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이상한 일상

 

  여러 날 동안 많은 군중들이 다시 갈릴리의 예수께 모였습니다. 그분이 정박하는 호숫가 근처로는 엄청난 수의 환자들과 가르침을 원하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순서가 언제 올지 몰라 노심초사하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리고 기다림 속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굶주려 있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이 군중 곁에서 애가 끓는구나.

  이 사람들이 벌써 사흘이나 나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간 먹을 것 하나 없이 있었다.

  이들을 굶긴채 각자의 집으로 보낸다면,

  이 사람들은 길에서 힘이 풀려버릴거야.

  게다가 이들 중에는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구나"

 

  그러자 제자들이 답했습니다.

 

  "아니 이런 광야 위에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대체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대체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씀이세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 가진 빵들이 몇 개나 되니?"

 

  "일곱 개 있습니다."

 

  예수는 군중들에게 모두 광야 위에 기대어 식사 준비를 하라고 알리셨습니다. 예수의 알림이 군중의 선두에서 뒷 사람들까지 전달되었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식사 방식대로 서로 기대어 누웠습니다. 이렇게 기대어 누워 먹는 습관은 본래 희랍 사람들의 것이었는데, 오랫동안 제국의 포로로 있던 유대인들도 그들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누워서 먹는 습관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 혹은 밥을 줄까 기대하면서 식사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도자기에 표현된 고대 희랍식 식사 매너
희랍을 닮고 싶어했던 로마의 식습관도 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받은 빵 일곱개를 가지고, 감사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빵들을 부수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조각난 빵들을 나누어 사람들이 기대어 있는 대형 곁에 두었습니다. 빵 뿐만 아니라 작은 물고기들도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그 물고기들도 축복하식고, 이번에는 부수지는 않은 채 마찬가지로 군중 곁에 두게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먹었고 배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들을 모아보니 갈대 바구니 일곱 개에 가득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대형을 이룬 남성들만 사천명 정도 있었습니다. 이로써 사흘간 굶었던 이들은 광야에서 성대한 식사를 마쳤고, 예수는 이들을 해산시키셨습니다.

 

 

에피소드 2. 바리새인이나 제자들이나

 

  사람들을 해산시키셨으나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무르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는 곧장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수를 지나 달마누싸라는 지역으로 건너가셨습니다. 

 

"달마누다"라 쓴 지역이 보이시지요?

 

  달마누싸 지역에도 예수 일행을 기다리던 군중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맨 앞에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리새인들은 예수와 논쟁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 말이 옳다면 하늘로부터 기적을 보여보라'고 요구했고, 이것은 예수를 테스트하기 위한 그들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바리새인들을 보며, 깊은 한 숨을 내쉬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이 세대는 기적을 추구하는 것이냐?

  내가 아멘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에게는 더 이상의 기적 따위는 주지 않을거야!"

 

  그리고 배에서 내리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건너 편으로 떠나셨습니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을 보며 원망하고, 그들의 무익한 논쟁과 기적 요구에 짜증을 냈습니다.

 

  그렇게 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다시금 허기가 찾아왔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빵과 물고기를 그득하게 먹었음에도, 제자들의 뱃 속에서는 언제 그랬느냐는듯 꼬르륵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습니다. 제자들이 각자의 품 속을 뒤지다보니, 급하게 떠나느라 누구도 빵들을 챙길 것을 생각하지 못했고, 배 안에는 빵 하나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중요한 분별에 관해 말씀하시는 중이었습니다.

 

  "얘들아, 주목하렴. 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또 헤롯을 따르는 이들의 누룩을 경계해야 해"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저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다른 문제가 더 중요해보였습니다. 당장 배에는 열 세명인데, 빵은 고작 하나 밖에 없으니 서로를 돌아보며 빵들을 왜 챙기지 않았느냐며 수군댔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이러한 상황을 눈치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너희는 빵들이 없다는 얘기를 서로 하는거니?

  어찌 너희는 제대로 인지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거야?

  어찌 여전히 굳어버린 심장을 갖고 있는게야?

  눈들은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들은 있으나 듣지 못하며, 

  좀처럼 기억하려고 않는구나.

  내가 얼마 전에 빵 다섯 개를 오천명들에게 부수었던 것 기억나니?

  그때 남은 조각들이 바구니 몇 개였니?"

 

  제자들이 예수께 답했습니다.

 

  "열 둘입니다"

 

  "내가 빵 일곱개를 사천 명에게 부수었을 때는, 

  남은 조각들이 갈대 바구니 몇 개였어?"

