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만들라고 명하신 나무상자. 그 나무상자는 금으로 칠해져있고, 그 속에는 십계명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다고 전해진다.(최근 미국 고고학자에 의해 언약궤가 발견되었다는 말도 있고, 에디오피아 교회에 있다는 설도 있지만, 이젠 언약궤가 실제로 있든 없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인지는 아래의 내용을 보시라)
나는 의미를 찾는 길잃은 별. 나는 그 언약궤 속에 있는 세 가지 물품의 의미가 궁금했다. 나에게 길을 주리라는 짐작을 가지고 있었으나, 뚜렷한 것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자고 깨기를 반복하며 며칠이 지났다. 나는 믿는다. 오늘날까지 글자가 전해진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글자들은 언제나 사람의 해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사람만이 생각으로 글자를 녹여낼 수 있고, 이 의식의 연금술을 통해 보이지 않는 차원의 증거를 만날 수 있다고 말이다. 찾아본 사람만이 안다. 그 증거는 내 속을 뚫고 세계를 관통하며 우주의 처음에 닿고 끝으로 다시 날아간다. 길잃은 별은 마침내 길을 찾아, 함께 길을 발견한 이들과 은하수를 이룬다. 의미의 흐름을 이룬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모세와 아론이 앞장 서고, 그 뒤에 수백만의 이스라엘 민족이 그 뒤를 따른지도 30년이 넘었을 때다. '고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과 그를 따르는 레위인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민수기 16:3, 13,14
“당신들은 너무 지나치오. 모든 씨알이 다 거룩하오. 거룩하지 않은 씨알은 없소.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과도 함께 계시오. 그런데 당신들은 왜 스스로를 높여서 모든 씨알 위에 있으려 하오?
...우리는 (당신들을 따라) 가지 않겠소!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이는 것으로도 부족하단 말이오? 이제 당신은 우리 위에 군주처럼 군림하기까지 할 셈이오? 더욱이 당신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지도 못했소. 밭과 포도원도 우리에게 유산으로 주지 못하였소. 당신은 이 사람들의 눈을 뺄 작정이오? 우리는 못 가오."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선 이들의 주장은 합리적이다. 그들의 첫번째 주장은 왜 민주적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모든 씨알에게 주권(거룩)이 있는데도, 특정 인물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주장은 현 지도자들의 능력부족이다. 지금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끄는 이 두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안겨주지 못했다. 그러니 다른 씨알로 지도층이 교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고라는 똑똑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고라와 함께 반역한 이들을 처단하신다. 모세는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충격적인 죽음으로 이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 했다. 그의 말대로 고라 일당들은 땅에 집어 삼켜지고, 하늘 불에 그을려지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아론이 서서 중재하기 전까지 무려 15,000명이 죽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민수기 17장에, 모든 지파들의 지팡이 중에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나게 되고, 아론의 권위는 신으로부터 임명된 권위임이 선언된다. 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언약궤 안에 있다.
-첫 장막, 이중구조의 상징
그리고 이 언약궤는 성막 안에 놓여 있다.
이 성막에 대한 히브리서의 구절을 한 참 들여다 보았다.
히브리서 9:9
이 장막은 현 시대를 상징합니다.
그 장막 제의를 따라 예물과 제사를 드리지만,
그것이 의식 집례자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 장막이 바로 언약궤를 두고 있던 출애굽의 장막이다. 성막이라 부른다. 거룩한 하나님의 텐트. 그런데 이 장막이 현 시대를 상징한다니. 정말 그러한가? 그래서 희랍어 사전을 뒤져가며 원문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첫 장막은 상징입니다.
예물과 제사 아래 있던 이제까지의 시절에 대한.
현시대는 이제 까지의 시대다. 여기서 '까지'라는 말은 '이제'를 집어삼키지 못한다. 내가 이제라고 하는 순간, 나는 예물과 제사 아래 있던 시절을 벗어난다.
