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우리는 드디어 마태복음 24장을 지나 25장으로 넘어왔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는 21,22,23장에 걸쳐 성전 지도자들과 논쟁하시며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 곧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경고하시고 거의 절규에 가까운 슬픔을 내비치셨습니다(23:37~39). 성전 밖에 나와서도 성전 공동체의 패망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 패망의 한 복판에서 이스라엘의 오랜 예언들도 성취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마침내 시온으로 신은 귀환할 것이며, 그 귀환한 신은 짐승들을 심판하고, 인자로서 왕이 되시고, 하늘의 통치자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의 승천과 더불어,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다니엘 7:22, 마태복음 25:34)"를 상속받는 자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핍박받는 산고 속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25장입니다.

1. 천국은 깨어있는 다섯 처녀처럼

마태복음 25:1~46, 개인번역

그때 그 하늘들의 통치는 열 명의 처녀와 닮게 될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횃불들을 취하고 그 신랑의 만남(ὑπάντησις)을 위해 나갔다.


  마태복음 25장이 "그때"로 시작한다는 것에 주목합시다. 예수께서 성전 밖으로 나오신 이후,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며 이야기를 시작하실 때, 그 이야기는 줄곧 "그때(τοτε)"로 연결되었습니다(24:9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즉 "그때"들로 연결된 마태복음 24장과 마태복음 25장은 앞에서 우리가 했던 이야기와 다른 별개의 이야기일 수 없습니다.

  25장의 첫 구절은 "그 하늘들의 통치"를 말합니다. 즉 "천국"입니다. 천국은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통치는 사람들을 통해 구현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 사람들은 메시아의 말씀에 순종하는 메시아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25장의 천국은 동료들에 의해 심문으로 끌려가는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 이 땅에 증언되고 구현될 통치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랑이 사라진 '무법(토라와 무관함)' 속에서, 끝까지 사랑하며 증언을 위해 견딜 것을, 그리고 이 중요한 시대의 격변기 속에서 깨어있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야 "천국 복음(24:14)"이 모든 민족(유대+이방)에게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 명의 처녀"란 예수께 "깨어있으라(24:42)"는 말을 들었던 제자들을 직접적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 열 처녀들은 어둠을 가르는 횃불을 들고 있는데, 이는 도둑같이 올/갈 인자에게 주목하고 있는 집주인과도 비슷한 맥락입니다(24:43). 그들은 "그 신랑의 만남"을 준비하는데, 이때 제가 "만남"이라 번역한 단어(개역한글은 "맞으러")는 '휘판테시스
(ὑπάντησις)'로 신약성경에서는 마태복음 25:1과 함께 아래 구절들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8:34, 개역한글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요한복음 12:13, 개역한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신약성경에서 '휘판테시스(
ὑπάντησις)'는 도시에 찾아오신 예수를 맞이하는 장면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흔히 마태복음 25장의 신랑 맞이는 '재림'으로 이해되었지만, 재림으로 이해한다면 마태복음 24장과의 맥락은 끊어집니다. 신랑은 열 명의 처녀들이 기다리는 도시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그 도시는 예루살렘이며, 그 신랑은 마침내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돌아오신 하나님은 야훼의 날 하나님의 복수를 홀로 감당하실 것이고, 예루살렘이 멸망으로 치닫는 중에 신원되어 승천하실 것입니다. 이 일련의 사건 속에서 그 인자에게 주목하고 영원한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이 신랑을 잘 맞이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는 줄곧 이것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지혜로웠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이들은 자신들의 기름과 함께 그 횃불들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혜로운 이들은 자신들의 횃불들과 함께 그릇(ἀγγεῖον)들 안에 기름을 취했다.
그런데 그 신랑이 시간이 걸리자 모두가 꾸벅거리다 잠들었다.