 

  "일곱 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너희들이 이해하지 못한거야?"

 

  이처럼 자신을 부수어 많은 이들에게 오래된 언약들이 가리키고 있는 참된 삶을 주시려는 이는, 기적의 표층에 머물러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이해를 요구하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에피소드 3. 예수의 침, 뜨게 된 눈

 

  그리고 예수 일행은 벳사이다 지역으로 갔습니다. 

 

"벳새다" 가 보이시지요?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시각 장애인이니 예수의 기적에 관해 이야기는 소문으로는 들었을지언정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바리새인처럼 표적을 구할리 만무하고, 눈이 보이지 않으니 제자들처럼 표적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혼날 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마을에서나 대접받던 제자들은 이 시각 장애인을 예수께 데려와 예수께서 그를 만져 주실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시각 장애인의 손을 잡고서, 그를 따로 마을 밖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러고는 그의 두 눈에 침을 뱉으시고, 두 손을 그에게 얹으셨습니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보이지만, 이 방식은 당대 유대인들이 토라를 보고 만들어놓은 위생 규칙들에 맞선 창의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귀에 손가락을 넣고 혀에 침을 뱉는다던가, 진흙에 침을 섞어 눈에 바르는 방식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치료받는 당사자의 심정은 찝찝함 그 자체였겠지만, 그럼에도 예수의 침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이는 그에게 무엇이 보이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가 눈을 조심스럽게 뜨더니 위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보여요. 그런데 나무처럼 걸어다니네요."

 

  예수는 다시 자신의 손을 그 침 묻은 그의 두 눈에 얹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각 장애인의 시야가 분명해졌고, 상태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기뻐하는 그에게 예수께서 명하셨습니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렴"

 

  마을로 돌아가봐야 자신의 시각과 통념에 갇혀, 정작 기적의 의미를 숙고해보지 않는 이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시각 장애인이 그들에게 돌아가봐야 그들은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캐물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또 다시 채근하듯 이러한 기적을 예수께 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기적을 보여줘봐야 사람들은 그 기적에 열광할 뿐 예수가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말씀하실지에는 무감각할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기쁨을 나누며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 이 눈을 뜨게 된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일입니다.

 

에피소드 4. 바람피고 비뚤어진 세대와 다른 말과 사람

 

  예수 일행이 이번에 당도한 곳은 필립포스 지역의 카이사레이아였습니다. 벳세대 윗쪽으로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하는, 헤르몬 산 아래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로마의 퇴역 군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고, 그들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반영하듯 도시 이름도 로마 황제인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곳이었습니다. 예수가 길을 따라 마을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그이의 곁에는 제자들이 있었고, 벌써부터 예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예수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군대가 도시로 진군하듯, 큰 무리가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말하디?"

 

  제자들이 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침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선포하는 메시지가 같으니까요),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 하는 사람도 있고요(말라기에 나오는 오기로 한 엘리야 예언자요),

  어떤 사람은 모세가 말한 '그 예언자'에 속하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요."

 

  그리고 당사자인 예수는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정작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말하니?"

 

  이 말에 바위란 별명을 가진 시몬이 나섰습니다.

 

  "당신은 바로 메시아이시지요!"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에 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훈계하시고, 다음의 내용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그 인자는 많은 것을 겪어야만 한다.

-그 인자는 유대의 장로들과 지도자들과 문법학자들에 의해 거절당햐야만 한다.

-그 인자는 죽임 당해야만 한다.

-그 인자는 세 번의 낮 이후 다시 일어나야만 한다.

 

  예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금기를 건드리는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해야만 하는 법정에서는 사람들의 통념을 부수고 자극시킬 수 있을만한 내용이라도 진실하게 증언해야 하듯이, 예수는 이 인자의 비빌을 제자들에게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다시 바위 시몬이 나섰습니다. 그는 예수께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그이를 훈계하며 나섰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그로부터 몸을 돌려 제자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베드로를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 뒤에서 떠나라사탄아,

  너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숙고하지 않고,

  사람들에 관한 것들을 숙고하는 너는 나를 따를 수 없어."

 

  그리고 예수는 제자들과 군중들을 모두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뒤를 따라오기를 원한다면자기 자신을 부인하라.

