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15~6:9, 개인 번역

 

[1]

그러므로 주의 깊게 여러분이 어찌 걸을지를 보십시오,

지혜 없는 자들로서가 아니라 지혜자들로서,

이 카이로스를 밖으로 끌어내는 이들로서,

왜냐하면 이 날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생각 없는 이들이 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주의 그 욕망이 무엇인지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포도주에 취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불량함이 있습니다, 

오히려 숨결 안에서 넘치게 되십시오,

자신들에게 시와 찬미와 숨결의 노래들로 서로 말하며, 

그 주님께 우리의 가온으로 노래하고 높이며, 

모든 때에 모두를 위해/대신해/대표해서

우리 주님 메시아 예수의 이름으로 그 하나님, 곧 아빠께 감사하며, 

메시아의 두려움 안에서 서로서로의 아래 놓이며.

 

  이제 바울은 "어찌 걸을지(행할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인 내용과, 여자들에 대한 내용, 그리고 남자들에 대한 내용, 자녀들에 대한 내용, 종에 대한 내용, 주인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일단 바울은 어떤 행위에 대한 권면 이전에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즉 공동체적 정체성부터 분명히 합니다. 두 개의 표현을 사용했는데, 하나는 "지혜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 카이로스를 밖으로 끌어내는 이들"입니다(둘 다 복수 표현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흔히 16절은 개역성경에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번역되었는데, 일단 원문에서 이 문장은 명령문이 아닙니다(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τὸν καιρόν, ὅτι αἱ ἡμέραι πονηραί εἰσιν). 그리고 "때"는 '카이로스'의 번역어이고, 그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보통명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끼라"라고 번역된 단어는 엑사고라 조(ἐξαγοράζω)인데,

 

  따라서 "이 카이로스를 구출하는 사람들로서"라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카이로스를 구출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 카이로스"에 관해서 바울이 앞에 언급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라는 정관사를 붙였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카이로스라는 시간은 무엇일까요? 바로 윗 문장인 14절에서 바울은 부활을 언급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새로운 시간은 부활로부터 시작되고, 부활로 끝납니다. 즉 바울의 카이로스는 부활의 시간입니다. 메시아의 부활을 따라 살아가는 시간이 그에게 "그 카이로스"였고, 바울은 역사 위에서 이 잠들어있던 카이로스의 시간을 구출하고, 끌어내어, 이 땅에 드러내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고, 이것이 지금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날들"과 구별된 "그 카이로스"의 시간이 그들을 통해 드러나고, 이로서 빛이 없는 밤 중에, 빛과 함께 걷는 낮(에베소서 5:8)이 공존하는 기이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낮과 밤의 경계를 지키는 것이 부름 받은 이들의 역할이자 임무였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 역할을 세분화하여 적용시킵니다.

 

[2]

이 여인들은 각자의 남자들에게 주께 하듯, 

왜냐하면 남자는 이 여자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메시아께서 에클레시아의 머리이듯, 

그이는 그 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이 에클레시아가 메시아 아래 놓여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 여자들도 남자들에게 모든 것 안에서.

 

  바울은 가장 먼저 '여자'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부인에게 남편을 메시아처럼 섬길 것을 말하며 부부관계를 메시아와 교회의 관계와 견주어 놓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몸, 곧 교회의 구원자이다. 

 

이 남자들은, 그 여자들을 사랑하십시오, 

마치 메시아께서도 그 에클레시아를 사랑하셨고

그 자신을 그녀(에클레시아)를 위하여/대신하여/대표하여 넘기셨듯이,

이는 그녀를 거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이가 그녀를 말씀 안에 있는 그 물의 목욕으로 씻기어,

이는 바로 그이가 자신 곁에 장식된 그 에클레시아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점이나 흠이나 그러한 어떤 것을 갖지 않고, 

오히려 거룩하고 점 없게 되게 하기 위하여.

