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고대의 예언을 보는 세 가지 안경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 있죠. 고고학자가 사막 한가운데서 아무도 몰랐던 고대 유적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유적의 가장 깊은 곳에서, 먼지로 뒤덮인 오래된 두루마리 하나를 찾아냅니다. 거기에는 잊혀진 고대 언어로, 앞으로 닥칠 끔찍한 재앙과 전 세계적인 전쟁, 그리고 그 모든 폐허 속에서 살아남을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예언이 적혀 있었습니다. 드디어 고대의 예언이 현실의 문제로 소환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고대의 글과 현실 사이에는 해석이라는 관문이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어떤 고대 예언을 보며 "곧 3차 세계대전이 터진다!"고 말하거나, 특정 정치인을 예언 속 인물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대의 예언 속에서 더 할 나위 없는 자유와 평화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이 고대의 예언이 더 이상 현실과는 무관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석의 혼란 속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 고대 예언의 일부를 보여드릴게요. 스가랴라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사람이 하나님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스가랴 14장 2절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그러나 이 예언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로 갈라졌습니다.

 

첫 번째 안경 : 역사책처럼 읽기

  예언을 일종의 '오래된 역사 기록'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 같은 예언자에게 메시지를 주셨다면, 그건 2,500년 뒤의 우리보다는 당시에 그 예언을 직접 듣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러한 접근은 타당하지만, 역사를 말하던 이들은 예언이 더 이상 우리와 상관 없는 것이라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예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그 당시 상황에 의해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저런 글을 남긴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들에게 저 구절은 유대인들을 결집시키기 위한 근거 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안경: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읽기

  또 어떤 이들은 예언이 오늘날 교회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 스가랴 구절의 '예루살렘'은 교회이며, 교회를 공격하는 이방 나라들은 교회를 타락시키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편리함 때문에, 그 대상을 깊이 사유하지 않으려는 안일함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잘 모르는 대신 예언에 나오는 전쟁의 내용을 모두 죄의 문제로 이해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욕심, 미움, 거짓말 같은 죄일 수도 있고, 하나님보다 돈이나 권력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만드는 잘못된 사회 시스템이나 문화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예언을 보든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인 결론을 끌어냈습니다. 어쩌면 올바른 결론을 낸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해석을 정당화했는지도 모릅니다.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닙니다.

 

세 번째 안경: 미래 뉴스로 읽기

  또 어떤 이들은 예언의 내용을 미래에 대한 감춰진 암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암호를 푸는 사람은 미래의 파국을 예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 뉴스가 나오면 그 내용을 예언의 내용과 일치시키려고 했습니다. '아하! 성경이 말한 그 '적'이 바로 저 나라들이구나!' 라고 말이예요. 그들은 오늘날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그곳을 둘러싼 국제 분쟁이라는 현실의 조각들을 가져와, 스가랴 예언의 빈칸에 그대로 끼워 맞추며 이 상황을 예언의 성취와 동일시했습니다.

 

질문을 던져보자

  자, 이렇게 '마지막 전쟁'에 대한 예언을 역사책으로, 보이지 않는 싸움으로, 또 미래의 뉴스로 읽는 세 가지 입장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똑같은 성경 구절인데도 전혀 다른 사건이 보인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여러분에게 저 세 가지 관점을 통합하면서도 조금은 달리 보는 새로운 안경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새로운 안경을 통해 예언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다음의 질문들이 필요합니다.

 

첫째, 예언이 말하는 '예루살렘'은 오늘날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바로 그 도시일까요,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을까요?

둘째, 예언이 말하는 '전쟁'은 미래에 있을 제3차 세계대전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어떤 종류의 싸움을 말하는 걸까요?

셋째, 그렇다면 이 예언이 우리에게 정말로 말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넷째, 가장 근본적으로, 똑같은 성경을 읽는데 왜 이렇게 해석에 큰 혼란이 생긴 걸까요?

 

  자, 그럼 이제부터 탐정이 되어 안경을 바꿔 쓰는 대신, 커다란 퍼즐 조각을 맞추는 화가가 되어봅시다. 스가랴 12장부터 14장까지는 사실 따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완성해가는 과정이거든요. 우리는 이 그림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충격적인 반전을 거쳐, 마침내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는지 천천히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먼저 첫 번째 조각, 12장부터 함께 살펴보시죠.

