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라는 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어릴적 들어보지 못했던 말을, 저는 성인이 되어서 자주 듣고 있습니다. 이런 말은 대개, 누군가가 전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혹은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 기대를 해봐야 실망할 것이 뻔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또는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을 써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독인에게 '말'은 숨처럼 중요합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우리 몸이 살듯, 바른 말을 듣고 바른 말을 해야 우리의 정신이 삽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쓰는 말들의 면면을 점검해보고, 참되게 말하고자 자신의 언어습관을 날마다 갈고 닦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거룩할 성'자를 보아도 분명합니다. 위로는 귀와 입이 있고, 아래로는 임금 왕 자가 있습니다. 즉 거룩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귀와 입입니다. 바른 말을 잘 들어서, 그것을 잘 말하는 것이 거룩한 이의 호흡입니다. 이런 사람이 왕과 같은 사람입니다. 왕과 같다고 해서, 다른 사람위에 군림하고 착취하고 올라서려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을 때 그 왕이란 섬기는 사람이요, 섬김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잘 듣고 잘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상 속에서 우리가 듣고 하는 말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언어가 우리의 정신과 교통합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생각하고 판단함으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파고들어 갑니다. 그리고 그 일상 생활 속에서 말을 하게 되고, 우리가 듣고 한 말들은 다시 우리의 정신으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삶입니다. 자꾸 말해도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내가 어떤 말을 듣고 말하느냐가, 곧 나의 정신이요, 나의 일상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생명인 것입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는 말을 사람에게 쓰는 것은 참으로 그릇됩니다. 그 사람에게 좋은 것을 기대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지레 판단하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기 싫어서, 애써 기대심마저 버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과 마음먹음이 낳는 것은 불합리한 상황과, 올바르지 않은 사람에 대한 관심과 도전이 아니라, 포기와 단절입니다. 오늘날 "신경을 끈다"는 말이 딱 이 말 같습니다. 우리는 복잡하고 힘들 것 같은 일에 신경을 끄고, 나에게 익숙하고 좋아 보이는 일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복잡하고 문제가 될 것 같은 일이 오히려 우리가 더욱 신경써서 이겨나가야 할 일입니다. 상처받기 싫어서 그러한 일에 신경을 끄기 시작하면, 인간관계는 좁아지고, 화해와 용서는 경험하지 못할 일이 되며, 그 인생은 점점 도전과 용기와는 무관해질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전혀 기독인 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사람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어떠한 처참한 상황(심지어 죽음일지라도)도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이 기독인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기대'는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에 보니 '어떤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라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미래를 바라고 기다리십니까? 동물과 달리 사람은 항상 미래를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뤄질 일에 대해서 미리 따져봅니다. 그래서 걱정도 합니다. 걱정한다는 것은, 사람답다는 뜻입니다. 미래를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걱정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는 사람에게, 걱정하지 말라고만 말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점쟁이만도 못합니다. 좌판을 깔아놓은 점쟁이들은 사람을 위로하며 돈을 법니다. 그들이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미래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미래를 알려주어, 그것으로 위로받게 합니다. 그러나 이 미래를 말하여 사람을 기대하게하고, 위로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을 받아, 장래 일을 말하고, 그것을 소망하는 바로 우리의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기대를 포기한다'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헛된 기대를 버릴 때 쓰는 말일 것이요, 헛된 기대를 버리는 것은 참된 기대가 나타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도 기대를 버리고 싶다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삶은 작은 기대, 큰 기대, 온통 우리의 바람과 기대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버리려는 미련한 자는 누구입니까? 미래 없이는 과거도 현재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각자의 미래상을 통해서 현재와 과거를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대를 버린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다만 잠시 눈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간 숱하게 실망해왔다는 것. 우리가 기대하는 일마다 족족 우리의 생각을 빗나갔다는 것. 그러나 사람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온 우주에 대해서 끝까지 기대를 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설령 당장은 나의 상황이, 나의 사람이 걱정스럽게 비춰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기대는 우주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대의 토대는 만유에 충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작은 푸른 별을 가득 채우신 그 하나님이, 선하기 때문에, 우리는 옳음에 대해서, 정의에 대해서, 바름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온전함에 대해서, 거룩함에 대해서 포기를 딛고 줄기차게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 때문에 기대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용서가 그러한 것입니다. 저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저들이 알게 된다면 올바로 행동할 것을 기대하는 말이요, 용서는 그 사람이 온전하게 될 것을 참으로 기대할 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예수는 참으로 효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는 아빠 
하나님 한 분을 단단히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선하시기에, 결국은 선이 승리할 것이라 믿었고, 이것은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빼앗기는 순간에도 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믿음이란 기대였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기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악을 뒤집을 것이며, 그는 강하시기에 못뒤집을 악이 없을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와 같은 기대를 갖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기대를 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기대가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이길 것이고, 관계는 회복될 것입니다. 세계는 평화를 이룰 것이며, 모두가 무기를 녹여서 땅을 일굴 쟁기를 만들고, 아픔과 눈물은 모두 옛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모든 사람의 입과 무릎으로 인정될 것입니다. 

  허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올바른 것을 기대한다면, 그 기대에 내 몸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몸으로 참여하지 않는 기대는 참된 기대가 아닙니다. 로또에 당첨될 것이 분명한데, 로또 복권을 안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서울대에 원서만 넣으면 붙여준다는데 원서를 안쓸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일 로또도 안사고, 서울대도 안간다면, 그것은 기대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더 큰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좋은 것을 기대하면 할수록, 자기자신을 온통 그 기대에 던져버리지 않겠습니까? 기대한다고 말하면서, 그 기대에 몸을 던지지 않는 것이 오늘날 기독인이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입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책임져 준다고 말하는 것까지 우리는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기대에 우리가 온전히 참여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걱정은 우리의 군것질 거리가 되고, 우리의 참된 기대는 나의 위장이 됩니다. 이 거룩한 위장은 모든 걱정을 온통 씹어먹어 거룩한 것으로 소화시켜 버립니다. 부에 처하든, 빈에 처하든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되는 몸을 건강하게 할 뿐입니다. 바울은 딱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걱정할 만한 일들만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는 걱정을 버린게 아닙니다. 걱정보다 더 큰 기대로 걱정을 압살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 몸으로 그 기대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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