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품

from 카테고리 없음 2015. 11. 23. 17:00

하품

  하품을 합니다. 하품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산소가 부족할 때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 원인이 아직도 다 풀리지 않았을만큼 하품에 대한 복잡한 이론들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얘기되는 것은 스트레스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원치 않는 상황을 접했을 때 스트레스로 인해 하품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은 이 점이 뇌온도와 상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쥐를 가지고 실험해보니, 뇌의 온도가 0.1도 높아지니 하품을 하더랍니다. 그럼 다량의 공기를 마심으로 다시 뇌온도가 떨어지게 됩니다. 즉 하품은 올라간 뇌 온도을 떨어뜨려 스트레스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시작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운동선수 중에서도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하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품하는 사람을 보면, 전날 잠을 잘 못잤거나, 자기 실력을 과신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안그럴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정리하자면,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 온도가 올라가고 그로 인해 하품을 한다고 생각하면 맞을 거 같습니다.

  우리는 무수한 스트레스의 상황들을 마주 합니다. 스트레스는 다른 게 아닙니다.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 스트레스지요. 무신론자들은 서로 피해 안주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얼마전 텔레비젼에서 방 구석에만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제또래 남자가 부모에게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가 엄마한테 피해 안주잖아!' 그러나 서로 마주치지 않으면 장땡인게 아니지요. 그제는 지하철을 타러 수원역 지하로 내려가는데 한 젊은 처자가 한 말이 제 귓전을 울렸습니다. "어차피 안 볼 사람인데 뭐." 마지막 때에는 사랑 없는 거리가 된다더니, 서로가 스트레스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 집에 살면서도 부모가 얼굴을 볼수도 없게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는건 부모에게나 자신에게나 스트레스입니다. 그리고 마주치지 않으면, 문제도 없다는 병든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할줄 모르니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를 받으니 뇌온도가 올라갑니다. 그럴 때는 하품을 해야 합니다. 뇌온도를 떨어뜨리고 다시금 무엇이 문제인지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예배가 하품이라 생각합니다. 생각을 또렷하게 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 마십니다. 성경에서 성령이라 말할 때 그 성령은 '바람', '숨'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님을 '숨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만, 어찌되었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숨과 같다는 말입니다. 예배가 하품이라고 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성령을 크게 들이 마시고, 생각을 분명히 하고자 나왔다는 말입니다. 글자도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하고 내쉰 것을, 우리 가온에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품'입니다.

  하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랑의 범위를 좁혀왔습니다. 17세기만 하더라도 무신론자들이 지향하는 바는 인류의 공공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선의 범위가 줄어들어, 요즘의 무신론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만족하는 것이 삶의 목적과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자는 메시지가 서점가에 들끓고 혹 누군가는 '맞아,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하고선 무슨 진리를 만난 것마냥 속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싫은 사람들이나 자존감을 찾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2:25에서,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내놓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사람을 영광의 부활로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이 또렷하다는 말은 복잡한 걸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내어놓음입니다. 성령을 힘껏 들이마신 이가 할 말입니다.

  예배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사람의 뇌온도를 올리는, 소위 시쳇말로 '빡치게 만드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의 한 가운데서 우리는 한 숨 힘껏 들이마시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 자리에서, '예배자는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합시다. 그리고 하품은 이 시간만으로 족합니다. 하루종일 하품만 할수 없지 않습니까? 이제 또렷한 것을 실천하러 갈 시간입니다. 사랑하러 갈 시간입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하품에는 공감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척추동물에서 발견되는데, 같은 무리를 짓고 있는 동물들은 한 마리가 하품하면 다른 동물들도 그 하품을 따라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여기 모인 우리가, 사랑없는 세상에 대해 공통으로 스트레스를 느끼기에 함께 하품하러 모인게 아닌가 싶습니다. 같은 스트레스, 같은 숨, 같은 방법, 그럼 교회입니다. 메시아 예수의 몸입니다.

  오늘 제가 한 말에는 별 얘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자는 것을 알면 듣지 않아도 그만인 말들입니다. 다만 오늘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표에 부끄럽지 않기만을 바라는 맘에서 얘기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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