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얼마 전 저 질문을 받고서 여러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생각들을 정리합니다.


1. 우주론이 결여되어 있다.


  이 블로그를 통해 계속 말해왔던 '세계관'은 '내가 속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점'으로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에 속한 세계와 자신은 이러한 '시대정신'과 '공간의식'을 내러티브 형식으로 전수받고 전달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예수에게는 집중하지만, 예수가 어떠한 시대정신과 공간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듯 합니다.(가르치고 있다면 제가 몰라서 하는 소리이니, 알려주시고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과 공간의식을 가지고 예수를 거기에 대입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제대로 된 교육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그이에게 접근하는 적절한 방식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간 이 블로그를 통해서 '역사와 내러티브를 강조한 기독교 세계관 교육'을 줄곧 시도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즘 또 다른 미싱링크를 염두하고 있습니다. 역사와 내러티브는 예수의 시대정신을 설명하는데는 적절하나, 그의 공간의식을 설명하는데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교육은 '천문학-물리학-윤리학'의 골자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우리말로 하자면, '천지인'입니다), 저는 이제 '우주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를 느낍니다. 우주를 알고, 그 우주 속 지구를 알며, 그 토대 위에서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주는 과학에게 내주고, 지구에서의 일은 사회학자들에게 내어준채, 인간내면으로 내몰린 기독교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저 위의 질문, '하나님은 왜 우주를 창조하셨는가?'의 물음은 다분히 우주론적 질문입니다. 그러나 저 질문에 대해서 설명가능한 내용들을 들어본 기독교인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기독교인에게만 아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점철되어 있는 무신론자들에게도 아쉬운 일입니다. 무신론자들에게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문장이 어불성설로 들리는 것은, 저 하나님이 여러 종교 중 한 종교의 수장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며, 그 종교의 수장을 위해서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말은, 복잡 다양한 세상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무리한 주장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인식 속에서 제 가온은 무거우면서도, 치밀한 작업을 통해 기독교적 우주론을 소개하는 작업을 이 블로그를 통해서 해야겠다는 뜻 먹습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제 속에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이 블로그의 이름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복잡 다단한 논의들을 다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것이 삶의 짐으로 여겨져 계속 회피하던 것이었습니다. 


2. 계시적 우주론


  그리고 이것을 '기독교적 우주론'이라고 할까, '유신론적 우주론'이라할까 고민하다가, 모두가 대척점이 있는 용어들 같아서, 그저 '계시적 우주론'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계시'를 말하면 또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계시'라는 말은 제 3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有)라는 말은 무(無)를 불러오지만, 일단 '계시'라는 말을 꺼내놓으면, 그것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는 있어도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입증되지도 않은 결론을 당당하게 말하는 이들도, 차마 <성경>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무효화하려면, 그 안의 내용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아니면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이 남은 유일한 선택지일 것입니다.)


  우주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시적 우주론. 알아보거나 무관심하거나. 만일 하나님을 입증할 책임이 도킨스 말대로 믿는 이들에게 있다면, 저는 저와 관계로 연결된 무신론자 이웃들이 계시적 우주론을 알 수 있도록 자료들을 준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앨빈 플란팅가의 말대로 이미 믿고 알고 있는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입증 책임이 있다해도, 그들을 위해 자료들을 준비하는 일은 유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주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이것이 우리의 현실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 작업을 그간 해왔던 역사적 맥락 위에서 성경 전체를 읽는 작업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다뤄야 할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단 빅뱅 이론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주 생성에 대한 단 하나의 특이점(singularity)을 설명하고, 더불어 다중우주 이론은 허수를 대입한 수학적 차원을 또다시 만듦으로서 우주 생성 근원에 대한 설명을 뒤로 미뤄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에 대한 기독교의 다양한 입장 또한 정리해야 합니다. 문자적 성경 해석이 아닌, 창세기를 창세기답게 읽는 방식에 대한 소개가 필요합니다. 과학적 사실과 일대일 대응이 아닌, 다른 표현방식을 가지고, 진정 창세기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비단 창세기 뿐만 아니라, 예언서들과 계시록도 우주에 대해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들도 함께 들여다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의 끝에서 우리 모두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결말을 더욱 충격적으로 마주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3. 일단은,


  일단 저는 이런 두루뭉술한 생각을 가지고서, 오늘 저 질문을 가지고 대화하러 나갑니다. 저 질문을 받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책이었고, 그 안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을 결론으로 제시했습니다. 그의 방법은 이성적 고찰을 통해 이 문제를 숙고해보고, 관련된 성경 구절들을 분류해서 그 주장들을 확립하는 다분히 철학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김동훈 선생님에게 '영광'은 '드러남'이라는 본래 뜻을 가지고 있음을 배웠고, 류영모 선생님도 영광을 '뚜렷'으로 번역한 것을 보았습니다. 계시적 우주론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인류의 역사를 다루게 될텐데, 이 모든 과정을 '뚜렷-흐릿'의 개념을 가지고 풀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지워나가려는 인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내려온 이야기를 이루시어 자신을 뚜렷이 드러내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의 방법 예수.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겹쳐 있는 오늘날, 하나님의 뚜렷을 위해 살아가는 그의 사람들. 그리고 마침내 창조 세계 전체에 드러날 하나님. 그의 뚜렷, 그의 영광. 


  두서없이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봤습니다. 이 모든 말들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보다, 사실 저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제가 문제라고 인식하는 저를 둘러싼 모든 문제들이, 저 하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같은 문제인식을 갖는다면 그 문제들은 당신도 기다리고 있겠지만, 나는 이제 무언가 설득하고나서 함께 움직이는게 아니라, 진정한 설득력은 나 스스로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 한 결코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요즘 너무 아프게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가 따져보니,

지금 이 때의 고난은 우리에게 곧 정체를 드러낼

그 영광과 비교할 가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세계의 간절히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세계가 허무함에 굴복하는 것은 제 뜻이 그러한게 아니라,

오히려 굴복하게 하시는 이의 소망 때문인데,

그 소망은, 바로 창조 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아이들 나타날 때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8: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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