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4:1~8


[1]
그러니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에게 물어야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주 예수 안에서 숨님처럼 이야기합니다.

[2]
여러분이 우리로부터 받아서 걸은 길은,
어찌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고,
걸음마다 하나님께 맞아 떨어져 기쁨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을 더욱 탁월하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 곁에서 그 주 예수를 통해서
어떤 선언을 했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거룩함!
즉 음란으로부터 여러분이 출애굽을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각각이 제 아내를 '거룩함'과 '경(敬)'으로 대할 줄 알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사람마냥 '욕(欲) 겪음'에 있지 않고,
이 일을 넘치게 취하다 그의 형제에게까지 욕심이 넘치지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에 관해서 주께서 정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미리말하고 증거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더러움으로가 아니라, 거룩 안으로입니다.



  본문을 번역한 뒤 무려 3년도 더 지나서 풀이를 쓴다(이 번역은 2014년 12년 4일 오전 7시 55분에 쓰였다). 이 글은 그간 나의 생각이 얼마나 달라졌을지를 따져보는 여유로운 사색이 아닌, 긴박함을 가지고 쓰는 나의 현실인식에 관한 것이다.


  정치 제도와 교회 운영은 닮아있다.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라는 칼 슈미트의 말을 증명하듯, 정치와 교회가 그려내는 세계 질서의 운용방식은 사실 같은 것이다. 독재자가 군림했을 때는 목회자도 독재자로 군림한다. 오늘날 목회자가 교회를 '통치'하려드는 현상과 이 나라의 군부독재의 과거는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다. 교회가 보수화되고 있다는 절규는 뉴스에 출현하는 문제적 교회들이 어떤 운영방식을 지키려고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지 않는가? "특정 시대가 만들어 내는 형이상학적 세계상은 그 시대 정치조직의 형식과 똑같은 구조를 같는다."[각주:1] 저 형이상학적 세계상은 세배대의 아내가 가진 세계상일 뿐이다(마태복음 20:21).

  통치 구조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언어 활동 역시 신학과 모종의 교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현실을 극복하게 하는 어떠한 '초과'를 표현하기 위한 언어가 바로 신학이기 때문이다. 현실 바깥으로부터 이 땅으로 돌입하는 현실적인 무엇에 대한 표현이 신학이다. 시간과 토지에 눈금을 매기는 자유-자본주의의 세계 안에서 조금의 틈도 발견할 수 없고, 무언가 희망을 발견한다해도 그것은 '자본을 얻으려는 또 다른 방식'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은 더이상 실망이 아니라 체념일텐데, 이런 현실 속에서 세속은 자본을 극복하는 초과의 언어를 신학에서 빌려온다. "~느님", "은혜롭다", "찬양" 등. 포스트 말론의 Too Young에 나오는 의미없는 '할렐루야'를 듣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데리다가 주장했듯, 진실 규명과 화해를 향한 전세계적인 분위기는 "종교없는 종교"로서 전지구적인 회개와 용서라는 신학의 또다른 세속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전혀 기쁘지 않다. 세속이 신학적 개념을 빌려쓴다는 사실이 신학의 우월함을 보여주는가? 아감벤은 세속과 신학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논증했다. 언어교환은 어느 한 쪽의 우월은 커녕, 양쪽 모두가 비슷한 상황을 공유하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양쪽의 구별이 언어로 환원되어 그 차이가 소실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인터넷 게시판에서 '은혜롭다'라고 말하는 것과 설교를 듣고 말하는 '은혜롭다'는 과연 다르다 말할 수 있겠는가? 양쪽 다 '나에게 좋다'는 표현일 뿐이다. 은혜는 그저 현실의 초과를 바라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이뤄질 수 없다는 체념을 반영한 패러디인가? 아니면 현실을 균열낼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을 지칭하는 단어인가? 차이는 저 '실제'에 있을텐데 말이다.


  언어를 통해 차이가 규명되지 않는 현실은 오히려 긍정적인 면이 있을지 모른다. 언어를 넘어 '실제'의 차원에서 본래부터 있었던 차이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즉 차이가 차이되게 하는 것이 에클레시아의 숙제이고, 이는 번역 신학을 경계했던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래서 위의 데살로니가전서 본문을 다음과 같이 고쳐 쓸 수 있다. 


  '나는 나를 비롯한 나의 에클레시아 동료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은, "어찌 말해야 하는 길"이 아니라, "어찌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길"이고, 매순간 걸음마다 신과 맞아 떨어지는 기쁨이 되는 길입니다. 신과 맞아 떨어진다는 말은 현실을 초과하는 현실에 대한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거룩함일텐데, 거룩은 그 단어가 가진 본래 뜻이 그러하듯, 세속으로부터의 분리, 이질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세속과 우리 사이에 물리적인 바리케이트를 쳐야한다는 말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바리케이트는 타인과의 관계에, 수직을 무너뜨리고 수평으로 놓일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경으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로 대하는 관계를 바리케이트로 막아놓고, 남편은 아내에게 거룩함과 존경으로 대하라고 했습니다. 욕(慾)은 타인을 소유물을 얻기 위한 도구, 혹은 그 소유물 자체로 보는 관계, 다시 말해 바리케이트를 넘어서는 일일 것입니다. 바울은 아내 앞에 "자기"를 붙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기"을 넘어서는 것, 거룩함과 존경을 벗어나는 것이 곧 욕(慾)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넘치지 않도록 나 스스로 치는 바리케이트가 곧 거룩입니다. 이 바리케이트는 자기 아내 뿐만 아니라 모든 형제 관계에 놓여야 하고, 이 바리케이트의 정당성은 메시아에게 놓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정의입니다.'

  언어게임을 넘어서는 것은 무젤만이 하루 세 번 꿇는 무릎이다. 곧 전통과 그에 입각한 실천만이 언어 게임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에클레시아의 전통이 다른 막벨라 굴의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바로 '금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금기'이듯, 인간에게는 '금기'가 신의 이름으로 주어졌다. 그 금기를 지키는 것이 '정의'이고, 신을 모르는 이는 자신의 '욕'의 한계를 모른다.


히브리서 12:16, 개인번역

누군가가 남창이나 에서처럼 금기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이 금기는 이데올로기나 전통을 지키기 위한 금기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 놓이는 금기이다. 이 금기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세속과의 차이를 뚜렷하게 할 것이다. 언어게임으로 만드는 차이는 아무런 차별성이 없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금기를 가진 자의 차별성은 금세 드러나게 되어있다. 당신은 어떤 '금기'를 가지고 있는가? 타인과의 대화할 때 내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무언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성실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을 세속은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메시아라는 글자가 아니라 메시아 자신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메시아로부터 비롯된,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작동하는 금기 말이다. '사랑하라'는 메시아의 추상적인 명령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면 그것은 자발적인 금기들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정치신학>, 칼 슈미트, p. 6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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