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썼던 글(여기)을 다시 손봅니다. 추억팔이 좀 해봅시다.
'왼뺨대기' 기이한 집단은 2013년 7월 중순에 모인 바 있습니다. 당시 그들은 작전기지로 삼고 있었던 아파트 사설 도서관에서는 쫒겨난 상태였고,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거지' 라는 아직도 저를 찌르는 저 말은 바로 저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커피숖을 전전하기 시작한 디아스포라의 시작은 바로 저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역시나 석진이를 만나러 커피숖에 있다가, 두 친구를 새로이 얻었고 오늘부터 그 친구들과, 2013년 그 날과 같은 대화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그러나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는 책.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책이면서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기피하고만 싶은 책. 오늘날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1. 다원주의 사회의 전통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흔히 이 사회를 다원주의(pluralism)이라고 합니다. 다윈주의 아니라, 다원주의입니다. 물론 이 둘은 밀접한 상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다원주의를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두산백과는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사회가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권력 엘리트에 의하여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에 의하여 민주적으로 운영된다고 보는 사상.
다원주의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여럿'입니다. 그리고 '여럿'은 하나를 배격합니다. 양차세계대전을 통해서 인류는 국가 중심의 세계관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때,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참혹한 아픔 속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가 중심의 하나를 배격하고, 반대의 생각이 급부상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십니까? 저는 좋아요를 누르겠습니다. 저 위의 정의에 대해서 반대하고픈 생각이 별로 없고, 저 정의야말로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다원주의를 주창하는 이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 권력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마음이 쬐끔 드는 정도? 다원을 추구하나, 이 다원은 어찌보면 또다른 잘못된 하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심증?
어찌되었든 이러한 사회 속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말을 생각해봅시다. 예전 D양과 K군이 말한 것은 좀 바뀌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다원주의를 배격하는 유일신 사상'을 신봉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보입니까?
다원이라 하지만 저는 다원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회가 다원이지만, 기준없이는 아무 것도 결정할수도, 움직일수도 없기 때문에 이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너도 나도 고개를 끄덕이는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이성'입니다. 남녀관계가 이 사회의 주된 논점이긴 하지만,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이성 말고 사람의 생각, 이성(reason)입니다. 이성에 대해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데카르트라는 사람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언을 들어봤지요? 이 말이 나온 경위를 좀 생각해봐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앎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앎의 근거란 무엇인가?', '우리의 앎을 진라라고 판명짓게 하는 확고부동한 토대는 무엇인가?' 이런 류의 질문을 던지며, 그는 난로가에 앉아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그의 숙고 속에서 발견한 앎의 토대는 '생각하는 나의 있음' 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이성의 시대가 막이 오른 것이었습니다.
데카르트가 1500년대 사람이고, 이후 300년간 인간 이성을 토대로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뉴튼과 칸트가 등장하면서, 이성에 더욱 더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중간에 데이비드 흄이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내일 아침에 해가 뜬다는 생각은, 생각의 관성일 뿐"이라는 회의주의를 내놓았지만, 이성의 질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미 이성은 절대왕정을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이성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심판자의 역할을 맡게 되자, 이전에 믿던 가치들은 모조리 난도질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성의 발 앞에서 가장 무력하게 짓밟힌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성이 보기에, 말이 안되는 사건들로 가득하거든요.
이성과 성경을 조화시키려는 몇몇 사람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17세기 계몽주의 이후 주류 사상에서 점차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이성주의자들은 이러한 시기를 '근대'라고 부르며, 자신들이 속한 시대를 축하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읽히던 시대를 '중세'라는 카테고리로 묶어놓고사, 이제 세상은 중세로부터 출애굽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중세와 근대 사이를 누가 잘라놓은 것일까요?
그리고 오늘날은 데카르트라는 이름을 알던지 모르던지 간에, 이 사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의 발 아래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다원은 이성 아래서의 다원입니다.