  그리고 두 부류의 사람들이 제시됩니다. 양 쪽다 모두 횃불은 갖췄습니다. 그러나 기름의 유무가 이 두 부류를 가릅니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앞에서 확인했던 구절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42,43a, 개인번역
그러므로 깨어있어라, 왜냐하면 너희들이 어떤 날에
우리 주께서 가신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주께서 가신다"를 '시온으로 돌아오신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고(이사야 24:23), 성도들이 나라를 얻는(다니엘 7:22)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중요한 사건들은 예루살렘이 멸망으로 치닫는 와중에 벌어집니다. 따라서 '깨어있음'은 이 시기에 벌어지는 사건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합당한 대처를 해야 한다는 당시의 상황에 속한 것으로 읽힙니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잠드는 것"은 실제로 잠 못드는 밤을 보내라는 말이 아니라, 이 사건들 속에서도 시간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 시간에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악한 종"을 대비시키셨습니다.

      마태복음 24:48~51, 개인번역

그런데 만일 악한 종이 그의 가온에 '나의 주인은 늦으시는구나'말하며,
자신의 동료 종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면,
그러한 종의 주인은 기대하지도 않은 날에, 깨닫지도 못한 시간에 도착해서는,
그를 두동강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몫은 위선자들과 함께 두어질 것이다.
그때 우는 이, 이를 가는 이가 있을 것이다.

  즉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상태는, 예루살렘 멸망과 인자의 승천 시기에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부적절한 행동의 결과는 심판과 "울며 이를 가는 것"인데, 이 "울며 이를 가는 것"을 이미 예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성전 안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22:12,13, 개인번역

   '자네, 어찌 자네는 여기 들어왔는가,
   혼인 옷을 갖지 않았음에도?'

  그때 그 왕이 그 섬기는 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그의 두 손과 두 발이 묶어서 더 바깥 어둠 속으로 그를 던져라.
   거기는 울며 이들을 가는 이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름받은 이들은 많다, 그런데 선택된 이들은 적다."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이전 본문들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지옥'에 관련된 본문이라 이해되었던 "우는 자와 이를 가는 자"는 예루살렘 멸망 속에서 인자의 신원에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부름받은 이들은 많으나, 거짓 메시아들의 전쟁의 소문과 예루살렘 멸망(산통) 속에서, 예수와 왕되심에 주목하고 에클레시아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리고 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사람"이 등장하는 마태복음 22장의 본문과 25장의 본문 모두 혼인잔치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마도 '슬픔'과 '이를 가는 복수심'의 결합은, 에클레시아에 참여하지 못한 안타까움과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원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한 밤 중에 소리침이 있었다.

  "보라, 신랑이다, 너희들은 만남(ἀπάντησις)[각주:1]을 위해 나가라!"

  그때 모든 바로 그 처녀들이 일으켜졌고 자신들의 횃불들을 갖췄다.
그런데 어리석은 이들이 지혜로운 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너희들의 그 기름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라,
  왜냐하면 우리의 횃불들이 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혜로운 이들이 답하며 말하길,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와 너희에게 충분하지 못하리라.
  너희들이 오히려 상인들을 향해 가서 그들에게 사라."

  그런데 그들이 사러 떠났을 때 신랑은 왔고,
그리고 준비된 이들은 그이와 함께 혼인잔치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잠겼다.


  마침내 신랑이 시온의 딸(예루살렘)에게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남편 잃은 괴로운 시기(포로기)를 보냈던 시온은 하나님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혼인잔치의 날에 준비된 딸들은 "일으켜져서(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그 혼인 잔치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때 준비없던, 즉 부적절한 행동을 취했던 이들이 상황을 만회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름은 각자입니다. 자신의 기름은 자신에게만 충분할 뿐,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습니다. 뒤늦게 기름을 준비하려고 했을 때, 인자는 이미 승천했고, 준비된 이들만이 예수와 함께 에클레시아로 역사 위에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문이 잠겼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앞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24:32,33, 개역한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인자는 문 앞에 이르렀고, 그 문 앞에 이르신 인자를 맞이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의 정체는 '시간'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루실 사건들이 벌어질 임박한 사건으로서 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 동안 깨어있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버렸습니다. 즉 임박하다고 생각해야 했는데, 임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참혹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지 못했으며, 그러는 와중에 인자는 승천하고, 예루살렘은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남은 처녀들도 와서 말하길,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그런데 그이가 대답하며 말했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


