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용


We’ve a message to give to the nations,

That the Lord who reigns up above

Has sent us His Son to save us,

And show us that God is love,

And show us that God is love.


  3절은 이제 그 이야기와 노래의 '내용'을 들려준다. 


-위에서 다스리시는 주님?

  그 내용이란, "위에서 다스리시는 주님"에 대한 것이다. 한 분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 그러나 이 말은 오늘날 꺼내자마자 사람들의 눈쌀을 찌뿌리는 단어들의 집합이 되었다.


  먼저는 "위에서"다. 상호 존중과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어떤 존재가 내 위에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소리가 아니다. 만일 누군가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야말로 '빅 브라더'아닌가?

  그래서 오늘날은 "위"라는 개념을 없애버렸다. 이른바 형이상학, 신비로운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 대한 얘기는 종교에서나 들을 수 있는(심지어 종교계에서도 꺼내기 껄끄러운) 말들이 되었다. 신이 머무는 하늘 어드메의 궁전은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우주여행을 다녀온 우주 비행사는 천국이 없다고 인터뷰하며 조소한다. 오직 물질만 존재한다는 유물론자들은 더이상 극단적 사상가들이 아니라, 일반인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전부인 사람들에게 "위"란 생계와는 무관한, 우습거나 고상한 말이 되어 버렸다. 기껏 인정하는 "위" 는, 진선미(眞善美)의 도덕적 차원 정도인데, 이 도덕적 차원 마저도, 생존을 위한 생명체의 진화 과정 안에 집어 삼켜졌다. 생존을 위한 도덕이라니! 온통 아래 뿐이다. 위는 없다. 

  

  사람들이 "위"를 버린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일단 사람들이 "위"에 실망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는 최근 주변 지인들이 "권위(authority)"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단어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권위를 가진 이들이 그 권위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장면을 보기가 힘들다. "정치란 오로지 씨알을 위하는 생각만 하는 것"이라는 어느 사상가의 말과는 달리, 우리는 메스컴을 통해서, 오직 자기 자신, 오직 자기 정당만의 '생존'을 위해서, 사실을 짓밟고, 사람들을 모함하는 자들을 늘상 보고 있다. "권위", "다스림", "통치" 같은 단어들은 그들의 인격과 함께 오염되어 버렸다.[각주:1] 


  이런 입장에서 두번째 단어인 "다스림"을 보라. <성경>은 온통 "다스림"에 대한 책이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다스림이란, 깨끗한 다스림, 선한 다스림,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다스림이다. 집권자가 씨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다스림이다. 그러나 <성경>과 우리의 현실을 놓고 보면, 두 가지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 말그대로 천양지차(天壤之差). 하늘과 땅이 다름을 확인한다. 따라서 성경을 모르는 사람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말한다는 것은, 그 시작부터 나와 같은 어휘를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과 대면하는 곤경을 전제한다. 설상가상으로, 이것이 곤경인지 깨닫게 되는 시점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언성을 높이고 난 뒤 비로소다.


  오늘날은 "위"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이 벌어지고 있다. 먼저는 위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부패요, 나중은 '이상'을 이룰 수 없음에 대한 절망이다.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는다.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아래에서의 적응의 수단을 찾고 있다. 그런데 "주님"이라니! 이 말은 앞에서 말했던 모든 곤경들의 끝판왕이다.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오늘 이 땅을 선하게 다스리는 인격적 존재"에 대한 신뢰.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말이다. 마치 석가처럼, 모든 현상적 차원의 감각 스위치를 꺼버려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될 정도다. 이러한 삼중고 속에서, 과연 우리는 "위에서 다스리시는 주님"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앞에서 말한 표현대로라면, 우리는 정말 노래할 수 있을까?


-아들을 통해 드러난 아빠 

  그 가능성을 "아래에서 구원하신 아들"에게서 본다. 불가능한 가능성이 그에게서는 '이뤄졌다'. 우리가 위를 말함은, 그 위가 아래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스림을 말함은 그 선한 다스림이 아래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을 말함은 그가 바로 위의 계신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부패한 통치자들을 비판했으나, "위에 계신 분"을 그 부패한 통지자 카르텔의 수장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인류를 감시하는 폭군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그가 "위에 계신 이"를 부르는 호칭은, 다름 아닌 "아빠"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에서부터 이 땅에 그 아빠의 선한 다스림이 돌입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른 세상의 통치자들과 달리, 그 선한 다스림을 위해 굵은 나무 기둥을 짊어졌다.