 

본론, 스가랴의 예언(12~14장)

 

1. 심판의 돌, 그리고 반전의 약속 (12:1-3)

 

  스가랴 12장이 그리는 거대한 그림은, 온 땅에 거대한 먼지바람이 일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세상의 모든 군대가 단 하나의 목표, '예루살렘'을 향해 끝없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도시를 둘러싼 언덕들이 적군의 깃발로 새까맣게 뒤덮이고, 성벽 아래에서는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함성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누구라도 "예루살렘은 이제 끝장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풍경이죠.

 

  그런데 예언은 해석의 굴곡을 보여줍니다. 공격자들이 마시면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게 되는 '취하게 하는 잔'이 등장하고, 섣불리 들어 올리려다가는 허리를 크게 다치고 마는 '아주 무거운 돌'이 등장합니다. 공격하려는 이들이 오히려 속게 되고 걸려 넘어지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속고, 어떻게 걸려 넘어질지는 말하지 않은채 말입니다. 

 

  그리고 2절 끝에도 의미심장한 문장이 하나 붙어 있어요. "예루살렘의 포위는 유다에게도 미칠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아, 이제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다 온 땅이 다 망했구나!' 하는 절망감이 들죠. 하지만 이 문장은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절망이 아니라, 오래된 기억과 약속을 깨우는 '암호'와 같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장면이 이사야 8장에도 있거든요.

 

*잠깐! 이사야 8장은 어떤 이야기였을까?

  스가랴보다 약 2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남유다는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시리아)이 동맹을 맺고 유다를 공격해왔기 때문이죠. 겁에 질린 유다의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려 하니, 내가 그 앗수르 군대를 거대한 홍수처럼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 예언대로, 앗수르의 군대는 무서운 기세로 몰려와 북이스라엘과 아람을 멸망시키고, 유다 땅까지 홍수처럼 뒤덮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 다음과 같은 예언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8:8

그 흐르는 물이 유다에까지 흘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펼치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홍수가 목까지 차올라 죽기 직전이지만,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자의 날개가 등장하고, 유다의 땅은 보호를 받습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유다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유다를 지키신다는 예언이 스가랴보다 먼저 이사야에게 있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스가랴와 이사야의 예언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볼까요?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습니다.

  • 공통점 ① : 절망적인 포위 상황
  • 공통점 ② : 기적적인 보호와 반전
  • 공통점 ③ : '돌'이라는 핵심 이미지


  이러한 놀라운 유사성 때문에, 이사야서를 잘 알던 유대인들에게 스가랴의 예언은 전혀 다른 의미로 들렸을 것입니다. "포위가 유다에게 미친다"는 예언은, '멸망이 확장된다'는 공포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제 유다를 보호하는 날개가 등장할 때가 되었다"는 반전의 암시로 들리지 않았을까요? 이어지는 내용을 살펴봅시다.

 

2. 불쏘시개가 된 지도자들 (12:4-6)

 

"그 날에 내가 모든 이방 나라들의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의 우두머리들을 나무 가운데에 있는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있는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민족들을 불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여전히 본 곳에 있으리라."

 

  앞선 장면에서 스가랴는 '무거운 돌'이라는 알쏭달쏭한 이미지를 통해 공격자들이 스스로 무너질 것을 암시했습니다. 이제 그림은 더 기묘하고 폭력적인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여 적군의 말들을 눈멀게 하고, 말에 탄 자들을 미치게 만들어 전장을 대혼란에 빠뜨립니다.

 

  그리고 그 혼란의 한가운데, '유다의 우두머리들'이 마치 무대의 주인공처럼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하나님을 힘입어 강하게 되었다'며 옳은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은 그들을 "횃불"이라 묘사합니다.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된 그들은 주변의 적들을 마치 마른 곡식단처럼 집어삼키며 불태워 버립니다. 

 

  표면적으로는 통쾌한 복수극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 역시 단순하게 읽을 수 없는 '해석의 굴곡'을 품고 있습니다. 횃불이 무언가를 태우려면, 자기 자신도 타올라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완전한 승리일까요, 아니면 자기 파괴를 동반한 섬뜩하고 슬픈 심판일까요? 횃불이 된 그들은 주변의 모든 민족을 닥치는대로 불사릅니다. 

 

스가랴 12:6 

...그러나 예루살렘은 다치지 않고 제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불쏘시게가 되어 쳐들어오는 이방인들을 태웠지만,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유다'에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이사야 8장에서 유다의 구원을 말했듯, 스가랴도 유다에 집중합니다.

