이 과학적 전통은 검증되고 비판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검증하고 비판합니다. 이 전통은 과학적 이성 뒤에 숨어서, 그 이성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이성은 이 전통이 합리적으로 보이도록 봉사합니다. 이런 식의 순환을 통해 이성과 과학적 전통은 점점 이 시대의 모습으로 굳어갑니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기독교의 성서의 이야기는 그저 신념들 중의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성서만이 진리입니다!" 라고 외쳤을 때, 사람들은 우리를 과학의 검증을 받지 않은 신념을 주장하는 무식한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묻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습니까? 성서가 부당한 취급을 당하는 것을 말하기 전에, 오늘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전통이 옳은지 물어봐야 합니다. 이성이 정말 모든 것을 심판하는 왕인지 물어야 합니다. 

     과학의 전통과 그 위에서 기능하는 이성은, 인간의 목적, 삶의 이유, 세상의 의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전통에서 태어나, 이러한 이성의 잣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의 의미를 고민할 수 없습니다. 그저, 눈 앞에 목표에 급급하여 먹고 사는 문제에 침전되고, 자신의 취향 따라 살기만 하면 그만인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는 지난 주,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K군을 통해 이 징후들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그 날의 답변들은 우리가 웃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과 의미도 모른채 그저 이 땅을 살아가고 있음은, 오늘 이 시대의 패역함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성서를 읽고, 성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가히 모험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그 깊은 뿌리부터 헤집고, 깨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절망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이야기, 우주 전체의 거대한 희망이 되는 그 드라마를 전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를 살릴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톰라이트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을 주된 골자로 삼았습니다. 
그림은 수원성도교회의 M양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1) 진보의 신화 : 진화론적 낙관주의

      아래의 그림을 봅시다. 아래 그림은 마가복음 6장의 내용을 토대로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을 사용해서, 오늘날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절망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바다가 있습니다. 이 바다는 죽음의 바다 입니다. 사람들은 이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배위에 올라섰고,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이 배의 이름은 '과학 전통'입니다. 사람들은 이 위에서 이성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고, 그것에 따라 생각하며 판단합니다.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고, 사실과 신념은 다른 것이기에 참과 거짓을 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 배는 유유히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배를 향해서 강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 바람은 '현실'이라는 바람입니다. 이 바람이 불어오자 배에 타도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집니다. 현실의 강한 바람이 불어오지만, 이들은 자신이 서 있는 배 위에서, 자신이 왜 여기 있으며, 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속수무책,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괴로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배 위에서 이 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 과학 전통의 배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배위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바람의 반대방향으로 힘겹게 노를 저어갑니다.

     이성을 왕으로 삼은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 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그 곳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진보의 신화'라 부릅니다. 즉, 사람들은 이 과학적 전통 안에서, 세상은 조금씩 조금씩 발전할 것이고, 좀 더 나아질 것이고, 지금보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것을 '믿고', 노를 젓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괜찮아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막연합니다. '세상이 나아지겠지'.

     그러나, 이것은 마치 정치인들의 선거 공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런 선거 캐치 프레이즈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셨습니까?"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자신을 뽑아주면 나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보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림살이가 정말 나아졌습니까? 이것은 일종의 신화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힘써서 노를 저을 이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톰라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희망이 없다면 남는 것은 느낌뿐이다. 설득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해 보이는 것, 따라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바로 오락이다."

     사람들은 느낌만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질 것이라는 느낌. 그런데 이 시대가 우리에게 준 이 느낌이 너무 강력해서, 이 느낌에 빠진 사람들을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과학이 우리의 삶을 나아지게 할 것이라는 그 느낌에 자신들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이 나아지고 있습니까? 대량학살과 기아가 벌어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조차도 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과거 100년전보다 나아진 삶입니까? 우리는 진보했습니까?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졌습니까? 그저 느낌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들을 자극해줄 오락 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우리가 누구인지보다, 우리의 삶의 문제보다, 연예인들의 일거수 일투족과 가짜 결혼에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느낌. 우리가 점진적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이 환상의 시작은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간의 이성을 왕으로 삼은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세상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을 가려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이들은, 이 진화론적 낙관주의라는 배의 용골을 만들었습니다. 