  그리고 당신이 믿던지, 믿지 않던지 세상이 여기에서 뒤집혔다. 이전까지 세상에 이런 사람은 없었다. 진리를 억압하려는 당대 최고의 종교와 최대의 제국 앞에서, 이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항변하지 않고, 오히려 죽고자 했다. 아무런 잘못이 없던 그가, 초국가적 차원의 폭력을 견디며 전진한 것은, 다름 아닌 그가 가진 '믿음' 때문이었다. 그의 믿음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그 사람은 자신을 이스라엘을 통해 전해지던 서사의 주인공이라 생각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출애굽을 위한 어린양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포로기를 종결짓는 '인자'다. 하나님이 범죄자들을 위해 내어주었던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자신이 출애굽의 어린양으로서, 포로기의 인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의 죄악을 짊어지고 죽어야 하고, 이것을 통해 새로운 출애굽이 벌어질 것이라 믿었다. 곧 악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광야를 살아내는 새로운 사람들의 출범이다. 그의 믿음은 곧 그가 아빠라 부르던 "위에 계신 이"가 반드시 그렇게 하시리라는 굳건한 믿음이었다. 이 바보같은 믿음이, 아들이 극악의 고통 속에서 홀로 전진한 이유였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한 한 사람은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임 당했다. 여섯 시간동안 나무에 매달려있던 그가 마침내 죽었을 때, 세상은 역시나 폭력이 이겼고, 부패한 권력이 이기는 살벌한 곳으로 남는듯 했다. 위는 없을 뿐만 아니라, 아래에서는 괴물 같은 이들이 왕 노릇을 이어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예수가 죽임당하는 그 순간은, 삶을 약속하던 이 땅에서의 통치자들이, 결국 진리를 말살할 수 밖에 없다는 비참한 인간성이 폭로된 순간이었다. 오히려 그들이 예수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들을 이끌고 십자가로 올라간 것과 진배 없었다.

  결국 생명과는 무관한, 진리를 말살하는 통치권력의 실체(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다)를 폭로한 아들의 죽음. 만일 이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마치 이 사람에 대한 유명한 뮤지컬처럼), 우리는 그를 당대에 십자가에서 똑같이 처형 당했던 수백명의 사람들과 똑같이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아무 힘도 쓸 수 없게 되고 나서 사흘 뒤, 현대인이 그토록 부정하던 하나님의 실체가 드러났다! 죽음을 이기는 힘이 팔레스타인 돌무덤에 누워있던 한 사람을 일으켰고, 이는 그가 살아있었을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조차 경악하게 만들었다(복음서 뒷부분의 부활 이야기는 온통 허둥지둥했던 이야기들이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권위 세우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사건이 벌어지고, 뒤늦게 그 사건들의 의미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부활은, 진리를 죽였던 인간의 모든 '짓'을 용서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짓'이 시작되었다. 그 '짓'이란 새로운 세상을 '짓'는 일이었다. 이 용서를 받아들인 이들은 새롭게 지음 받는다. 그들을 새롭게 하시는 이가 "위"에 계신 "주님"이시다. 곧 새로운 창조. 죽음을 이긴 그 힘으로, 아빠 하나님은 사람과 세계를 새로이 짓는 일을 시작하셨다. 이것의  시작이 부활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와 부활은, 아들이 아래에서 아빠를, 아빠가 위에서 아들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리고 아빠와 아들이 서로를 드러내는 이것을 가리켜 찬송가의 작사가는 성경의 진술을 따라 이렇게 말한다.


show us that God is love.

   

  "위에 계신 이"가 어떠한 분이신지, 이 땅에 무엇이 이뤄졌고, 이뤄질 것인지가, 이 땅에 드러났고, 이것은 아빠와 아들의 합작품이었다. 십자가와 부활. 그것은 아들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이 땅을 향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드루와

