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 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아멘
부활(復活)은 무엇인가? '돌아올 부', '살 활'이니, '돌아오는 삶'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돌아간다. 그런데 그 돌아감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부활이다. 죽어 저멀리 도망간 줄 알았던 삶이 다시 돌아온다. 이것을 소망하고 사는 현실이니, 죽음을 극복하는 이제요, 지금이다. 돌아올 것을 믿으니, 이미 나는 살아서 죽음을 이겨나간다. 생존의 무게 속에서 삶의 꽃을 피워낸다. 따라서 부활은 현재적 차원과 미래적 차원을 동시에 아우르는 말이다. 찬송가 515장이 이를 잘 보여준다.
뜻없이 무릎꿇는 그 복종 아니요
복종과 섬김은 다르다. 뜻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다. 뜻 없이 무릎을 꿇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요, 그래서 굴종이며, 복종이다. 그러나 뜻이 있어 무릎을 꿇음은 섬김이다. 복종은 자신에 대해서 무지하고, 남의 뜻에 이용당하니 비굴하나, 섬김은 깨친 것이요, 떳떳한 것이다. 스스로 종되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내어줌이다. 이는 제 목숨보다 더 큰 뜻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강제로 무릎꿇게 만드는 것이 '강제'요, '폭력'인데, 뜻 있는 자는 어떠한 강제와 폭력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는다. 차라리 제 목숨을 내어주었으면 내어주었지, 목숨이 두려워 뜻을 꺽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 목숨을 버려 뜻을 추구했다. 허나 그 뜻은 자기 고집이나 허영과는 다르다. 뜻이란, 많이 배웠냐 못배웠냐의 문제가 아니다. 목숨보다 큰 뜻을 붙잡아, 폭력과 죽음의 위협에도 아랑곳 않고 제 목숨 내어준 사람들은 식자들의 무리가 아니었다. 다만 더 큰 숨이 있음을 믿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 사람들이 참으로 민중이요, 씨알이다. 그 숨이란 목숨을 넘어선 숨, 제 삶을 넘어선 삶이다. 살몸의 살고 죽음을 극복한 삶이다. 삶에 삶을 더하고, 삶에 삶을 곱하여, 죽음의 위협을 두렴없이 극복함이다.
이 죽어서도 사는 이의 숨을 성령, 곧 '거룩한 숨결'이라 한다. 이 거룩한 숨결로 호흡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죽음과 짝하여 죽음을 긍정하지도 않는다. 오직 끝없는 호흡뿐이다. 그러니 철학자의 고매함이나, 혁명가의 복수심에 이글거리며 목숨을 끊는 것과는 다르다. 거룩한 숨결을 숨 쉬는 이는 그저 제물이다. 더 큰 숨이 있어, 제 목숨을 기꺼이. 기쁘게. 기꺼이라 자유고, 자유니 기쁨이다. 생존의 압박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얻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생활'은 '살아서 사는 것'이다. 그럼 부활은, '다시 돌아온 살아서의 삶'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돌아온 삶은 운명에 맡긴 삶이 아니다. 운명에는 다시 돌아옴이 없다. 그래서 운명에 맡긴 삶은 결정론이요, 내가 겪고 있는 시련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그러니 운명은 죽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면 정녕 죽음 앞에서 인간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는가? 그저 끝이고, 절망일 뿐이니,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수가 없는가? 왜 수가 없는가? 나의 수는 아니라도, 그의 수가 있다. 역사 속에서 이어 내려온 수. '이어수'라 예수다.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한 숨을 쉬어, 제 목숨 내어주고도 새로운 숨으로 돌아온 아들의 삶을 본다. 그는 죽음을, 운명을 뛰어넘는다. 죽음을 뚫고 삶이 삶되게하여, 현실을 극복한다. 그의 병고침, 귀신내어쫓음, 죽은 자 살림은 모두 이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삶을 삶되게 한 것이다.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의해 변할 수 없이 굳어버린 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을 새로이 읽는다. 그래서 부활은 세계관이다. 삶을 삶되도록 세상을 읽음이다.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 이뤄지리이다 외치며 사나니
믿음이란 곧 신실함이다. 부활시키시며, 부활로 살라고 생명주신 이에 대한 올곧음이다. '생명'은 '살라고 명받음'이다. 생명은 우리에게 다시 살라고 한다. 부활하라고 한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굳게 붙잡으라 한다.
