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이야기를 해봅시다. 우리는 지난 주에 성막에 들어가는 제물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제물은 성소를 지나 지성소를 관통합니다. 제물에게는 걸림이 없습니다. 막힘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겉옷을 길가에 깔아놓고 환영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겉옷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고, 가축들과 함께 야영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겉옷은 외투이자 이불이었습니다. 우리는 의식주가 중요하다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겉옷은 '의(衣)'이기도 하고, '주(宙)'이기도 합니다. 바디메오라는 거지가 있었는데, 그 거지는 자기 겉옷을 깔아놓고 동냥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겉옷이 밥벌이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나 중요한 겉옷을 벗어다가 길가에 깔아 놓고는, 예수님 오심을 환영했습니다. 정말 열렬히 환영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나무인 종려나무 잎도 떼다가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라는 말은 "구하오니, 하나님, 구해주세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우리나라 일제강점기처럼,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는데, 이 사람들은 이 로마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을 믿고서 거기서 겉옷도 벗고, 종려나무도 흔들고, 호산나 외치고 했던 것입니다.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지금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이 이 소식을 들으면 좋아할까요, 안 좋아할까요? 자기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사람들이 "와 우리를 구해줄 왕이 오셨다. 구하오니 구해주세요, 구하오니 구해주세요!" 이렇게 하고 있으면 지금 왕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좋아하겠습니까?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예수와 사람들을 째려보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자리를 빼앗길까봐 예수를 없애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해주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힘으로 어떤 사람들을 무찔러서 이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기는 방식은 다른 방식입니다. 바로 자신이 제물 되어 적들을 친구로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을 ‘십자가의 말숨’라고 부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용서를 위해서 내가 제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치 성막으로 들어가는 제물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백마를 타고 칼을 휘두르며 오신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짐을 져보지 않은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방식을 싫어합니다. 자신이 제물 되어서 적을 친구로 만드는 방식을 싫어합니다. 적에게는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무관심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망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예수님을 이렇게 뜨겁게 환영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스포츠 경기마냥, 상대방이 망해야만 우리가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도 이기고, 우리도 이기는 방식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도 살게 하고, 로마도 살게 한다면, 저들은 예수님을 미워할 것입니다. 저 종려나무를 들었던 손으로 예수를 손가락질 하고 심지어 죽이라고 소리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째려보던 자칭 왕들과 손잡고, 예수를 죽이자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제물 되어 적을 친구로 만드는 예수님의 방법이 말입니다. 이 방법이 싫어서  예수를 또 다시 죽이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에 대한 말숨이 멸망을 자초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보같은 것이지만, 

구원 받고 있는 우리에게는 하나님 (주시는) 힘입니다.


  우리는 오늘 '호산나, 호산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구하오니, 우리를 어려움에서 구해주세요!' 이렇게 노래 불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해주시는 방식은, 스스로 제물 되어 죽는 방식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왜 그가 죽으셨는지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왕들은 적을 무찌르지만, 하나님은 적인 우리들을 무찌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죽이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식, ‘십자가의 말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방식은 하나님의 방식이요, 그 방식은 죽이는 방식이 아니라, 죽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그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목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적으로 삼던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죽을 시간입니다. 내 뜻 아니라, 하나님 뜻을 따라, 전체를 돌아볼 시간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프고, 힘겨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어려움에서 구하시는 방식입니다.


  여러분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라 제물이 되시겠습니까? 제물이 된다는 것은, 삐지지 않는 것입니다.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제 뜻을 고집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물은 절대 삐치거나, 고집부리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죄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우리는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제물이 되어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주면, 그것으로 끝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그렇게 하실 리 없습니다. 제물은 다시금, 반드시, 살아납니다. 하나님 뜻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제물에게, 하나님은 더 큰 생명으로 돌려주십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