2. 제왕적 이성 아래 '신념들'
이 그림을 보니 짠하지 않습니까? 타블렛 살 돈이 없어서 빈 노트에 손으로 끄적끄적 그리고, 이걸 또 2년 노예 계약 걸린 핸드폰으로 찍어서, 펜티엄3 구닥다리 노트북으로 복붙하고 있던 2013년의 백수가 떠오릅니다. 지울 수 없는 저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 날의 그림을 그대로 쓰겠습니다. 하여간 이성 아래서의 다원주의를 그려본 것입니다. "이성 아래서"라고 했으면, 이성을 가장 아래 그린게 좀 흠입니다만, 어찌되었든 데카르트의 말을 따라, 이성은 확고부동한 앎의 토대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성 위에 A, B, C, D 기타 등등. 다양한 관점들이 놓입니다. 다양한 관점이라 말했지만, 어찌되었든 끊임없이 심판관인 이성의 검증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이성의 검증은 우리의 일상대화에서도 드러납니다. "내 생각에는 ~같아요"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확실하지 않을 때 한 발짝 물러서면서 쓰는 말입니다. 아직 '이성'에 의해 검증받지 않은 생각을 조심스레 꺼내볼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학자가 나와서 이론들을 꺼내놓으며, "그건 이러쿵 저러쿵 해서, 이러저러 해서, 이 이론에 의하면, 이 사람이 말했기 때문에, 맞습니다. " 이런 얘기를 해주면 마음이 놓이고, 검증이 끝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종교'라고 말하는 것들도 이성의 시험대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근대가 배격하는 중세의 제왕, 기독교와 성경은 아주 구석에 찌그러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종교'는 '신념'과 동의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신념은 사실과 별로 상관없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는 이분법들을 볼 수 있는데, 저는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가 사실의 문제를 포기하고, 가치의 문제에 자기자신을 가두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오늘날 자신을 종교라 지칭하는 모든 사고들이 그렇습니다. 그럼 사실의 문제는 누가 다룹니까? 과학이 다룹니다. 과학은 이성의 대표주자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과학으로 검증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리해봅시다.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던 지난 300년간, 이성의 위치는 점점 튼튼해졌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와 성경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사실의 문제'를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이성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념의 문제'는 '사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성경도 이성으로 판단해야 할 '사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성경에 대한 신뢰는 사실과 관계없는 일종의 신념이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들을, 요새 아주 흔하게 한다니까요? 이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조차 끄덕이며, 어떻게든 성경의 가치를 찾아보겠다고, 성서를 비물질적 세계에 대한 지식, 내면의 지식에 대한 책으로 축소시켜 버렸습니다.
3. 이성을 제자리로
두 가지만 생각해봅시다.
1) 이성은 확고부동한 앎의 토대입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사회 시간에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다 배웠을테지요. 애덤 스미스는 1700년대 사람으로, 데카르트의 사상의 영향 아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국부론>을 쓸 때 아주 자연스럽게 전제하기를, '인간은 무언가를 구매할 때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구매할 것이다' 라는 오늘날 들으면 아주 터무니없는 사실을 전제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합리적인(이성에 따른) 선택 속에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이뤄지고, 적정 가격이 결정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오늘날 주식 동향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변수를 예상할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구매한다고요?
사람들은 눈에 보기 좋은 것들을 '그냥' 사고, 디자이너들은 그런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키기 위해서 고급 쓰레기들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고도 비만 환자는 자신이 초콜렛을 먹지 말아야 함에도, 손에 초콜렛을 이미 들고 있고, 저는 폐암 말기면서 담배를 끊지 않는 아저씨를 알고 있습니다. 에덤 스미스의 주장에는 충격적인 구멍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합리적으로만 사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장이 웃기지 않습니까? '사실'이 이성으로 검증을 받아야 한다면,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이성으로 검증했단 말입니까?
멀리 돌아가지 않아도 각자 자신의 경우만 돌아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여러분의 생각과 선택은 어떠했습니까? 이성적으로 매순간 합리적인 선택을 하며 살아왔습니까? 그렇게만 하면,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까? 인간 이성은 그 자체로 확고부동한 앎의 토대입니까?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 거 맞아요? 혹시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전지구적인 착각. 이성이 앎의 최종 심판자라는 착각이 우리 삶에 많은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과학적 사실 아닌 모든 것들을 기준에서 배제해버렸습니다. 신념? 도대체 신념이란 무엇입니까? 믿는다고 말하면, 그것은 사실과 아무런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세상에는 이성에 의해 검증되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느끼는 경이와 찬사, 아름다움과 예술 마저도 다 이성으로 규명할 수 있다고요? 키팅 선생님은 그런 책을 찢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가장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당신이 어떤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야기하면서, 당신 이야기 속에서 사실과 신념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뭐가 사실이고, 뭐가 신념인지 모르도록, 사실과 신념은 서로 엉켜있지 ㅇ낳습니까? 그런데 종교와 과학이라고 나눠놓은 두 가지 권위가 격돌하는 이 세계는, 뭔가 사실 자체를 왜곡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2) 이성은 무엇으로 검증 받습니까?
이성은 사실의 영역을 밝혀낸다 하고, 신념의 영역은 다원주의로 남겨둬야 우기는 이 사회 속에서, 사실 파고들어보면 이성 뒤에 그 이성을 관장하는 더 큰 차원이 있음을 봅니다.
이성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성은 자신이 어떠한 '전통' 위에 서있는가에 영향을 받습니다. 전통은 이성이 진행되는 방향에 대해서 '권위'를 제공합니다. 즉,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아' 라는 말의 밑바닥에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성은 이 전통에게 '타당성 구조(plausible structure)' 를 제공할 뿐입니다. 타당성 구조는, '그럴듯한 생각의 구조' 라는 말입니다. 어떤 전통이든지, 그 안에 들어가 보면 다 그럴듯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타당성 구조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모든 전통들은 다 이성적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저는 기독교 전통을 가지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기독교는 '권위'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기독교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권장 받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생각하다보면, 그 전통이 '맞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전통이 왜 맞는지, 제가 생각한 바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당신이 불교에서 태어났다면, 불교 '전통' 위에서 '권위'를 가진 '생각들'을 받아들일 것이고, 이성은 그 생각들을 연결해서 '타당성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당신의 사실과 신념을 결정하는데 하나의 주요한 관점으로 기능했을 것입니다.