마치 낭떨어지에서 떨어지는 독수리 새끼와 같다. 태생이 독수리라면, 떨어지는 와중에도 날개짓을 할 것이고, 창공에 자신을 띄우므로 자신이 독수리임을 깨달을 것이다. 땅에 고개를 처박고 소멸할 존재가 아니라, 하늘의 왕자임을 허공 중에서 깨달을 것이다. 죽음으로 낙하하여 사멸할 존재가 아니라, 죽음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더욱 확실히 할 것이다. 온전히 '있음'으로 아버지를 뚜렷이 드러냄.
지금 우리는 죽음이라는 가공할 힘에 끌려 낙하중이다. 이 중력 앞에 뜻없이 복종하여 산산조각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가?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날개짓을 포기하는 것이 초탈의 진리인가? 그런 일 없다. 주 뜻 이뤄지리이다 외치고, 산 자는 산 자의 길을 다시 걸을 뿐이고, 산 자의 길은 날개짓이다. 허공답보다. 주 뜻은 우리가 땅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라, 하늘 사람 되는 것이다. 독수리 날듯, 우리가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땅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러니 땅 위에 쓰러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 걸어야 한다. 중력을 극복하여 고개를 들고, 우리가 나온데를 바라봐야 한다. 그러니 죽음으로 낙하하는 중에도, 믿고 날개를 퍼덕이는 것이다. 이것이 삶이다. 삶은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늘의 아들, 독수리임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날개짓이 시작되지.
약한 자 힘 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여기 창공을 가르는 날개짓을 보라. 역전이다. 부활을 믿고 사는 현재는 역전이다. 생존의 무게에 짓눌린 약한 자는 다시 삶의 희망을 얻고 '살아가며, 강한 자는 죽음을 이기시는 한 분 앞에 제 힘을 바르게 써야 함을 알게 된고, 죄악으로 추악한 생활을 하는 자는, 죽음 속에서도 인격을 건지시는 이의 깨끗으로 다시 태어난다. 니고데모에게, 성령숨을 쉬면 다시 태어난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 현재 속에서 벌어지는 역전.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을"의 노랫말은, 이 부활 소망으로부터 오는 현재 삶 속에서의 역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해 아래 압박이 있는 곳. 죽음이 두려워 올곧게 살 수 없는 곳. 아직 이 역전이 벌어지지 않은 현시대다. 그러나 승천하신 주님이 모든 공간 속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을 부어주신다. 독재군주들은 왜 민중에게 성경이 배포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독재군주들이 으름장을 놓을 수 있는 최대의 무기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허나 성경은 예수를 통해 죽음이 패배했고, 삶이 삶 되었다는 소식을 선언하니, 사람의 지배를 균열내고, 모든 계급을 무너뜨린다. 죽음을 이기시는 절대군주 앞에, 모든 인간은 참된 민주제를 회복한다.
이 날이 오기까지 그 하나님께서 팔로 막아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속알이다. 우리 눈에 정의가 짓밟히고, 패배하는 듯이 보여도, 부활을 사는 이들의 속알을 지키시니 정의는 죽지 않는다. 다만 기다리고 있다. 사랑과 정의가 결국에는 이길 것이다. 이것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의 몸으로 살아내는 현재적 부활이, 우리의 생활이다. 우리 속에서 그 능력의 팔로 지시킨 신실함이, 우리의 몸을 통해셔 삶이 되고, 이것이 현재적 부활이며, 이 부활은 죽음을 뚫고 미래의 소망에 이른다.
그 미래의 소망을 상상해보라. 모든 죽음이 패배하고, 삶이 삶되는 순간을 소망해보라. 나는 가슴이 뛴다. 죽었던 이들이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돌아온다. 나는 뛰며 기뻐하며, 두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어서 오라고, 어서 손 잡고 안아보자고 소리칠 것이다! 그 날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 또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삶이 삶되록 하겠다. 이것이 나의 신실함이니, 이 신실함을 지키시는 이가 모든 산 자의 아버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