이 첫 장막의 특징은 이중구조다. 첫 장막 안에는 거룩한 곳과 지극히 거룩한 곳이 분리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있다. 거룩한 곳에는 제사장들이 늘 출입하며 거룩한 곳을 관리한다. 그러나 지극히 거룩한 곳에는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것도 제물의 피를 가지고서만. 이 피는 자신과 씨알의 '무지'에 대한 속죄의 피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첫 장막은 상징이기 때문이다. 첫 장막은 영화 예고편이다. 영화를 소개해주는 역할을 할 뿐, 정작 영화를 보고나면 다시 예고편을 볼 일이 없다. 첫 장막은 버스 알림판이다. 버스가 올 때까지만 가치가 있을 뿐, 진짜 버스를 만나면 버스 알림판은 그 역할을 다한다. 첫 장막은 모델 하우스다. 진짜 집이 어떤지 둘러보는데 목적이 있지, 모델 하우스에서 사는 사람이 어디있나? 첫 장막은 그런 역할이다. 그러니 완전하게 하지 못한다. 예고편이자, 버스 알림판이자, 모델 하우스이기 때문에 진짜가 아니다. 진짜가 무엇이냐? 양심을 온전케 하는 게 진짜다. 그런데 첫 장막은 그저 진짜를 소개할 뿐이요, 양심을 온전케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제 진짜가 나타났으니 그 기능을 다 했다. 그러니 에디오피아에 있든, 이스라엘에 있든 상관없다.
이제 우리는 이 낡은 상징이 보여주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이미 현시대가 이중 구조다. 하위 문화가 있고, 고급 문화가 있으나, 그 어떤 문화도 양심을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 이 세상 자체가 거대한 상징이다.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너희는 안된다고 말한다. 돈으로 들어갈 것 같아서 돈에 대해 이중구조다. 생김새로 들어갈 것 같아서 생김새로 이중구조다. 명예로 들어갈 것 같아서 명예에 대해 이중구조고, 힘으로 들어갈 것 같아서 힘에 대해 이중구조다. 그래서 그 어떤 것으로도 양심을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
-양심, 함께 들어다보는 내 속,
성도(聖道), 양심을 온전케 하는 길
양심에 대한 얘기도 해보자. 양심은 '쉰.에이도스'라는 단어를 쓴다. '쉰'은 '함께'요, '에이도스'는 '보다'다. 그럼 '쉰.에이도스'는 함께 본다는 말이다. 함께 본다는 말은 관(觀)을 공유하고, 지식을 공유한다는 뜻이 있다. 그리고 '의식, 양심'이라는 뜻이 여기서 파생되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심이란, 나 혼자 들여다 보는 마음이 아니다. 함께 들여다 보는 마음이 양심이다. 그럼 누구와 함께 들여다 보느냐? 보이지 않는 존재다. 없이 계신 이다. 나 홀로 있을 때에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한 분이다. 그 분과 함께 내 속을 들여다 보는 것이 양심이다. 그런데 예고편 가지고는 이 양심을 이룰 수가 없다. 다시 말해 현시대로는 이 양심을 이룰 수 없다. 양심을 이룬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신과 함께 내 속을 들여다보고, 내 속을 고친다는 말이다. 허나 신과 단절되어 있는 이중구조 안에서는 할 수 없다. 의례나 의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내 속이 고쳐지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속을 고칠 수 없는 이러한 상징이 오늘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히브리서 9:8
거룩한 숨님이 이것을 뚜렷하게 드러내십니다.
이 이중구조의 성막 제도가 서 있는 때에는.
아직 거룩한 길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길은 어떤 길인가?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가는 길이다. 거룩한 곳과 지극히 거룩한 곳 사이에 있는 휘장을 찢고, 둘이 하나되는 길이다. 그 길은 어디에 있나? 내 속에 있다. 하나님과 함께 들여다보는 내 속에 길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관(觀)을 공유한다. 내 의식에 그가 참여한다. 내 의식은 그에게 참여한다. 하나님과 함께 들여다보니, 내 속이 완전해질 수 있다. 양심을 이루는 길이 성도다.
