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36日,

from 카테고리 없음 2015. 5. 4. 06:52

  '해석되지 않은 사실은 없다'는 주장은 참으로 맞는 말이나, 저 해석의 주체는 사람만이 아니다. 그럼 사람이 없으면 사실도 역사도 없을 것인가? 뜻없이 존재하는 것없고, 의미없이는 풀 한 포기도 생겨날 수 없다. 오늘날은 존재와 의미를 떨어뜨려놓고서, '의미없는 존재'에 대해 말하길 좋아한다. 우주의 시작도, 오늘 우리의 있음도, 뜻없이 일어난 일이라 한다. 뜻을 제거해버리면 순수 사실이 드러난다 한다.


  허나 그렇지 않다. 존재 자체가 곧 의미이고, 있음 그 자체가 뜻이다. 의미가 여럿일 순 있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의미가 없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뜻이 있다'는 한 마디 속에, 우주 전체가 있다.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 속에서도, 우리가 관심 갖지 못하는 소소한 일에도 뜻이 있다. 그러니 그 한 뜻 찾아보자는 것이 종교요, 정치요, 교육이요, 우리네 삶이다. 하나 찾음이다. 


  그리움이다. 한 분이 말숨으로 우주만물 창조하셨으니, 우주 구석구석에 그의 숨내음이 있다. 그 숨을 뜻숨이라 부르면 어떤가. 오늘도 폭발하는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그의 숨내음을 찾아 들이마셔야 한다. 사실, 의미, 해석, 역사에 대한 연구는, 숨결을 더듬어 아빠를 찾아나섬이다. 사람이 자꾸만 뜻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 뜻에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제 아침 '솟'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있고, 땅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아'가 있다. 땅 위에 두 사람이 그들 사이에 있는 깊은 아를 찾는 게 솟이다. 깊은 아는 말숨이요, 뜻이다. 뜻이 두 사람 사이에 있으니, 그 뜻은 관계적이다. 관계 속에서 찾는 이 뜻으로 사람은 솟는다. 죽음의 땅을 박차고 솟는다. 


  뜻을 주신 이가 그 뜻은 사랑이라 하셨다. 사랑이라고 우리가 의미부여를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은 본래부터 있었다. 그래서 만물은 사랑이요, 사랑은 뜻이요, 그 사랑 때문에 일어섬이 솟이다. 땅으로부터 솟으니 죽음의 반대요, 부활이다.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사랑을 시작했으면 새창조요, 이로써 우주의 갱신과 완성이 시작된 것이다.


  우주를 병들게 하는 거대한 악순환이 나를 관통하며 흐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 하는 것은 쉽지만, 그 악순환을 내 속에서부터 끊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소망을 말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슨 소망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다른 것보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내가 사람답지 못하면서, 누구에게 사람다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주의 악순환을 제 속에서부터 절단낸다. 순간이 아니라 줄곧 끊어, 마침내 처음과 마침을 관통하도록 끊어낸다. dia. 처음과 끝을 맞닿게 하는 일관성, 악은 끊어질지언정 끊어지지 않는 나의 존재의미. 처음과 끝이 언제인지 몰라도, 그저 첨과 끝이신 아빠를 믿고, 내가 나온 세대 속에서 역사를 잇고 또 이어. 사랑한다.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끝까지, 마치 끝없는 사람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인간의 신적 기원을 보지 않는가? 그리고 이것이 피스티스. 하나님을 믿음이라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믿음이 결국 우주를 사랑으로 완성하리라 기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는, 이러한 삶의 첫 사람이다. 아빠를 믿어, 뜻숨을 쉬고, 줄곧 사랑함으로, 죽음을 이긴 첫번째 케이스이자, 완전한 케이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해준 인간의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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