 

스가랴 12:7 

나 주가 유다의 거처를 먼저 구원해 주겠다. 다윗 집안의 영광과 예루살렘에 사는 주민의 영광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유다의 영광보다 더 크지는 않을 것이다.

 

  유다의 지도자들과 이방 군대들이 함께 불타는 가운데, 여전히 남아있는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은 무엇일까요?

 

3. 슬퍼하는 자들의 승리(12:8-14)

 

  앞선 질문, "남아있는 예루살렘은 무엇일까?"에 대해 스가랴는 곧바로 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루살렘 주민들이 '달라질 것'이라 말합니다.

 

 "그 날에 나 주가 예루살렘 주민을 방어하여 주겠다. 그들 가운데 가장 약한 사람도 그 날에는 다윗과 같이 강할 것이며, 다윗 집안은 하나님과 같이, 그들 앞에 선 주의 천사와 같이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모든 민족을 멸망시키기로 하겠다." (8-9절)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방패가 되어주셔서, 가장 연약한 자조차 전설적인 영웅 다윗처럼 강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강력한 국방력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방어해주시겠다는 것은 스가랴의 예언 속에 이미 언급된 바 있습니다. 불성벽이 되어주시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보호와 심판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그 '남아있는 예루살렘'의 정체가 무엇인지 드러나는 결정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보호 받는 이들은 이상하게도 모두가 울고 있습니다. 무려 다섯 절이나 할애해서 스가랴의 예언은 눈물 흘리는 이들을 그려냅니다(10~14절).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그 예루살렘 사람들은,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대신 땅을 치며 통곡하는 이들이고, 이들이 눈물의 이유에 관해 이들이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들은 "그들이 찔러죽인 그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한다"는 더욱 더 알 수 없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대체 누구일까요? 사람들은 그를 우리가 찔렀다며 통곡하고 있고,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 보호 바깥에서는 유다의 우두머리들과 쳐들어온 이방인들이 함께 불에 살라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스가랴 12장이 마무리 되고, 13장으로 넘어갑니다.

 

4. 샘과 칼, 그리고 제련된 사람들 (13장)

 

  12장의 마지막은 온 예루살렘이 "자기들이 찌른 그"로 인해 통곡하는, 거대하고 슬픈 정지 화면으로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눈물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13장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시작합니다.

 

"그 날이 오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의 죄와 허물을 씻어 줄 샘이 터질 것이다..." (1절)

 

  12장의 슬픔이 '원인'이라면, 13장의 샘은 '결과'이자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백성들의 통곡이 하늘에 닿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와 허물을 근본적으로 씻어낼 샘을 '터뜨려' 주십니다. 눈물이 샘이 된 것이 아니라, 눈물을 보신 하나님께서 은혜의 샘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샘은 죄의 뿌리인 우상숭배와 거짓 예언의 영을 이 땅에서 완전히 도려내는 정화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거짓 예언이 사라지는 시대라면, 참된 예언은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스가랴가 그리는 풍경은 정반대입니다. 예언자들은 자신의 소명을 부정하고, 몸에 난 상처까지 숨겨야 하는 수치와 핍박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왜 이런 역설이 벌어질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예언자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가, 사람들이 듣기에 너무나 불편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불쏘시개가 되어 심판받는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목자가 칼에 맞는 비극을 통해 온다", "우리가 바로 그 목자를 찌른 장본인이다" 와 같은 진실을 외쳐야 했기 때문이죠. 이런 메시지는 당연히 기존의 종교, 정치 기득권층의 극심한 핍박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예언의 중심에 있는,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이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 드러납니다.

 

"깨어라, 칼아! 내 목자를 치고, 내 동료인 그 남자를 쳐라!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너는 그 목자를 쳐라. 그러면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7절)

 

  하나님의 칼이 하나님의 목자를 치는 이 자기모순적인 명령 속에서, 우리는 12장의 '찔렸던 그'와 13장의 '상처 입은 예언자들'의 모든 고통의 근원을 발견합니다.

 

 목자가 맞으니 양 떼는 흩어지고, 그 땅의 삼분의 이는 멸망하는 끔찍한 결과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바로 이 지점에서, 12장에서 보여주었던 '불의 심판'이 가진 진짜 의미를 마침내 드러냅니다.

