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사는 나 아닌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이다. 제사의 주인공은 고통받고 죽임당하며, 사람은 죽어가는 그 제물을 통해 슬픔을 느끼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흔히 '영혼이 정화되었다'는 표현을 쓰는 그것 말이다. 인간은 어느 문화권이든 상관없이 제사 문화를 가지고 있고, 이 제사문화는 사람의 죄책감을 씻어내고, 다시 새로이 살 수 있는 명분과 힘을 주었다. 그래서 제사는 공동체의 중심이고, 이 제사를 관장하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단군도 마찬가지의 사람이었고.


  종교를 삶의 변두리로 몰아넣은 지금, 제사의 기능을 대체한 것은 미디어다. 사람들은 미디어가 보여주는 사람들과 공감하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슬퍼하며,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영화관에 가는 이유는 '공감을 통한 카타르시스'가 아니겠는가? 가끔 KBS에 감사한다고 나와서 말하는 사람들을 보며, 제사의 기능을 확실히 미디어가 대체했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의 캐릭터가 곧 오늘날의 제물이다.


  오늘날은 각자가 자신의 정서를 다스리는 방식들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스마트폰 안에서, 노트북 화면 안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주고 받으며, 함께 공감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모두가 사제인 세상이 왔다. 나에게는 이렇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는 것이 제사다.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과, 삶의 변화들을 나는 여기에 기록하고, 이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서 마음을 다스린다. 내 글의 대부분의 주제는 제물된 한 사람의 이야기요, 그 사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나는 영혼의 치유를 경험한다.


2. 

  그러나 오늘 이 글을 통해서 단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제사만으로는 안된다. 공감을 통한 카타르시스는 실천을 위한 준비과정이어야지, 그저 그 감정에 중독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나는 이 감정에 중독되었다. 그저 느끼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달라졌다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느끼려고만 한다. 올바른 것을 써내려가며 내가 올바르다는 착각을 하고, 분명한 것을 써내려가며, 나의 삶 역시 분명하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그리고 그 착각을 '믿음'이라 부르며 종교적 신념으로 정당화하려고 한다.


  나의 제사는 해석이다. 새로이 글자들을 읽어가며 나는 남다름을 느낀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꼭같은 해석이 이 지구에 어디있으랴. 사람 수 만큼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남다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본래 개성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개성을 억누르고 지우도록 강제하는 힘이 있을 뿐이다. 사람의 바탈은 모두 유니크하게 지어졌다. 그럼에도 이 남다름이 상대적 우월감을 가져오고, 이 우월감이 글쓰기의 동력을 제공한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다를까? 


  '해석'은 '여김'이다. 무언가 내 해석을 말해놓으면, 菲가 생긴다. '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아니다'라고 말하는 양쪽의 사람들 사이에 서게 된다. 그럼 나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인(in)'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닌(not-in)' 것이 옳은 것일까? 안이 옳을까, 밖이 옳을까. 예수 그리스도 안으라는 말은 그 밖에 신경끄라는 말이 아니었다. 안과 밖에 대한 공간적인 이해를 가지고, 현실안주를 정당화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는 말은 그저 하나의 해석을 붙잡고, 그 해석 아래 있으면 안전하다는 말이었을까?


  '해석'은 '여김'이다. 인생은 무수한 상황 속에서 무수한 '여김'을 반복하며 살아가는데,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유니크한 개성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다양한 상황들을 어떤 기준으로 '여기고' 있을까? 때로는 좋다고, 떄로는 싫다고 여기는 그 기준은 그저 내 영혼의 카타르시스일까? 나의 제사 행위를 통해서 고착된 하나의 해석이 나로 하여금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눠놓고 있는가? 


  첫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던 이후의 사람인 나는, 선도 알고 있다 생각하고 악도 알고 있다 생각하지만, 정작 그 선과 악을 가로지르는 기준에 대해서 정녕 무지하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대로 '여기며', 점점 나도 모르게 어느 한 쪽에 치우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해석에 '그렇다'라고 말해주는 사람들 말만 들을 수 없다. 그렇다고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만만 들을 수도 없다. 해석은 끊임없이 둘만 낳기 때문에, 해석 사이에서 제 3의 길을 걷는 것은, 해석이 기준일리 없다. 해석 이상의 것. 해석을 넘어선 것. 모든 해석을 아우르면서도, 해석과 맞닿아 있는 것.


  그러니 제사로는 안된다. 제사를 그저 바라보며, 내 영혼에 들어맞는 느낌을 찾는 것으로는 안된다. 무엇이 안되느냐? 하나가 안된다. 이것이 해석의 한계다. '대상을 바라봄'의 끝은 여기다. 바라보는 것은 공감이 최대치다. 그리고 이제는 그 공감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남는다. 실천이 남는다. 생각이 다르고, 느끼는 것이 다른데, 그 다음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까. 하나되는 실천을 낳는 것은 너와 나를 갈라놓은 해석은 아니리라.


