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의 응답
1.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
'멸망의 가증한 것'은 다니엘 9장에 등장한다. 다니엘은 로마의 압제 속에서 힘겨운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책이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장 - 거대한 조각상을 무너뜨리는 돌에 대한 이야기
3,6장 - 하나님이 어떻게 신실한자들을 고난에서 구원하시는지에 대한 이야기
7장 - 1) 인간과 전쟁을 벌이는 짐승들에 대한 이야기와,
2) 하나님이 인자(사람의 모습을 한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하시고
3) 짐승들을 멸하시는 것에 대한 이야기.
12장 -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부활할 것
9장 - 신성모독적인 어떤 것, 불경한 어떤 물건이 성전에 놓일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참 백성을 구원하시고, 참 메시아를 보내시고, 오래된 자신의 계획을 완성시키는 일환이 될 것.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에 등장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은, 이방민족이 성전을 능욕하는 신상을 세울 정도가 되면, 곧 전쟁이 발발하게 될 것이니 도망가라는 예언자의 외침이었다.
2. 왜 예수께서 "이런 일은 전에 없을 큰 환란"이라 하셨을까?
그리고 예수께서 이스라엘에 벌어질 이 전쟁을 가리켜 "이런 일은 전에 없을 큰 환란"이라 말씀하신 것 역시 정확한 예언이었다. 이스라엘 성전은 이미 바벨론이 쳐들어왔을 때 무너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지은 제 2성전이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해 무참히 능욕당할 때도 있었다.(이 때 사람들은 안티오코스 4세가 세운 제우스 신상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지도에서 완전히 삭제된 것은 아니었다. 앗시라가 쳐들어 왔을 때도 남유다는 남아 있었고, 바벨론이 쳐들어왔을 때도 '암 하아레쯔'라 불리는 땅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남아 있었으며, 시리아가 성전을 능욕했을 때는 시리아를 무력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 A.D.70년에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성전을 능욕했을 때, 이스라엘은 마카비 혁명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항전했고, 그들은 모조리 죽었으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지워졌다.
유대인이라면,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자신들의 나라가 이렇게 사라져버릴 것이라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 있는 이스라엘은 그 때 도망쳐나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벨포어 선언 이후 1948년에 팔레스타인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전까지 그들은 땅이 없었다.) 따라서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의 1차 독자가 유대인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실로 "전에 없을 큰 환란"이 분명하다.
문제는 이것을 전혀 역사적 문맥없이 그저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려는 잘못된 성경읽기다. 당시 전쟁보다 지금의 전쟁이 훨씬 광범위하고 조직적이고 치밀하므로, 당시 유대인들이 겪었던 A.D.70년의 전쟁을 "가장 큰 환란"이라 볼 수 없다는 생각은, 전혀 역사와는 무관하다. 본문에서 예수는 누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가? 역사의 현장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을 무시하고, 책 밖으로 나와 역사와는 무관하게 오늘 우리를 대면하시는가? 그럴리 없잖은가!
3. 당시 제사에 대해서
당시 제물을 먼 거리에서 가져오기 어렵기 때문에, 성전에서는 환전 업무와 제물 판매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로 치면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으로서 은행과 상거래도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셨던 것은 은행과 상거래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일까?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는 "내 아버지의 집을 시장으로 만들지 말아라!"(요2:16)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환전 업무와 제물 판매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성전의 본질적인 기능을 대체해 버린 것이 문제인 것이다. 성전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우주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차원인 하늘과, 인간의 차원이 땅이 만나는 곳이다. 그곳에서 용서의 선언과, 치유와, 회복이 선언된다. 그런데 그 성전이 환전업무와 은행업을 빌미로한 돈벌이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강도의 굴혈'(마 21:13; 막 13:)이라는 독특한 표현이 등장한다. 여기서 '강도'는 사람들을 때리도 돈 뺏는 노상강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유혈 투쟁을 주장하는 혁명가를 가리키는 단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적에 옆에 달려있던 두 강도는 노상강도가 아니라, 혁명가였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로마에 대항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로마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사용하는 십자가라는 사형제도를 통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유대 성전은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 중심이 뒤틀려버렸다. 정치는 제국의 지배 아래서 투쟁(바리새인) 아니면 타협(사두개인)의 양자택일에 빠져버렸고, 경제의 중심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제물을 사기 위해 가져온 돈을 가지고 유대 지도자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 성전 제사를 중단시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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