혹시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인간은 완전해질 수 있고, 실제로 그 지점을 향해서 불굴의 의지로 진화하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발견하고, 이용하고, 즐겨야 할 대상이다. 교육을 열심히 받고 열심히 일함으로써 우리의 잠재력이 온전히 다 발현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솔직해져봅시다. 오히려, 과학이 밝힌 세상은, 오히려 진보가 아닌 다른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과학이 말하는 세상은, "빅뱅으로 시작되어 에너지가 서서히 고갈되어 가고, 우주는 춥고 어두운 저 너머로 서서히 확장되어 가면서 거대한 냉각을 향해 가고 있거나, 아니면 중력이 다시 강력하게 작용하면서 모든 것이 속도를 늦추다가 그 다음에는 멈추었다가 다시 빠르게 서로 합쳐지면서 거대한 박살을 향해 가고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아니면 이처럼 걱정스렁 가능성 중 그 어느 것 하나가 일어나기 전에, 공룡을 멸종시켰을 것이 분명한 거대한 운석이 지구를 때려서 공룡 멸종과 비슷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꽤 큽니다." 이러한 시나리오 중 그 어느 것도 진보의 신화 안에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진보는 커녕, 오히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처럼, 점점 절망으로 하강하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진보의 신화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심각한 악의 문제를 다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보 신화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이백 년 동안의 진화론적 낙관주의는 세계대전, 마약범죄, 아우슈비츠, 인종분리 정책 앞에서 그리고 아동 포르노그래피와 그 외에 우리의 오락을 위해 진화론이 20세기에 만들어낸 다른 흥미로운 부업들 앞에서 무력한 것입니다. 진보의 신화를 가지고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뿌리뽑지도 못합니다." 점차 나아져야 하는데, 왜 인류는 점점 끔찍한 상황들은 맞닥드리는 것입니까? 인류 앞에 존재하는 거대한 악 앞에서 진보의 신화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빛을 향해 행복한 전진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돼지들의 왕>의 마지막 대사가 이 세상의 현주소를 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곳은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뒤엉켜있는, 바로, 세상이다.'





      2) 이 세상을 떠나서 : 영지주의

     그리고 오늘날 전통의 배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진보의 신화를 가진 사람들보다 먼저 있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들은 악의 문제를 고민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변화무쌍한 현실의 앞에서, 악을 설명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역사는 깊습니다. 서양으로는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동양에는 부처가 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시간-공간-물질로 구성된 현 세상은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들어 이것을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동굴에 묶여 있고, 동굴의 벽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동굴 밖에서 누군가 그림자 놀이를 합니다. 그래서 그 그림자가 우리가 보고 있는 벽에 비칩니다. 이 벽에 비치는 그림자. 이것이 우리가 보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지의 사슬을 끊고, 이 현상 너머에 있는 진짜 실재. 그림자가 아닌 진짜 실재와 만나는 것. 이것이 플라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었습니다. 이 진짜 실재가 플라톤에게는 이데아였고, 부처에게는 '영원한 무'였습니다. 현실이 환상이니까, 현실 앞에 있는 악의 문제도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마치, 봄과 여름 후에는 가을과 겨울이 오고, 노을이 지면 어둠이 찾아오듯, 성장과 번영뒤에는 고통과 죽음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를 망가뜨리는 악이 아니라 그저 물질이 경험하는 변화와 부패, 덧없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즉, 악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이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을 벗어나면 됩니다.