표면상으로는 다원주의, 그 아래는 이성의 절대주의, 그리고 그 이성을 다스리는 흑막이란 바로 전통입니다. 다원주의가 맞는지, 안맞는지는 그 아래 어떤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를 들여다 봐야지요. 이성적이냐 아니냐로는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세계관들이 다 이성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를 들여다보는, 저의 최종적인 그림은 이렇습니다.
모든 생각에는 그 아래에 전통이 있습니다. 그 전통 위에서 이성의 집을 짓습니다. 당연히 말이 되게끔 짓습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종교든 사상이든, 말이 안되게 지은 집은 없습니다. 다 그럴듯 하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럴듯하다고 해서 진리는 아니고, 어떠한 전통 위에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성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당성을 얻으려고 해선 안되겠습니다. 다 이성적이니까. 그리고 본인이 속한 전통도 모른채 살지 맙시다. 본인의 뿌리도 모른채 무슨 자기 생각이 있겠습니까? 어서 주워들은 것으로 팔랑거리다가 휘청거리다가 할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과 신념을 두부 자르듯 나눌 수 있다는 생각도 집어 치웁시다. 그저 자신이 속한 전통 위에 세워진 타당성 구조에 따라, 받아들이는 생각이 있고, 거부하는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우리의 논의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다원주의입니다.
사회가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권력 엘리트에 의하여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에 의하여 민주적으로 운영된다고 보는 사상.
이 좋아보이는 말로 꾸며진 다원주의의 진짜 정의는, '과학 발전의 전통위에 세워진 이성중심의 다원주의' 입니다. 모든 것의 가치를 인정해준다고 하지만, 인정은 무슨 인정입니까? 과학 지상주의요, 과학으로 판별될 수 없는 내용은 그저 '신념'이라 부르며 가벼이 여길 뿐입니다. 그리고 과학에 의해서만 사실의 옳고 그름이 정해지는데, 그렇다면, 많이 배운 권력 엘리트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더 더욱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과학을 알고 이용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자연히 권력이 모아질테니까요.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에 의해서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것은, 서로 합의 할 수 있는 사실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원주의는 그 기준이 과학이라는 얘기인데, 나는 여기에 반대합니다. 과학 조차도 하나의 전통, 우연으로 생긴 세계, 법칙으로 인해 닫힌 세계를 말하는 타당성 구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과, 도덕과 윤리에 대해서, 과학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데, 그게 어찌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
나는 지금 문제가 단단히 꼬였음을 느낍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빌어먹을 전통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전통 위에서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이성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것들을 쉽게 믿어버립니다만, 그 결과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옳은 것은, 나의 상식과 관습에 대단히 거스르는 것일 수 있습니다.
4. 다원주의 사회에서 성경 읽기
나는 이러한 사회 속에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 이야기를 믿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결코 무식하거나 부끄러운 일일 수 없습니다. 이것을 무식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성 중심의 과학 전통 위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자신이 서 있는 토대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고 있죠. 저와 똑같습니다.
성서는 바로 그 점, 전통에 있어서 탁월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전통이냐? 텍스트에 대한 유구한 해석의 전통이 그것입니다. 성서는 역사를 따라 끊임없이 해석되어 왔고, 언제나 그 시대의 전통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기능했습니다. 그 전통 위에 서서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배우는 일은 값진 일입니다. 필요한 일입니다. 의미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목적이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 일,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성서의 전통 위에 서 있다면, 우리에게도 성서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전통을 비추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무수한 성서의 해석 전통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배우려면, 그 배움의 원천을 믿어야 하죠. 선생님을 의심하면서, 그 선생님이 가르치는 바를 배울 수 없고, 문제집을 의심하면서, 그 문제가 가르쳐주는 바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언제나 배움은 자기헌신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성을 절대시하는 이 시대의 전통이,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을 미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의심합니다. 그러나 의심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렸을 때 구구단외울 때, 2x2가 정말 4일까 의심했습니까?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구구단을 배웠는데, 저는 구구단이 옳다고 믿었어요. 그러니까 따지지 않고 배웠겠죠. 그리고 믿고 외운 구구단은 제가 수학적 사고를 하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일단 어떤 것을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이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당신은 무얼 믿고 있습니까?
성경은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비추어주는 거울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게 나빠요? 동의 못할 수도 있지, 무조건 믿으라면 그건 타당성 구조도 못되는 천박한 사고입니다. 다만 성경은 당신이 지금 무엇을 믿고, 무엇 위에서 사고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 시대의 전통이 가지고 있는 허위 마저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당신이 속한 전통 전체를 뒤집는 충격적인 도전을 스스로 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