 

 12장에서 유다의 지도자들은 주변 민족과 함께 불타는 '불쏘시개'처럼 보였습니다. 그 불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재앙처럼 보였죠. 하지만 13장은 그 불이 단순한 소각로가 아니라, 귀금속을 연단하는 '제련소'였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삼분의 일은, 내가 불 속에 집어넣어, 은을 연단하듯이 연단하고, 금을 시험하듯이 시험하겠다..." (9절)

 

  남은 삼분의 일이 바로 그 불 속에 던져집니다. 그들은 재앙 속에서 살아남은 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불 속에서 모든 불순물이 태워지고 연단된 **'정련된 은과 금'**입니다. 이 혹독한 제련의 과정을 통과한 이들, 즉 칼에 맞은 목자로 인해 흩어졌다가 남겨진 바로 그 사람들만이 마침내 하나님의 진짜 백성이 됩니다.

 

  이제 '남아있는 예루살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것은 땅이나 건물이 아니라, 바로 이 불의 시험을 통과한 '제련된 사람들' 그 자체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목자를 따르는 '이동하는 예루살렘'이 되어, 새로운 언약 관계("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제련된 예루살렘'이 탄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떠나온 옛 무대, 즉 땅의 예루살렘과 감람산에는 어떤 마지막 그림이 그려지게 될까요? 14장은 마침내 그 마지막 장면에 대한 예언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5. 피난민들이 구성하는 새로운 성전 (14장)

 

 13장에서 불의 제련을 통과한 '이동하는 예루살렘'이 탄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떠나온 옛 무대, 즉 땅의 예루살렘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릴까요? 14장은 그 마지막 장면에 대한 충격적인 그림으로 시작합니다.

 

"보아라, 주의 날이 온다! …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집을 약탈당하며, 부녀들이 욕을 당할 것이다. 성읍의 절반이 사로잡혀 갈 것이다…" (1-2절 요약)

 

  하나님께서 직접 모든 이방 나라들을 모아, 바로 그 예루살렘을 심판하십니다. 성읍은 무너지고, 약탈당하며, 그 백성은 끔찍한 고통을 겪습니다. 옛 언약의 중심지였던 무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비극적인 마지막 막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림은 또 한 번의 기묘한 반전을 보여줍니다.

 

  "그 때에 주께서 나아가셔서, 친히 그 이방 나라들과 싸우실 것이다… 그 날이 오면, 그는 올리브 산 위에 서실 것이고… 올리브 산은 동서로 갈라져서, 매우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다… 너희는 나의 산 골짜기로 도망할 것이다…" (3-5절 요약)

 

 하나님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셨던 바로 그 '이방 나라들'을 이제는 친히 대적하여 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발이 예루살렘 동편 올리브 산(감람산)에 닿자, 산이 파괴되며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라지며 그 백성을 위한 '피난의 골짜기'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13장에서 탄생한 '이동하는 예루살렘', 즉 칼에 맞은 목자를 따르는 남은 자들이 옛 성읍의 멸망으로부터 탈출할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땅의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 진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그곳을 빠져나옵니다. 옛 무대가 완전히 무너졌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가랴의 예언은 그들에게 벌어진 일이 창조 질서를 벗어나는 새로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날에는 빛이 없고,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이다…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생수가 예루살렘에서부터 흘러 나와서… 주께서 온 땅의 왕이 되실 것이다." (6-9절 요약)

 

  빛과 어둠의 경계가 무너지고, 저녁이 되었을 때 오히려 빛이 비치는 태초의 시간. 그 혼돈 속에서 생수가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이 생수는 파괴된 옛 예루살렘 성전에서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생명의 물은 바로 피난의 골짜기에 있는 '새로운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부터 흘러나와 온 땅으로 퍼져나갑니다.

 

  마지막 그림은 이 새로운 백성 공동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를 보여주며 마무리됩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가운데서 살아남은 사람이 모두 해마다 올라와서… 초막절을 지킬 것이다… 그 날에는 모든 말방울에까지 '주께 성결'이라고 새길 것이다… 주의 성전 안에는 다시는 장사꾼이 없을 것이다." (16, 20-21절 요약)

 

  이 충격적인 반전 속에서 예루살렘을 공격했던 바로 그 '이방인들' 중 남은 자들이 이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아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초막절을 누립니다. 그 옛날 이사야가 말했던 임마누엘의 예언대로 말입니다. 또한, 대제사장의 관에 쓰이는 '주께 성결'이라는 글귀가 가장 평범한 '말방울'에 새겨집니다. 더 이상 성전의 거룩한 그릇과 집안의 부엌 솥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이는 제사장 직분과 성전이 경계를 넘어 평범한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이동하는 예루살렘 안에서 말입니다. 