     이렇게 현상과 물질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이 시대의 전통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이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 이 물질인 몸에서 벗어나서, 영혼의 상태로, 천국에 가는 것"를 바라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마치 플라톤주의자들처럼, 불교도들처럼, 시간-공간-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시각이 기독교 안에서도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1세기 교회들이 만났던 영지주의자들과 비슷한 견해입니다. 영지주의는, "물질에 갇혀 있는 사람이, 어떤 특별한 지식(영지)을 깨달으면, 그 지식이 그 사람을 새로운 영적 차원으로 들어가게 해준다는 생각" 이었습니다. "죽음을 지나, 공간-시간-물질의 세상을 넘어 무한한 세계로 들어간다는 사상" 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육체를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이라 주장하고, 우리가 궁지에서 탈출하는 길은 영원한 지식을 얻어, 이 세상의 창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것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오늘 인간에게 주어진 이 세계와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들을 초대교회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속박하고 있는 물질을 만들어 낸 창조 자체가 '타락'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성서 이야기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된 세상이 우리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 플라톤주의, 불교, 회교도들은 이 창조세계를 인간이 벗어나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물질을 벗으면, 완전한 실재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리해봅시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의 전통을 이끌고 있는 두 가지 사상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1) 진보의 신화 : 진화론적 낙관주의
2) 이 세상을 떠나서 : 영지주의

     이 둘은 모두 '세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한 쪽은 좋다고 하고, 한 쪽은 나쁘다 합니다. 한 쪽은 점점 나아질 것이라하고, 한 쪽은 벗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극단적인 소망은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아니고, 이뤄질 수도 없는 소망입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를 넘어서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일도 아니고, 도망간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에 대해서 진보의 신화를 믿는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더 크고, 나아지기 위한, 성장통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플라톤주의자, 불교도, 힌두교도,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우리가 시간-공간-물질로 만들어진 이 세상에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필멸성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물질적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라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저는 절망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이끌고 있는 거대한 생각의 토대들입니다. 이 토대 위에서 우리가 무엇을 소망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바다 위에 서 있는 배 위에서, 한쪽은 이 배가 파라다이스로 나아갈 것이라 말하고, 한 쪽은 이 배를 떠나는 것이 좋은 것이라 말합니다. 현실의 바람과 파도 앞에서, 한 쪽은 거짓말을 하고, 다른 한 쪽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배는 현실의 파도 앞에서 침몰할 것입니다.



2. 무대설정

 
    그렇다면 성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진보'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스스로의 힘으로, 심지어 하나님의 꾸준한 영향으로 인해 갈수록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이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기 때문에 아예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이 부활절에 예수님에게 하신 일을 이 우주 전체를 위해서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활절에 예수님에게 하신 일을, 이 우주전체를 위해서 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통해서만이, 악의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그러나 발생한 악, 그 악을 해결하려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그 거대한 이야기의 결말은, 예수님의 부활과 이 세상의 새로운 창조로 귀결됩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몸을 버리지 아니라, 오히려 몸은 구속에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지으신 인간의 몸은 버려지지 않고 새롭게 됩니다. 이 세상 또한 새로운 하늘과 땅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성서는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 그냥 시간이 흐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도 아니요, 사람이 몸을 버리고 떠나버려서 비어버린 세상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도 세상도 그 자리에 있으나, 새롭게 된 사람들과, 새롭게 된 세상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고, 오늘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성서를 펴기에 앞서, 오늘날의 상황을 이 시대를 연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가 성서를 읽는 것이, 세상을 섬기기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러했듯, 소망 없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소망은 허위입니다. 누군가가 진실한 소망,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소망을 전해야 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의 관점을 가지고 쓰였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1) 창조 : 창조의 선함




      1세기 기독교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원주의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각종 신화와 전통들이 다양한 시대의 틈바구니 속에 있었던 그들은, 그럼에도 이 혼란의 정국 속에서 결코 놓지 않았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선하다" 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세계가 악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나하면 이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면, 그 작품에 그 예술가의 성향과 의도가 묻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창조세계이기에 창조 세계는 선합니다. "창조는 처음부터 사랑의 행위"였고, 이 세계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창조의 선함'을 붙잡는 것이 성서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인간의 창조가 그 창조의 정점을 이루는데, 그 정점은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고안되었습니다. 인간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자신을 다시 반영해 드리고, 청지기 됨을 통해서 나머지 창조세계에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지음받은 것입니다."


