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벨라 굴에 묻힌 사람

-아브라함에 관하여


1. 이슬람과 기독교의 뿌리


  모든 것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세계의 3대 종교,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자신들의 뿌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여기 막벨라 굴에 그의 아내와 함께 묻혀있지요. 그는 아브라함입니다. "2006년 덴마크에서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이 실렸습니다. 국제적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고, 10억이 넘는 기독교인들의 지도자로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각주:1] 그리고 그 베네딕토 16세의 입장 표명에 대하여 무슬림 지식층은 교황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는데요. 바로 그 내용에 오늘의 인물인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무슬림과 기독인이 상호 존중과정의 그리고 서로 공유하는 아브라함의 전통 안에서 본질적으로 서로 공통적인 것들에 기초하여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세워 갈 것"


  서로 공유하는 아브라함의 전통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경에는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꾸란에는 이스마엘을 하나님께 바치는 '이브라임'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22:1~4, 개역한글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꾸란 37:102~107

그(이스마일)가 그(이브라힘)와 함께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브라힘이 말하니 


  “오, 아들아! 실로 내가 너를 희생시키는 것을 꿈에서 보았는데, 

  너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이에 그가 말하니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 받으신 대로 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제가 알라의 명령을 따르는 인내하는 한 종임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두 사람은 순종하고, 

이스마일의 머리를 숙이려 했을 때, 우리(알라)가 그를 부르니 


  "오, 이브라힘!

너는 그 꿈을 확신하였으며 (이미 그것을 이행한 것이니라) 

실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베풀 것이니 진실로 이것은 분명한 시험이었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큰 희생(양)으로 그를 대신하였느니라 


  과연 무엇을 가리켜 '공유할 수 있는 아브라함 전통'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내용은 비슷하나 이름이 다르고, 그 이름을 대하는 거대한 두 부류의 사람들 속에서, 공유할 수 있다면 대체 무엇을 말입니까?


2. 신은 시험하시는가


  두 본문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시험하기 위해 아브라함(꾸란에선 이브라힘, 둘이 동인일물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떠나서, 이야기 안에서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으므로 '아브라함'이라 통칭하겠음)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시험일까요? 자고로 시험이란 평가 기준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성서 내러티브는 인류가 비인간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비인간화를 막기 위한 신적 프로젝트가 시작되는데, 그 프로젝트의 시작이 아브라함입니다. 이 아브라함이라는 분기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인간을 창조한 신이,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호명한 첫번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언약을 제정하셨는데, 그 장면이 창세기 12장입니다.


창세기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2)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 본문은 하나님이 아브람(신이 직접 개명하기 전 이름)을 호명하고 나서 하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에서 명령문으로 주어진, 즉 아브라함이 수행해야할 것은 하나 뿐입니다. 나머지는 그 하나뿐인 수행요구를 따랐을 때 따라오는 결과를 말하고 있고요. 그 수행내용이란 간단합니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לֶךְ־לְךָ֛ מֵאַרְצְךָ֥ וּמִמּֽוֹלַדְתְּךָ֖ וּמִבֵּ֣ית אָבִ֑יךָ אֶל־הָאָ֖רֶץ אֲשֶׁ֥ר אַרְאֶֽךָּ׃


  아브람이 떠나야 할 것은 세 단어로 표현됩니다. 먼저는 태어난 땅(מֵאַרְצְךָ֥), 즉 그간 삶을 영위해왔던 삶의 환경입니다. 그리고 친척(וּמִמּֽוֹלַדְתְּךָ֖), 생존을 위해 연대하고 있던 이전의 인간관계도 근절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집(וּמִבֵּ֣ית אָבִ֑יךָ).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모두 생존을 위해 필연적인,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시제가 이어집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אַרְאֶֽךָּ)" 땅으로 가라. 히브리어 동사 '라아'는 미완료로 쓰였습니다. 즉 아직 지시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즉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시되지 않은 땅으로 가라."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시되지 않은"과 "땅으로"에서 '으로'라는 전치사 '엘(אֶל)'은 호응이 불가능합니다. 지시되지 않은 땅을 어찌 갈 수 있을까요? 약속 시간만 정해놓고, 약속 장소를 정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말은, 일단은 '니가 그간 살아왔던 삶을 포기하라'가 됩니다. 인간다운 인간을 다시 창조하기 위해 부른 인간에게 신은, '포기'를 말했습니다. '아직 지시되지 않은 땅으로 가라'는, '지시되지 않은 땅을 위해, 일단 너의 생존을 포기하라.'


  그리고 이 포기는 다음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1) 이 최초의 생존 포기의 인간을 시작으로, 그렇게 생존을 포기한 많은 사람들을 이룰 것이고

2) 이 최초의 생존 포기의 인간은 복을 받아 이름이 창대하게 될 것, 복이 될 것.


  개역성경이 '복을 받다'라고 번역한 것을 LXX는 "신이 너를 찬양/칭찬할 것이다"라는 파격적인 번역을 보여줍니다. 즉 일련의 연쇄과정이 있는 것 같네요. 생존포기의 한 사람은 '신이 찬양한 사람'이 되고, 신의 찬양을 받은 사람의 이름은 영광스러워지며, 이것을 한 문장으로 말하면, "그는 복받은 사람(εὐλογητός)이야"가 되겠군요. (그리고 원문에는 '복의 근원'이 아닌, 그저 '복'만 있습니다. '근원'은 한글성경이 번역될 때 추가된 번역어입니다.)