  그리고 자신을 처형시킬 말뚝을 들어올려야 해. 그럼 나와 함께 할 수 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죽을 각오를 하라는 이 말이 제자들에게는 무겁게 들렸습니다. 유대인들이 모두 바라던 인자가 죽임당한다고, 그것도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유대인들의 통념과 맞서는 것입니다. 이 말들은 그들을 쉽게 죽음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저 예수의 이해할 수 없는 고집에 제자들은 고개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는 말을 잘 듣지 못했던 군중들은, 저 예수의 외침을 듣고서 그이가 마치 로마에 맞서자는 혁명가라고 생각하고서 환호했습니다. 그이는 마침 로마 황제에게 바쳐진 도시로 가고 있었고, 로마에게 맞선 정치범들을 처형시키는 방법인 말뚝을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뚝을 지고 로마로 가자'니! 이것은 누가 들어도 목숨 걸고 로마와 싸워보자는 소리로 들리지 않았겠어요?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이건 당연한거야. 만일 누군가가 자신의 '숨 쉬는 일상'을 지키려고만 한다면,

  그는 오히려 그걸 망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자신의 숨쉬는 일상이 나와 내가 전하는 복음 때문에 망가질 것을 각오한다면,

  그는 오히려 숨 쉬는 일상을 보존할 수 있을거야. 숨 쉬는 일상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잖아.

  누군가가 이 하나님 지으신 창조세계 전체를 얻고도,

  그 숨 쉬는 일상이 망가진다면, 대체 무슨 유익이 있겠어?

  그리고 대체 어떤 사람이 이 숨쉬는 일상을 대신할만 한 것을 줄 수 있겠어?"

 

  숨 쉬는 일상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이고, 그 예수가 말하고 있는 이상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말이란 금기어와 통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자의 죽음'이라는 금기어

-그리고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복음'

 

  아니, 하나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마침내 오랜 언약들을 성취하신다는 소식인 기쁨의 소식과, 그 복음을 성취할 인자가 고난 받고 죽임당한다는 금기어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나요? 정말 이 이상한 사람은 이상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이상한 사람과 이상한 말이 우리의 숨 쉬는 일상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아니, 오히려 숨 쉬는 일상이 가장 중요하기에, 이 이상한 사람과 이상한 말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이상한 말은 이렇게 뒤집힙니다. 우리의 숨 쉬는 일상은 창조세계 전체와도 바꿀 수 없을만큼, 가장 소중하다고요. 그런데 이 소중함을 저 이상한 사람과 그의 이상한 말이 보장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보장한다'고 했지, 리스크를 피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금기어와 사람들의 소망을 함께 말했다가, 그것을 거절하는 이들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죽임당하면, 숨 쉬는 일상은 파괴되고 그것으로 끝이 아닌가요? 그러니 예수의 저 '보존'은 '어려움을 겪지 않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극복함' 이라면요? 그이가 이후 보여줄 삶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저 '보존'을 다른 성경 번역에서는 '구원'으로 번역했더라고요. 즉 우리의 숨 쉬는 일상이 구원받는다는 말은, 리스크를 피하는 삶이 아니라, 리스크를 돌파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리스크에 죽음이 포함된다면?).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나와 내 말들을

  이 바람피는 비뚤어진 세대 속에서 수치스럽게 여긴다면,

  그 인자도 그를 수치스럽게 여기게 될 거야.

  그가 하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말이야."

 

  끝으로 예수는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하십니다. 인자는 다니엘의 예언대로 하늘의 하나님의 대권을 이양받을 것이고, 아버지의 뚜렷함 안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와서 자신의 두 눈만을 만족시키려는 바람피고 비뚤어진 세대의 실체를 폭로하실 것입니다(어쩌면 예수께서 눈을 뜨게 하신 시각 장애인이 흐릿하게 보았던 것은, 이 다니엘 예언의 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한 분 하나님을 잊고서 비뚤게 살아가는 세대와 같은 수치를 공유하고 싶다면, 그 길은 넓고 간단합니다. 사람들의 욕망에 어떤 금기도 두지 않는다면 되겠지요. 그러나 인자는 그를 그 세대와 함께 수치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이 수치를 면하는 길, 다시 말해 하늘 아버지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길은 이 바람피고 비뚤어진 세대에 맞서는 말과 사람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욕망에 맞선 말과 존재. 다시 말해 인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말과 존재로 인해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것이 말뚝을 짊어지고 인자의 뒤를 따르는 이의 당연한 숙명임을 알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욕망을 거세한 삶과는 다릅니다. 저 예수의 쐐기는 인간의 욕망을 끊어내는 것이 아닌, 욕망의 방향 전환과 재해석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욕망이 복음이었으나, 그 복음이 죽임당하는 인자에 의해 새롭게 재해석되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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