  예수에게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위"가 "아래"에 드러났다. 이것은 사랑의 사건이었고, 이 사랑의 인력에 따라, 마침내 위와 아래는 하나가 될 것이다. 그 하나됨은 먼저 사람들의 내면에서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위"를 폭군이 아니라, "아빠"라 부르기 시작했고, 파당을 만들고 그 파당의 생존을 위해 사는데 익숙했던 이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 공동체는 위에 계신 아빠와, 아래에 오신 아들의 '관계', 즉 서로를 드러내주는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은 그들을 드러내신다. 그들은 진리를 저버렸던 범죄자들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의 출애굽이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로 사람들을 불러모은 사건임이, 그들을 통해 증명되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출애굽의 공동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출범한 기원후 1세기의 공동체는, '이 소식(message)'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바로 위의 3절의 그 메시지다. "위"를 믿지 못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말하고, "권력"을 부정하려는 자에게 십자가를 말하며, "주님"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예수를 말한다. 그의 다스림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주 전체가 새롭게 될 그 날에 완성될 것이라는 소식. 일을 시작하신 아빠의 일에 참여하라는 거룩한 초대. 온 세상이 새로워질 것을 고대하는 갈망.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을 향한 예수의 미더움, 예수를 향한 하나님의 미더움, 그렇게 우리도 서로를 미더워할 수 있는 사랑의 관계로 들어오라는 신의 호소! 그들은 진실로 이 땅에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였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은 양동작전을 펼친다. 사람은 소식을 전하고, 하나님은 그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자신의 숨결을 부어주신다. 예수를 일으킨 바로 그 숨결이다. 세상을 창조한 바로 그 숨결이다. 그리고 그 숨결로 호흡하는 이는, 세상을 새로이 짓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숨결로 숨 쉬는 것은, 우주가 마침내 새로워질 것이라는 이 위대한 결말의 보증이고, 거룩한 숨을 쉬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이 결말에 대한 보증이 된다. 만물을 창조했던 그 숨결은, 이제 만물을 새롭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호흡에 있다. 그 숨으로 숨 쉬니, 그것을 믿고 산다! 우리가 부르던 노래가 정말 현실 될 것이다! 만유가 아들 안에서 하나 될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떨어진, 불가능을 뒤집는 믿을 만한 소식이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의 숨결을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갈망이, 그를 만났을 때 채워지고 넘친다.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있는가? 사랑은 인식과 존재를 새롭게 한다. 우리는 위로 부터의 부어지는 사랑을 통해, 세상을 새로이 읽고, 새로운 존재가 된다. 이른 바 "하나님이 아신 바 된 사람"이다. 


  내가 지금 써놓은 이 말들이 당신에게 어떻게 들릴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얼마나 이해하느냐보다, 어쨋거나 이것은 실제 벌어진 사건이요, 소식(message)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의 메시지는 종교의 껍데기를 쓰고 있으나, 이것의 본질은 소식이다. 종교는 조언하지만, 소식은 놀라게 한다. 마라톤 평원을 달려온 전사가 가져온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었듯, 예수가 십자가 부활을 통해 열어재낀 새로운 차원은,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조언 따위로 격하될 수 없다. 세상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소식, 이전에는 없던 소식이다. 십자가를 짊어진 한 사람이, 악과 맞서 경천동지할 승리를 분명하고도 똑똑히 이뤘다는 소식. 우리가 언제나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냈던 보이지 않는 신과 세계에 대한 참된 진술들이, 마침내 확연히 드러났다는 소식. 이제 악을 이기고 함께 하나될 수 있다는 열린 문. 창조주와 구속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인간다움이 다시 일어나 새로이 창조된다는 기쁨의 소식! 


  당신은 방금 이 승리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이다. "위"와 "아래"의 불화가 종식되고, 아들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되는 소식. 상대와 절대, 객관과 주관, 보편과 개별, 나와 너, 하늘과 땅. 세상을 둘로 나누는 모든 것들이 화해를 이루는 하나의 몸, 예수에 대한 소식이다. 이 제3의 길로 함께 들어가지 않겠는가?


  1. 그러나 '권(權)'은 저울이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 기준이 필요한 사람들이 힘을 모은다. 그 모인 힘이 권력이고, 그 모인 자리가 권위다. 그런데 오늘날 "권위"라는 단어의 짝은 "부패한"이다. 기준을 제시할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들 배불리는 일에 기준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눈금을 속인 저울을 가지고 씨알을 짜먹기 때문이다. 기준이 있어서, 힘이 정당성을 얻는 것이지, 힘 자체가 정당성이 되어선 안된다. "제도와 법규는 그릇되기 쉬우니까 백성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다석 씨알 강의> p. 5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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