3.

  왜 예수는 유다를 친구라 부르셨을까. 왜 예수는 자신을 죽음에 팔고자 찾아온 유다에게 조차 친구라 말씀하셨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예수와 유다의 해석은 접점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을텐데, 왜 그토록 해석이 다른 자를 예수는 친구라 부르실 수 있었을까?


  해석의 기준은 또다른 해석인가? 해석이 해석을 낳는다면, 가장 근본된 해석의 토대는 무엇일까? 만일, 삶이 있고 해석이 있다면, 해석을 가지고 삶을 재단하는 것은 삶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다시 삶이다. 삶은 죽었으나 다시 일어났다. 내가 톰라이트에게 배운 것은, '그 일어나서 일으킨 삶'이 모든 해석의 근본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 역시 또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가? 아니다. 분명히 일어난 사건,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자는 말이었다. 삶이 삶되었다. 다시 삶이 돌아왔다. 이 사건은 해석이 아니다. 해석이 되어야 할, 해석 이전에 있는 사건이다. 여기에 역전이 있다. 해석이 삶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해석의 길을 제시한다.


  내가 다시 살았으니, 나도 남을 살린다. 다시 삶이다. 부활이다. 해석이 아닌 부활의 삶이 모두를 하나되게 할 수 있다. 해석이 달라도 상관없다. 심지어 그 해석이 나를 돈받고 팔아넘기려는 해석이어도 상관없다. 그저 하나 뿐이다. 나는 살았으니, 너를 살린다. 이것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이것없이 다른 무엇을 하겠는가? 살림이요, 살림살이요, 삶이요, 사람이요, 종교의 의례와 의식 속에서 삶과 다른 것을 찾는다면, 그저 제사에 지나지 않다. 예수는 제사를 위해 오지 않으셨다. 제사를 끝장내러 오셨다.


  나는 그를 따라 '일어난, 일으키는 인격'이다. 내가 배격해야 할 것은, '주저앉은, 주저앉히려는 비인격'이다. 예수를 주저앉히려는 사람들의 행위는 오히려 의를 이루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예수를 주저 앉히려는 모든 노력들이, 다시 예수가 일어나는 사건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자기 아들을 죽였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진술은 바로 이것이다. 자기 아들을 죽인 이들을 한 분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확인이 부활이다. 아들을 죽였던 모든 악행들이, 아들이 완전히 살아남으로 없이 되었다. 예수를 없이 여겼던 이들의 죄악이 없이 되었다. 그러니 유다도 용서되었다. 위대한 역전. 해석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던 그 하나가 하나님에 의해 부정되었다. 죽음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이어지는 구절을 보라.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를 거역한 것은 용서가 되지만, 성령을 거역한 것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성령이 무엇이기에? 성령은 숨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이다. 그 숨결은 '일으키는 힘'이다. 삶을 삶되도록 일으키는 힘이 성령이신데, 삶을 삶되도록 일으키는 것을 가로 막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일어난 자가 나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나더러 일으키라 말씀하신다. 그러니 나도 타인의 손을 붙잡는다. 그렇게 다 일어나자. 이 일어남도 해석의 하나가 되어선 안된다. 해석이 얼마나 다르던, 일어나라 하시니 그저 일어나면 그만이다. 삶이 삶될 수 있으면, 해석은 나중이다. 그러니 여김의 기준은 일어남이다. 일어나는 것이 좋은 것이고, 삶이 옳은 것이다. 


마태복음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가복음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고린도후서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글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숨으로 함이니 

글자는 죽이는 것이요 숨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끝없는 경고를 보라. 글자에 매달리느라, 제사드리느라, 사람들 일으키는 데에는 조금도 관심없이, 오히려 그들을 주저앉히는데 혈안이 되었던 이들. 그들은 해석의 달인들이었다. 죽이는 해석. 편 나누는 해석. 고아와 과부와는 상관없는 해석들, 또 그 해석에 대한 해석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병원에 가보면 사람들이 진정 무엇을 갈망하는지 알 수 있다. 일어남, 새 몸, 다시 삶. 그래, 부활이다. 부활은 평면 위에 누워있는 글자들 사이에서 벌이는 미로찾기가 아니다. 해석의 싸움이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그 글자들이 일어나 사람되는 것이다. 저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 삼으실 수 있으신 그이가, 글자들을 일으켜, 글자쟁이들을 무색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교육은 어쩌면 말로 굳어져서 살림과는 상관없이 완악해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친구와의 통화 속에서 들었던 멋진 말로 오늘 글을 정리한다. 내가 써놓은 글자 따윈 이제 잊어도 좋다. 그저 이미 일어나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이 문장에 비춰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피흘리며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헤모글로빈 수치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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