     2) 타락 : 악의 성질



     그런데 그 선한 창조세계위에 악이 발생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반영하기를 거절했고, 창조세계는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라는 작품은, 다름 아닌 인간에 의해서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고, 그러한 인간 역시 하나님께 등돌렸습니다. 

     그렇게 사람과 세계에 악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원래 악했다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스스로 이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악의 문제가 선한 창조세계에 끼어들어왔고, 인간은 이것을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악의 주동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세상이 부패할 수밖에 없고 변화무쌍하다는 사실이 곧 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을에 나무에서 낙엽이 지는 현상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황혼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악은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한 창조계의 그런 변화무쌍함이 창조세계의 더 큰 목적을 가리키는 방향계의 역할을 합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창조세계는 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세계는 언제나 지향하는 바가 있습니다. 자연의 변화무쌍함도 하나님이 주신 이정표의 역할을 하는데, 그 이정표는 물질적 세계가 비물질적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세계에서 언젠가는 그것이 되어야 하는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만약, 변화무쌍함이 없었다면 우리는 창조세계를 마치 창조주인 양 대하면서 더 쉽게 우상숭배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시간-공간-물질로 존재하는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닙니다.  악은 인간이 창조세계를 만드신 하나님 대신, 그 창조세계의 어떤 부분들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반항적 우상 숭배'에 있습니다. 그 결과 이 우주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지혜롭게 창조세계를 다스려야 했으나, 오히려 창조주를 무시하고, 하나님보다 요구가 덜한 어떤 것, 그들에게 권력이나 쾌락이라는 단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줄 어떤 것을 예배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선한 창조의 자연스러운 변화의 일부였던 죽음이, 두번째 영역을 얻게 되는데, 성서는 그것을 때로 '영적 죽음'이라고 부릅니다...변화무쌍한 것을 예배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죽음밖에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상 숭배를 실제로 행하게 되면 악이 이 세상에 고삐 풀린 채 들어와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상상도 못할 수많은 결과를 낳습니다. 선하지만 불완전한 창조세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덧없음과 부패의 성질에 악이 뒤섞이는 것입니다."


     3) 언약 : 구속의 계획



     선한 창조, 그러나 그 창조에 역행하는 악의 발생, 그러나 하나님은 이 창조세계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창조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기자신을 내어주시며 인간에게 '구속'을 언약하십니다. 

     구속의 요점은, 있는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속박된 것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악이 물질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반항에 있다고 분석하기 때문에, 인간과 이 세상이 속박되어 있는 원인 역시,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면, 구속이란 그저 육체가 죽고 그 결과로 혼이나 영이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됨의 상태는 바로 죄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구속이란 궁극적으로 영이나 혼의 선함만이 아니라 새로운 육체를 입은 삶도 포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제시하는 계획이며, 그 계획은 하나님이 구속의 수단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길고도 다사다난한 이야기를 거쳐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는 사건으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이 이야기를 선한 창조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예수님의 오심은 모든 창조물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래의 로마서 8장 본문을 함께 연구하면서 더욱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구속은 낙관주의적 진화론자가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단지 창조계를 조금 더 낫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악한 물질적 세계에서 영과 혼을 구출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속은 창조계를 손상시키고 왜곡시키는 악의 문제를 해결한 후에 창조세계를 다시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속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알려진, 처음(그 선한 창조를 행하신)과 동일하신 하나님에 의해 성취됩니다. 처음부터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창조, 악, 그리고 구속의 계획'이 바로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표현하고자 변함없이 애쓴 주제들이고, 그 예수께서 죽음을 밟고 역사 위에 나타나신 이유입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토대요, 죽음을 밟고 서 계신, 진리와 거짓의 기준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나타나심.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 날에, 인간과 세계는 새롭게 될 것입니다. 모든 악의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을 매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3. 이 소망을 가지고 
다음 본문을 연구합시다.

     창세기 1~3장, 로마서 8장 18~25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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