  이 "주여, 주여"도 익숙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7:21~23, 개역한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로써 우리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때, 그 사람이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이란, 당시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의 멸망/승천'의 시기 속에서 1) 사랑으로 견디며, 2) 심문 속에서 성령을 따라 증언하며, 3) 에클레시아의 일원으로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같은 요청을 반복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깨어있으라,
왜냐하면 그 날도 그 시간도 너희들이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36,42,43 개역한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다시 한 번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이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담화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36절과 42절 사이에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그리고 42절 이후에는 도둑이 올까 깨어있는 집 주인 이야기가 이어졌었는데, 이 25장의 "그 날도 시간도 모르니, 깨어있으라" 에서는 달란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로써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도둑이 올까 깨어있는 집주인 이야기와 달란트 이야기가 같은 주제를 전달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2. 악하고 느려터진 종아!


왜냐하면 바로 이와 같이 떠나는 사람이 자신의 종들을 불러서
자신 아래 속한 것들을 넘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편으로 누군가에게는 그이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다른 한 편으로 누군가에게는 둘을,
다른 한 편으로 누군가에게는 하나를 (주었다),
각각에게 그 개인의 잠재력을 따라서, 그리고 그이는 떠났다.


  이 달란트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는 입구는 저 "떠나는 사람"에 대해서 확실히 규명하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 떠나는 사람과 그 사람의 종들, 그리고 그 종들에게 넘기는 재산의 이야기는 포도원 주인이 자신의 포도원을 종들에게 맡기는 이야기와 그 구조가 같습니다. 또한 "불의한 청지기 비유"로 알려진 누가복음 1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 이스라엘 - 주어지는 임무. 따라서 우리는 떠나는 사람은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의 종들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언가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토라 준수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잘 지켜서, 열방의 빛이 되는 것이 곧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거룩한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왜 하나님 역할을 "떠나는 사람"으로 설정하셨을까요? 저 "떠나는"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포로기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다양한 은유로 표현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주인-종'의 관계이고, 이사야 54장에서는 '떠나간 남편-그 남편을 기다리는 불임 여성' 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종을 떠나든, 남편이 신부를 떠나든 이 은유들은 공통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셨다', 포로기입니다.

  그 포로기의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귀환을 신뢰하며 토라 준수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앞의 기름을 준비하는 처녀들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뉩니다. 한 쪽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배로 불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은 그저 땅에 묻어놓습니다. 그리고 반전은 마지막 종에게 있습니다. 포도원 비유에서 세 번째 보냄받은 아들에게 반전이 있었듯이 말입니다.


곧장 그 다섯 달란트 취한 이는 떠나서 그것들 안에서 일했고 다른 다섯 달란트를 만들었다.
이처럼 그 두 달란트 취한 이도 다른 두 달란트를 얻었다.
그런데 그 한 달란트 취한 이는 떠나서 땅을 팠고 그 주의 동전을 숨겼다.


  다시 귀환하는 왕에 합당하게 행동한 두 사람이 먼저 제시됩니다. 이들은 달란트를 가지고 노동했고, 합당한 결과를 내었습니다. 이들은 기름을 준비했던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깨어서 왕의 귀환을 준비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마지막 종은 그저 이스라엘의 임무를 땅에 묻어놓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시간 이후에 바로 그 종들의 주인이 왔고 그들과 함께 이치를 들어올렸다.


  "많은 시간 이후에" 즉 포로기의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종들의 주인이 귀환했습니다. 바로 시온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해서 평가합니다. 즉 돌아온 주인은 이스라엘의 행실을 정당하게 평가(심판)하고자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섯 달란트 취한이가 앞으로 나와 다른 다섯 달란트를 바쳤다, 말하길,

  "주여, 다섯 달란트를 나에게 넘기셨는데, 보소서, 다른 다섯 달란트를 내가 얻었습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했다.

  "좋다, 선하고 신실한 종아, 적은 것들 위에서 신실했으니,
  많은 것들 위에서 너를 내가 세우리라.
  너는 너의 주인의 그 기쁨 속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그 두 달란트 취한 이가 말했다.

  "주여, 두 달란트를 나에게 넘기셨습니다. 보소서, 다른 두 달란트를 내가 얻었습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했다.

