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주기도문의 대단원의 마지막 구절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눌림에서부터 구하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1. 오히려

  이 두 구절의 차이를 잘 보세요. '다만'이라고 된 것은 '오히려'하는 뜻이고, '악'이라고 된 것은 '눌림'이라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오히려'라는 말을 언제쓰는지 생각해보세요. '오히려'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을 할 때 쓰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예) 자기가 잘못하고서는 오히려 (큰소리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오히려'라는 말 앞 뒤로는 반대되는 게 올거에요. "우리를 눌림에서부터 구하소서"를 보기전에, 우리는 그 앞에 있는 내용을 확인해봐야 합니다. 반대되는 게 올거에요.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마시고"

  우리가 지난 주에 배웠듯이, '시험'은 아기를 낳는 중요한 기간을 말해요. 이때 숨을 들이 마시고 힘을 내야 생명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에 빠진다는 말은, 숨 쉬지도 않고 힘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낳지 못하고 그저 현시대에 눌러붙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반대라면 무엇이겠어요? 아기를 낳는 것이지요! 숨 쉬고 힘 내서 새생명을 낳는 것이지요!

2. 눌림

  그런데 왜 '눌림'이라고 써놓았는지 궁금하실거에요. '악'이라고 번역된 주기도문의 단어는 본래 '억누름'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듬'이라는 의미가 생겼어요. 그리고 어렵고 힘든 게 나쁜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중에 '악'이라는 뜻이 생셨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에 나오는 "악"이 있다는 말은, 우리를 억누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가 눌리는 것일까요? 일단 우리의 마음이 눌립니다. 숨 쉬고 힘내야 하는데, 자꾸 누르는 놈은 우리가 그러지 못하도록 마음을 누릅니다. 마음만 누르는 거 아닙니다. 몸도 누릅니다. 그리고 너와 나 '사이'도 누릅니다. 그렇게 누르고 눌러서, 우리를 현시대에 눌러붙도록 하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무언가 마음이, 몸이, 관계에 힘든 일을 겪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누르는 이를 마주한 것입니다.

  이 누르는 이를 성경은 이렇게 부릅니다.


에베소서 2:1,2(사역)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범죄들과 비뚤림들로 죽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이 옛창조(코스모스)의 시대를 따라,
즉 공중의 엑수시아의 통지자를 따라, 걸었던 것입니다.
그는 곧 완고함의 아들들 안에서 지금 힘내는 숨결입니다.


  사탄, 그가 우리를 누르고, 그릇 걷게 하고, 죽입니다.

 

  그리고 '죄'는 사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따라간다고 했는데, 사실은 갇혀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갇힌줄도 모르고 있으니 따라간다고 해봤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줄도 모르고, 기꺼이 사탄을 따라갑니다. 자신을 가둔줄도 모르고 사탄을 기꺼이 따라갑니다. '죄'는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사탄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마음이든, 몸이든, 관계이든, 세상이든 무언가 '눌림'을 겪었다면, 여러분은 그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눌렸구나! 누군가 눌렀구나! 아. 내가 사탄 아래 있었구나!


3. 구하소서


  그런데 "구하소서"라는 말을 생각해보세요. 이 "구하다"라는 말은 출애굽을 떠올리는 말입니다. 모세의 출애굽이 아니라 예수의 출애굽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어린양 때문에, 이방제국이 아니라 사탄이 누르는 현시대로부터의 출애굽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이 출애굽은 다 끝난 출애굽입니까? 아직 끝날게 남은 출애굽입니까? 만일 이 출애굽이 다 끝나버린 것이라면, "구하셨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하소서"입니다. 메시아 예수의 출애굽은 아직 대결말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지금 우리를 누르는 사탄과 아직 못헤어졌습니다. 사탄은 깨진 머리를 부여잡고 에클레시아를 추격합니다. 때로는 우리를 누르기도 합니다. 에클레시아는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겹쳐있는 '광야'에 나왔지만, 광야에는 불뱀들이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이후 출애굽은 벌어졌고, 그 출애굽 이후 무려 2000년 동안 광야시대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살고 있는지 아는 것은, 우리가 어찌 행동할지를 결정할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광야시대는 곧 시험기간이기도 합니다. 머리 깨진 사탄은 우리를 추격하고, 우리는 숨 쉬고 힘내어 사탄을 이겨야 합니다, 마치 골리앗과 맞서는 다윗 모양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에클레시아는 아직 기도할 게 남았습니다. "구하소서!" 그 '구함'은 우리가 사탄을 뒤로 하고 어디로 도망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출애굽 그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찌 구하셨습니까? 파라오를 작살내고 구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예수님이라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 손에 들려진 짱돌입니다. 이제 사탄을 작살내는 일을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합니다. "구하소서!", "사탄을 끝장내소서!"


  그리고 이런 기도는 오히려 눌렸을 때 터져나와야 합니다. 눌렸다고 힘 빠지고 숨 못 쉬는게 아닙니다. 눌렸을 때, 더욱 우리의 싸워야 할 대상이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지금 광야의 시험 기간임이 확실해집니다. 눌렸을 때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어둠을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를 어찌 구하십니까? 사탄을 어찌 끝장내십니까? 우리가 눌림 속에서도 생명을 낳게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눌러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태웁니다. 우리의 몸을 눌러도 우리는 우리 몸의 부활의 새생명으로 새로워질 것을 더욱 믿습니다. 너와 나 사이를 눌러도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 이웃사이에서 더 사랑을 넘치게 합니다. 이렇게 피어난 생명들이 자라고 자라서 결국 눌림을 끝장내고, 이 땅을 다시 사탄으로부터 탈환할 것입니다.

4. 구할 게 다 구해지면, 새 하늘과 새 땅

  우리는 눌림이 끝장났을 때를 미리 생각해봅시다. 이러한 생각은 숨님이 주시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따라, 눌림 속에서도 눌림이 끝장난 것처럼 실천해봅시다. 이렇게 살 수 있다면 그 실천력도 숨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숨님의 생각과 숨님의 실천력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낳도록 부름받은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숨 막히는 현시대의 더위 속에서도 숨 쉬고, 힘 빠지게 하는 현시대의 압박 속에서도 힘 내야 합니다. 기도부터 시작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과 사이와 세계가 생명으로 가득하도록. 기억나나요? 우리의 다스림이 바로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낳게 하신 새 생명으로 이 땅에 흘러 넘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최종적인 완성을 우리가 속한 전통은 이렇게 부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사탄은 온데간데 없는, 그래서 땅에서도 마침내 이뤄진. 부활한 우리가 서로를 마주보며, 우리의 믿음과 생각이 결국 옳았다는 사실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될 새로운 창조세계입니다.


요한계시록 21:3,4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
그리고 각각의 눈물을 그들의 두 눈으로부터 닦으실 것이고,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애곡과 울음과 고통도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것들이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 창조세계를 바라보시며 하나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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