3) 그리고 이 생존 포기의 인간을 찬양/칭찬 하는 사람은 같은 찬양/칭찬을 받게 됨.

  그러나 이 사람을 저주하는 사람을 찬양하는 사람은, 같은 찬양을 신으로부터 받게 되고, 생존 포기의 사람을 저주하는 사람은, 같은 저주를 신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땅의 모든 족속이 이 생존 포기의 첫 사람인 아브라함 안에서(LXX, ἐν σοὶ), 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즉 상호교류, 대화의 방식을 통해서 복과 저주는 흘러갑니다. (아마도 2절에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 번역한 것은, 아브라함이 이 상호교류 방식의 시작점이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신은 생존포기의 첫 사람으로 아브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신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 즉 모든 민족의 아버지로 직접 개명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정처 없이 일단 떠났다는 이 생존포기의 원칙을, 신약의 저자들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8, 개정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면, 그 시험의 평가 기준이 무엇일지를 고민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뚜렷해졌네요. 신이 아브라함을 시험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생존을 포기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3. 아브라함의 전통은,


  저는 이 글의 서두에서, 이슬람에서 보내온 공개서한을 인용했습니다.


  "무슬림과 기독인이 상호 존중과정의 그리고 서로 공유하는 아브라함의 전통 안에서 본질적으로 서로 공통적인 것들에 기초하여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세워 갈 것"


  여기서 말하는 "서로 공유하는 아브라함의 전통"은 사실 발견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브라힘이 같은 인물인지의 여부도 불분명하고, 막벨라 굴을 자신들의 출처로 주장하는 것 외에는 딱히 공통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체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유하는 아브라함의 전통이란 무엇일까요? 그저 아무 의미도 없는 말 아닐까요?


  그런데 저는 아브라함과 이브라힘이 나오는 비슷한 내용의 내러티브 두 개 안에서,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아브라함과 이브라힘은 모두 시험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내용이 이삭이 되었든, 이스마엘이 되었든 모두 자기 자식을 죽이는 문제이고요. 자기 자식을 죽이는 문제는, 신이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약속했던 그 약속에 비추어 이해한다면,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과 같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생존을 포기했을까요?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브라함은 다시금 생존을 위해 본토에 정착하여, 친척들을 모아, 아버지의 집을 구성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식을 죽인 땅에서 정착하려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으며(더군다나 자유로이 떠도는 유목민인데), 자식이 죽으면 자기 씨족을 모으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생물학적으로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 곁에 누가 있으려고 할까요? 이렇듯, 자식을 죽이는 아버지를 통해서는 아버지의 집 구성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끈질기게 묻고 있습니다. '생존 포기의 원칙을 따라, 아직 지시되지 않은 땅을 향해 걷고 있는가?'


  그리고 이 생존포기의 요구를 수용하고 걷는 길을, 성경과 꾸란은 동일하게 '믿음'이라 부른다. 


창세기 15:5,6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꾸란 6:82

믿음을 갖되 그들의 믿음을 사악함으로 혼돈하지 아니한 그들에게 실로 안전함이 있을 것이요 그들이 오른길로 인도되리라.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부여한 예증으로 그것으로 백성에게 임하도록 하였노라.


  아브람은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요? 믿음은 신의 요청에 대한 응답입니다. 생존 포기의 인간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인가요? 혈통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자기의 갈 바를 모르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생존을 등한시 하는 생존 포기의 인간이야 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신의 찬사가 쏟아집니다. 꾸란도 마찬가지이지요. 아브라함에게 부여한 예증이란, 생존 포기의 인간으로서 행보, 곧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본토, 우리의 인간관계, 우리의 전통을 고집할 때 벌어지는 일은 무엇일까요? 즉 믿음이 없을 때 벌어지는 일 말입니다. 아무도 자신의 생존을 놓치 않으려는 상황 속에서,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타당해 보일 때, 신약성경은 그것을 '게헨나'라고 부릅니다. 게헨나는 이스라엘의 쓰레기 하치장으로서 개역성경에서는 '지옥'이라 번역되었고요.


마태복음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4. 신의 찬양을 받는 자와, 마침내 구성되는 '아버지 집'


사도행전 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자신의 생존 포기는 곧 생명 추구입니다. 생명을 추구할 때 자신의 생존은 자연스럽게 주어집니다. 이것을 우리는 한 사람을 통해 봅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재판정 앞에서 침묵했던 사람, 그 사람을 신은 영화롭게 했습니다. 막벨라 굴을 자신의 원류라고 주장하는 이들 중 절반은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고, 모두의(심지어 원수조차) 생존을 추구했던 사람을, 신이라 주장합니다. 그 신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겠습니까? 저를 포함하여, 예수를 믿는 여러분.


  아브라함이 구성하려는 아버지의 집은, 이 땅에 있는 다른 아버지의 집들과 다를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아브라함과 혈통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부심으로 여기는 사람들조차, 서로 싸우고 전쟁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진정한 아버지의 집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신은 자신의 집을 만들고자 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집을 짓지 못하게 한 이유였습니다. 어차피 그 집은 갈등과 분쟁의 집이 될테니 말입니다. 


  신은 철저한 생존포기의 원칙 속에서, 서로의 생명을 추구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바로 십자가의 저 사람을 통해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저 사람이 곧 신인 것입니다. 신이 스스로의 생존을 포기했음이 골고다 언덕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신이 아브람을 불렀듯,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라고. 그래야 진짜 생명을 맛볼 수 있다고.


누가복음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1. <알라>, 미로슬라브 볼프, p. 3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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