  "좋다, 선하고 신실한 종아, 적은 것들 위에서 신실했으니,
  많은 것들 위에 너를 내가 세우리라.
  너는 너의 주인의 그 기쁨 속으로 들어가라."


  본문에서 눈에 들어오는 표현은 "선하고 신실한 종"입니다. 우리가 봤던 마태복음 24:45과도 비슷합니다.

마태복음 24:45, 개역한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요청은 즉각적입니다. 먼 미래의 일일 수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예수는 자신을 '시온으로 귀환하는 왕'으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왕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 곧 혼인잔치요, 천국이며, "주인의 그 기쁨 속으로 들어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들은 애매모호한 의미가 아니라, 임박한 파국과 예수 사건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사람은 그렇다면 어떤 사람일까요?


  그런데 그 한 달란트 취했던 이도 앞으로 와서 말했다.

  "주여, 나는 당신이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며,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완고한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며 떠나서 당신의 그 달란트를 이 땅에 숨겼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이 당신의 것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주께서 답하며 그에게 말했다.

  "악하고 느려터진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며
  뿌리지 않은 곳에서 거둔다고 알았느냐?
  그러면 너는 나의 그 동전들을 은행가들에게 맡겨야 했다.
  그러면 내가 와서 이자와 함께 나의 것을 돌봤으리라.
  그러니 너희들이 그로부터 그 달란트를 들어올려서
  열 달란트 가진 이에게 주어라.
  왜냐하면 모든 것을 가진 이에게 주어질 것이고 넘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갖지 못하면, 그로부터 가진 것도 들어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 쓸모없는 종을 너희들이 더욱 바깥 어둠 속으로 던져라.
  거기에 눈물과 이빨들의 갊이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을 오해했고, 오해했기 때문에 토라에 잘못된 방식으로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그 충실은 충실이 아니라, 오히려 충실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종은 신은 부당한 요구를 하시는 분이라 생각했고, 신께 받은 것은 땅에 묻는 게 능사라고 판단했습니다. 결론은 '본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입니다. 예루살렘의 파국 속에서 사랑으로 견디고, 심문 속에 증언하라는 요구가 부당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의 승천을 준비하라는 것을 말도 안되는 요구로 들릴지 모릅니다. 그저 예수의 말은 땅에 묻어놓고 '실용적인' 대처를 해야겠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종이 받게 되는 평가는 이러합니다. "악하고 느려터진 종아", 예수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악하고, 시간에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기에 그는 늘 느립니다. 그는 이스라엘로서 임무를 모조리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임무는 선하고 신실한 종에게 넘치도록 부여됩니다. 그 임무에 등돌린 유대인은 모든 것을 빼앗길 것입니다. 이는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쓸모없는 종을 너희들이 더욱 바깥 어둠 속으로 던져라.
거기에 눈물과 이빨들의 갊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달란트 비유는 재림을 준비하는 교회의 자세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임박한 파국 속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본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장을 증명하는 뚜렷한 근거가 이 뒤에 이어집니다. 예수께서 다시 같은 이야기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3. 이미 시작된 오는시대 속에서


  그런데 인자가 자신의 영광 안에서 가고
  모든 천사들이 그와 함께이기만 하면 (반드시),
  그때 그이의 영광의 왕좌 위에 그이가 앉을 것이다.


  인자의 승천입니다. 그리고 이 승천과 함께 심판이 시작됩니다.


  그때 그 왕이 오른 편들로부터 (있는) 이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너희들은 이리 오라, 나의 아빠의 복받은 이들이여,
  너희들이 너희들에게 코스모스의 설립으로부터 준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나의 아빠의 복받은 이들"이란 표현은 우리를 마태복음 5장으로 데려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바로 이들이 "코스모스의 설립으로부터 준비된 나라"를 상속 받습니다. 그 나라는, 인자의 승천을 예언한 다니엘이 그 승천 장면에 바로 이어서 예언하고 있는 바로 그 나라입니다.

다니엘 7:22, 개역한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

Dn 7:22, ESV
until the Ancient of Days came,
and judgment was given
for the saints of the Most High,
and the time came when the saints possessed the kingdom.

