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살인과 도시

-르네 지라르의 '초석적 살해'에 관하여




1. 가인의 살해와 모방 메카니즘, 그리고 도시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자신도 살인을 당할까 두려워합니다. 자신이 살인을 했던 과정이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한 과정임을 인정하기 때문이죠. 형은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했고, 동생이 획득한 무언가를 자신은 얻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분개했습니다. 이윽고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동생을 없애기로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깁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자신이 획득하지 못한 무언가에 대해서 슬퍼하고 분개합니다. 이윽고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누군가를 없애기로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있습니다. 강아지 무리에서 사는 어린 고양이는 강아지들의 행동을 거울을 보듯 학습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능력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아기는 부모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 반복을 통해서 부모처럼 말하게 됩니다. 아이의 말투는 한 집에 사는 그 부모의 말투를 닮아 있습니다.


  모방은 자연스러운 것이면서도 왜곡될 수 있습니다. 서로 모방하는 관계를 '라이벌'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모방이 격해지고, 결국은 '내가 그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쳤을 때, 가인은 새로운 방식을 창안했습니다. 바로 살인입니다. 내가 될 수 없는 그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방식을 만들자마자 가인은 두려움에 빠집니다. 이 새로운 방식을 누군가가 모방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때 신은 다음과 같이 '갈라놓아 새로운 기능부여'를 하십니다.


창세기 4:15, 새번역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본문의 '그렇지 않다'는 '그러므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KJV성경은 "therefore"로, ESV는 "not so!"로 번역한 것은 번역에 사용한 판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신은 살인을 모방하는 것을 '법'으로 근절합니다. 그러나 이 '법'은 미봉책입니다. 왜곡된 모방욕구를 외재적인 법을 통해 막을 수는 있어도, 인간 안에서 타오르는 왜곡된 모방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즉 인간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당신이 가인처럼 누군가를 살해하지는 않더라도, 당신은 누군가를 두려워할지도 모릅니다. 어둔 밤거리를 걸어갈 때, 왜곡된 모방욕망을 가진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거나 해하지 않을까. 그리고 당신 마저도 가인이 두려워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입니다. 모든 인간이 왜곡된 모방욕망에 갇혀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돌아가는 것은 왜곡된 모방욕망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는 왜재적인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왜곡된 모방욕망'과 '법'의 쌍은 최초 도시문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창세기 4:16,17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 때에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다.


  라틴어로 성을 우릅스(urbs)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영어의 urban이 되고요. "도시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성'은 '도시'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 등장하는 가인이 세운 도시는 인류 최초의 도시입니다. 인류 최초의 도시는 살인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의 모방을 막기위한 법이 그 도시의 규율이 됩니다.


  왜곡된 모방욕망과 법의 쌍이 사회를 구성하고, 이것은 모든 도시 공통입니다. 문제는 도시가 살해로 비롯된 자신의 태생을 감추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2. 신께 바치는 행위가 된 살해


  르네 지라르의 이론은 단순합니다. 1) 왜곡된 모방욕망이 가열되었을 때, 2) 반드시 누군가는 죽습니다. 3) 이것을 감추는 것이 희생제의이고 4) 희생제의를 포장하는 것이 '신화'라는 것입니다.


  로마의 건국신화를 생각해봅시다. 로물루스, 레물루스 형제가 있습니다. 로마를 건국한 것은 레물루스입니다. 그런데 나라의 이름은 로물루스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그 이유는 왜곡된 모방욕망에 의한 경쟁에 의해서 살해당한 로물루스를 신격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분명 부당한 살인임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그 부당한 살인을 통해서 세워졌다는 자신의 치부를 희생제의를 통해 감춥니다. 그리고 신화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경배를 받는 신들은 실상 왜곡된 모방경쟁에 의해 희생된 아벨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도시는 왜곡된 모방욕망을 방치하고, 그 모방욕망의 지수를 주기적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희생자들을 신으로 격상시키는 세레모니를 반복합니다. 이것이 희생제의의 속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끔찍한 사실은 신의 민족이라는 유대인에게조차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A.D.1세기 유대 사회는 로마와의 모방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로마와 그것을 폭력으로 극복하려는 피지배민족은 바로 그 폭력을 모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쟁관계 속에서 결론은 어느 한 쪽의 소멸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유대 사회는 무고한 피해자들을 계속 낳고 있었습니다. 장애인, 과부, 고아, 병자, 귀신 들린 사람들은 성전을 통해 회복되기는 커녕, 전쟁을 준비하는 성전 공동체에서 배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희생제의는 줄곧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신은 희생을 원한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공통의 사실이었고, 이 희생제의의 축제를 통해 왜곡된 모방욕망의 스트레스를 풀고, 그 축제 이후에는 다시금 이전부터 해오던 무고한 피해자를 낳는 일을 일상처럼 반복할 수 있었건 것이지요.