이처럼 이 남자들은 자신의 그 여인들을 

자신들의 몸들처럼 사랑해야 할 빚이 있습니다.

자신의 그 여인을 사랑하는 이는 자신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신의 사륵스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녀를 양육하고 따뜻하게 합니다, 

마치 메시아도 이 에클레시아를 그리 하듯이, 

즉 우리는 그이의 그 몸의 사지들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이 그 아비와 어미를 뒤에 남겨둘 것이고

  그 여자에게 붙어, 그 둘이 하나의 사륵스 속으로 될 것입니다"

이 뮈스테리온이 큽니다, 

그런데 바로 내가 메시아 속으로 곧 이 에클레시아 속으로 말합니다.

 

  어떤 경우든, 하나를 따르는 여러분 각각은

자신의 여인을 이처럼 자신으로서 사랑할지라, 

그 여인도 그 남자를 공경할지라.

 

  남자에게도 부인을 사랑할 것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이 또한 메시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관계를 논할 때 바울에게는 '몸'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습니다. 남편은 각자의 부인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하고, 이것은 메시아의 사랑을 받는 교회가 그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부부의 연합이고, 이것은 몸의 연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메시아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메시아 속으로 곧 이 에클레시아 속으로".

 

  그리고 다시 바울은 부부관계의 권면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 권면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부여합니다("여러분 각각은").

 

[3]

아이들이여, 주 안에 있는 너희의 부모들에게 경청하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그 아버지와 그 어머니를 존중하십시오, 

이것이 알림 안에 있는 첫 계명입니다, 

이는 당신에게 좋게 되게 하기 위함이며 

이 땅 위에서 긴 크로노스를 누리는 이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들이여, 여러분의 그 아이들 곁에서 성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의 경계와 훈육 안에서 그들을 먹이십시오.

 

  바울은 이제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부모의 말을 경청하라 말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가치 있게 대우하라 말합니다. 바울이 이것을 "최초 계명"이라 말하는 것은 1세기의 유대인들이 십계명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앞부분을 신에 대한 계명으로, 뒷부분을 인간에 대한 계명으로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계명 중 "부모 공경"은 "첫 계명"이 되면서도,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과도 연결됩니다. 

 

  시간에 대한 표현이 나왔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부모 공경의 결과가 "긴 크로노스 누리는 것"이라는 얘기는 출애굽기 20:12의 인용입니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물론 부모 말을 듣는다고 무조건 장수가 보장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은 50% 미만이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부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과 결부된 상황이었습니다. 저 바울의 편지를 교회에서 큰 소리로 낭독했을 때, 저 내용을 듣는 부모 자식의 마음가짐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더욱 사랑하는 것을 통해, 어려운 중에도 평안을 누리자고 마음먹지 않았을까요?

 

종들이여, 살몸을 따른 주인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여러분의 가온의 정직 안에서 경청하십시오, 

마치 주께 하듯, 눈가림을 따라 아부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메시아의 종으로서 호흡으로부터 그 하나님의 욕망을 실천하며, 

  좋은 생각을 가지고 섬기며, 그 주님께 하듯,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그가 어떤 좋음을 행한다면 그 각자가 그것을 주님 곁에서 되돌려 받게 될 것임을 알며, 

  그가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그리고 주인들이여, 바로 이것들을 그들을 향해 실천하십시오, 

  위협을 그치고, 

  그들과 우리의 그 주님이 하늘에 계심과 그이 곁에는 편애가 없음을 알며.

 

  당시 에베소 공동체 안에 노예들도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본문입니다. 노예들은 "메시아의 노예"로 불리며, 그 주인을 "주께 하듯 섬길 것"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노예이기 때문에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노예나 자유인이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가 낭독되던 자리에는 노예들 뿐만 아니라 주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도 같은 실천이 요구됩니다. 특별히 바울은 노예들을 위협하거나 편애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통치하시는 예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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