고라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다. 고라의 말대로 모든 씨알이 거룩하다. 그리고 그 씨알들이 모두 무능력에서 벗어나 가나안을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가나안을 차지하는 능력이란 곧 하나님이다. 더이상 모세와 아론을 중심으로 한 이중구조와 방랑 공동체가 아닌 것이다. 다만 고라가 틀렸던 것이 있다. 이 하나가 틀리면 모든 것이 틀린 것이다. 목숨보다도 귀한 하나다. 그것은 바로 '때'다.
-새 창조의 그 때에
고라의 말이 들어 맞는다. 그러나 고라의 시절은 아니다. 예수의 시절이다.
히브리서 9:11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좋이 이뤄질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통해서 곁에 오시었습니다.
그 장막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이 창조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대제사장은 아르케다. 새로운 일의 시작이다. 주관자다. 그가 이중구조의 휘장을 찢었다. 평생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도 모자라서, 그의 죽음 역시도 이중구조를 찢는 일이었다. 이중구조를 무너뜨리는 일은 하나님이 엄히 금하신 일이지만, 예수는 하나님을 이겼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다. 마치 하나님을 설득하는 아브라함처럼, 예수는 하나님을 이겼고, 하나님의 뜻을 이뤘다. 아버지와 속 마음으로 연결된 그는 진정으로 참 아들이다.
그가 이제 모델하우스가 아니라 진짜 집을 가져온다. 그런데 그 집은 핸드-메이드도 아니고, 게다가 "이 창조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냐, 신이 빚으신 것이요, 새로운 창조에 속한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자꾸 꺼내도 하나도 지겹지 않다. 내 속을 고치고, 너와 나를 새롭게 하며, 세상을 바르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이 말을 숨이 멎을 때까지 외치련다. 부활! 하나님께서 새로이 창조의 일을 시작하셨다. 그 첫 사람이 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첫 사람을 통해서, 모든 이중 구조는 깨지고, 사람은 신과 함께 제 속을 들여다봄으로, 제 몸을 이 위대한 의식 아래 굴복시킨다. 제 속에서부터 창조의 완성에 이르는 거룩한 길이 놓이고, 양심을 이루려는 모든 이들이 바로 이 첫 사람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고라야! 바로 이 때다! 네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질 때가 바로 이 때다! 모든 씨알이 거룩해지고, 그 속에 '수'가 있어 그 힘으로 양심을 완성할 바로 그 때가 이 때다! 이 밤에 나를 전율하게 하고, 나를 흥분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의 양심이 이뤄질 것이다. 그 분과 함께 우리 속을 들여다 봄으로, 하나하나 인간의 바르지 못함을 곧게 세워나갈 것이다. 예수가 이겼으므로, 내가 지성소에 들어간다.
지성소에 들어가니, 내 눈 앞에 언약궤가 있다. 그 언약궤를 열면 죽는다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모든 금기를 깨고 그 언약궤를 열어본다. 그 속에는 '법'과 '밥'과 직접 임명하신 '권위'가 들어있다. 내가 지켜야 할 인격, 내가 먹어야 할 인격, 내가 따라야 할 인격이 한 자리에 있다. 나는 이제 이게 무슨 그림인 줄 알겠다. 내가 지금 마주 하고 있는 인격. 언약궤시다. 그래, 1년에 한 번, 법궤 뚜껑에 피가 뿌려지면 모든 씨알의 죄가 용서되는데, 더이상 언약궤에 피를 뿌릴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그이 자신이 피 흘리고 있는 언약궤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의미를 찾은 별. 내가 돌고 있는 궤도가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이 궤도는 피가 뿌려진 언약궤 뚜껑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양심의 완성으로 그 여정이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