  다니엘 7:22의 "성도들에 대한 신원"이 곧 마태복음 25장의 "우편에 있는 이들이 얻는 판단"인 것입니다. 그 판단이란,


  왜냐하면 내가 배고플 때 너희들이 나에게 먹도록 해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너희들이 나를 마시게 했으며,
  내가 손님이었을 때 너희들이 나를 모았으며,
  내가 옷이 없을 때 너희들이 나를 (옷으로) 둘러 쌌고,
  내가 연약할 때 너희들이 나를 돌보았고,
  내가 감시 안에 있을 때 너희들이 나를 향해 왔기 때문이다."


  그때 의로운 이들이 그이에게 대답하며 말하길,

  "주여, 언제 우리가 당신이 굶주린 것을 보았으며 먹였습니까?
  (언제 우리가 당신이) 목마른 것을 보았으며 마시게 했습니까?
  그런데 언제 우리가 당신이 손님인 것을 보고 우리가 모았습니까?
  혹은 (언제 우리가 당신이) 옷 없는 것을 보고 우리가 (옷으로) 둘러 쌌습니까?
  그런데 언제 우리가 당신이 연약하거나 감시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당신을 향해 왔습니까?"

  왕이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나의 바로 이 작은 형제들 중 하나에게 행하는 한,
  너희들은 나에게 행한 것이다."


  이때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 대한 평가는 구체적입니다. '배고픔', '목마름', '손님 초대', '옷입힘', '돌봄', '감옥 면회'. 멸망하는 예루람렘 안에서 끝까지 견디며, 예루살렘 밖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삶을 영위하는 구원 얻은 이들의 삶을 묘사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들이 예수를 얻게 될 것이고, 이미 그들은 예수를 얻었습니다!

  그때 그가 왼쪽 편들로부터 (있는) 이들에게도 이야기할 것이다.

  "너희들은 나로부터 떠나라
  그 고발자와 그의 천사들에게 준비된
  그 오는시대의 불속으로 저주받았으므로.
  왜냐하면 내가 배고플 때 너희들은 나에게 먹도록 하지 않았고,
  내가 목마를 때 너희들은 나를 마시게 하지 않았으며,
  내가 손님이었을 때 너희들은 나를 모으지 않았고,
  내가 옷이 없을 때 너희들은 나를 (옷으로) 둘러싸지 않았고,
  내가 연약하고 감시 아래 있을 때 너희들은 나를 돌보지 않았다."

  그때 바로 그들도 대답하며 말하길,

  "주여, 우리가 언제 당신이 배고프거나 목마르거나 손님이거나
  옷이 없거나 연약하거나 감시 안에 있다는 것을 보고도
  당신에게 섬기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루살렘 파국 속에서, 사랑으로 견디기를 거절한 사람의 모습 아닙니까? 그리고 그 결론은 이러합니다.


  그때 그이가 그들에게 대답하며 말씀하셨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이 작은 이들중 하나에게 하지 않는 한,
  너희들은 나에게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들은 오는시대의 형벌/교정 속으로,
  다른 한편으로 의인들은 오는시대의 삶 속으로 떠날 것이다."


  오는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오는시대는 '형별/교정' 아니면 '삶'인 시대입니다. 당신은 형벌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예수의 그동안 모든 공생애의 강론은 여기서 마무리 됩니다. 그 강론을 모두 마치시고, 예수는 재림은 커녕, 이제 승천을 위한 한 걸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바로 이 모든 말씀들을 끝내실 때가 되었다, 그이가 그이의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너희들 알아라, 두 날들 이후 그 유월절이 있다,
  그리고 인자가 그 말뚝처형됨 속으로 팔아넘겨진다."




  1. 이때 휘판테시스가 아닌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아판테시스. 의미상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같은 단어가 쓰인 구절은 사도행전 28:14 우리는 거기서 신도들을 '만나서', 그들의 초청을 받고, 이레 동안 함께 지냈다. 그런 다음에, 드디어 우리는 로마로 갔다. 데살로니가전서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주의 아판테시스)'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휘판테시스는 만남의 대상의 이동에 초점을 맞추고, 아판테시스는 만나러 가는 주체의 이동에 초점을 맞춘 것인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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