 

 

결론, 초점이 맞지 않았던 안경들과 네 번째 안경

 

  그럼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스가랴 예언들을 해석하는 일반적인 안경들을 다시 써봅시다. 1부에서 우리가 함께 완성한 '하나의 거대한 그림'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이 안경들의 초점은 잘 맞나요?

 

- 스가랴는 오늘날 우리와 무관한 과거의 역사인가요?

  스가랴의 예언은 분명 과거의 역사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그 점을 인정한 것은 '역사책처럼 읽기'의 중요한 공헌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와 무관한 박제된 과거'로 만드는 순간, 이 안경의 초점은 완전히 흐려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1부에서 살펴본 그림은 그저 '과거의 도시가 함락되었다'가 아니기 때문이죠. 스가랴 예언은 예루살렘과 이방인들의 전쟁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도 살아남은 피난민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스가랴는 과거의 역사가 아닌 오늘날 교회에 관해 말하고 있나요? 

  스가랴의 예언은 분명 오늘날 교회의 이야기와 깊이 연결됩니다.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읽는 안경이 교회에 주목했다는 점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스가랴의 예언은 곧장 현대 교회와 연결되지 않고, 그 피난민들이 구성한 초기 교회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스가랴의 예언은 교회의 족보와도 같습니다. 최초 교회가 어떤 과정에 의해 생겼고, 그 교회가 어떠한 공동체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스가랴 예언의 해석이 과거의 역사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순간 이 예언은 구체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스가랴의 싸움은 막연한 '죄와의 싸움'이 아니라 실제 전쟁이었고 그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칼에 맞은 목자'(13:7)와 '흩어지는 양 떼' 그리고 '무너지는 도시'(14:2)도 현대의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의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스가랴는 미래의 전쟁을 말하고 있나요?

  이 안경은 아마도 가장 초점이 맞지 않는 안경일 것입니다. 이 안경에는 역사도 없고 교회도 없습니다. 유대 역사의 결말을 말하는 예언자의 입장 또한 없습니다. 그저 현대인의 관심사를 갖고 성경을 윤색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스가랴 예언의 성취를 말하는 사도들의 증언을 살펴봅시다.

 

스가랴 12:10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사도 요한은 이 스가랴 예언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요한복음 19: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사도 요한은 로마 군인의 창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는 바로 그 순간,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찔린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은 여기서 끝납니다. 성경 해석의 기준은 오늘날 우리가 아니라, 사도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도들의 해석은 예수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스가랴 13:7 

"칼아 깨어서 내 목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리니..."

 

마태복음 26:31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즉 예수의 죽음과 함께 흩어지는 이들이 양의 떼이며, 그들이 올리브 산골짜기에서 보호받은 이동하는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먼지 쌓인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으로 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마주한 예언의 구절들은 암호처럼 느껴졌고, '역사책', '보이지 않는 전쟁', '미래 뉴스'라는 여러 해석의 안경들은 오히려 세상을 더 혼란스럽게 보이게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찔린 목자'라는 열쇠를 통해, 흩어진 암호들이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그림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공포스러운 예고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낡은 세상의 무대가 무너지고, 한 사람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새로운 백성이 탄생하며, 그들이 곧 새로운 성전이 되어 온 세상으로 나아가는 위대한 창조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발견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고, 미래를 향한 우리의 시선을 교정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뉴스를 보며 아마겟돈의 징조를 찾거나,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전쟁은 이미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끝났고, 우리는 이미 승리한 왕의 백성으로 오늘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가랴의 예언은 세상의 끝에 대한 비밀 지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시작된 새로운 세상의 '출생 증명서'입니다. 그리고 그 증명서는, 분열하는 양 쪽에 가담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이유 때문에 피난길에 올랐던, 초기 교회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가랴 예언에서 찾을 수 있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임마누엘의 예언대로, 이 올리브산 골짜기로 피신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 피난민들은 자신들을 왕이라 이해하며, 자신들을 통해 마침내 온 세계를 다스리실 한 분을 찬양했습니다. 스가랴의 예언대로 말입니다.

 

  "그 날에는 주께서 온 땅의 유일한 왕이 되실 것이며, 주의 이름도 하나만 있을 것이다." (스가랴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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