3. 도시의 정체를 폭로해왔던 계보


  이렇듯 도시는 살인 위에 세워졌고(그래서 르네 지르라는 '초석적 살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살인을 막는 것이 도시의 법입니다. 그런데 도시가 살인을 막기는 커녕, 자신의 출신을 감추고 살인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도시 문명 비판의 원류가 바로 성경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아벨을 신격화하고 가인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아벨이 무고한 피해자이며, 가인은 살인자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또 요셉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요셉 이야기는 요셉을 신으로 격상시키지 않습니다. 요셉을 죽이자는 형들이 요셉의 희생제의를 매년 벌이면서 자신들을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요셉은 무고한 피해자였고, 형들은 철저하게 유죄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도시가 살인 위에 서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고대 문서는 성경이 유일합니다. 성경과 정반대의 주제의식을 가진 장르가 신화이고요. 그래서 성경은 문체와 사용된 용어가 신화와 유사할지언정, 그 주제는 '반신화적(Anti-myth)'입니다. 그리고 이 반신화적 사실에 대한 폭로는 신약으로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11:50

'코스모스 세워짐으로부터'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마태복음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아르케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복음서는 살인을 코스모스가 세워지던 때로 소급합니다. 즉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살인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살해당함의 시작이 바로 아벨입니다. 요한복음 본문도 살해를 '아르케'와 결부시킵니다. 개역성경에는 '처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르네 지라르는 이 본문에서 '아르케'는 완전한 신의 업적이 아니라 폭력과 살해와 연관된 첫번째 문화 창조에 관한 것이라 말합니다.[각주:1]


  즉 성경과 예언자들의 임무는, 부당한 살인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했다가 살해당하는 예언자들은, 스스로 도시가 부당한 살인을 계속 자행해왔다는 증인이 된 것입니다. 즉 구약부터 예언자들의 계보는 부당한 도시를 폭로하는 계보였고, 그 계보를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잇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치를 정당화는 신화들로 둘러싸인 우리에게, 이 계보는 다음 바톤을 들고 뛸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4. 눈이 가려진 현대인과 그 피로 눈 뜬 사람들


  그러나 현대인은 모든 도시의 근간에 살인과 희생제의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최초의 인류는 합리적이었고 합리적 인류가 제도를 창안했다고 생각합니다. 르네 지라르는 "사실이 정말 이런 식이었다면 제도의 발생에 종교적인 것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 말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구 전역에 걸쳐 있는 모든 제도의 햇김에 들어있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종교적인 것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각주:2]


  볼테르는 합리적 인간이 만든 유용한 제도에 종교가 기생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종교는 이 땅에서 없어져야 할 것이 됩니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종교는, 사회의 핵심을 관통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합리적 소비자를 전제했던 자본주의의 경제 이상이 행동경제학에 의해 논박되듯, 합리적 인류가 제도를 창안했다는 사실은 초석적 살해와 희생제의를 통한 국가 운영의 논거에 의해 논박됩니다. 인류는 합리적이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왜곡된 모방욕망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제도는 희생제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치 고대의 성인식을 오늘날 교육 제도가 대체하듯이 말입니다(그리고 성인식이나 교육제도는 모두 누군가를 낙오시켜야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도시 위에서도 부당한 살해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당한 살해에 대해서 처음부터 말해오던 책과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과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가장 결정적인 사람에 의한 폭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24, 새번역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와 그가 뿌리신 피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해 줍니다.


  아벨의 살해가 말해주는 것을, 예수의 살해가 더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대체 무엇을 말입니까?
  예수의 사건은 도시의 집단적 살해를 폭로합니다. 만장일치로 예수를 죽이자고 했던 이들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과, 그 만장일치의 목소리에 우리의 목소리도 묻어있다는 비참한 진실을 말입니다. 새로운 시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한 판단에서만 시작할 수 있다면, 메시아 예수의 살해현장은 그야말로 도시인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는 그의 개념 속에서, 자연상태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국가에 자신의 주권을 넘겼으나, 다시금 국가에 의해서 안전을 위협받는 사람들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연구는 로마시대에 살해해도 죄를 묻지 않으면서도, 신께 바쳐질 수도 없는, '이중 배제'된 사람들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들을 부르는 이름이 호모 사케르, 아이러니하게도 그 의미는 '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아감벤은 국가 제도를 이 호모 사케르의 이중배제에서 그 근원을 찾습니다. 종교와 세속의 경계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구분하기 모호한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서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무고한 사람들을 계속 낳고 있는 가인의 도시라는 사실과, 누군가는 거기에서 폭로와 새로운 질서를 가져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이 일을 먼저 해왔던 사람들의 책이 놓여있습니다.

  1.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르네 지라르, 문학과 지성사, p.115 [본문으로]
  2. Ibid, p.1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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