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하나, 둘, 셋에 대해서 배웁니다. 이 하나, 둘, 셋만 잘 알고 있으면, 세상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1. 

  여러분, 하나가 무엇이에요? 우리가 그리워 하는 하나님이 바로 참된 하나이십니다. 그 분은 어디 계세요?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은 어디에요? 바로 여기입니다. 지금 여기서 그 한 분을 그리워합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어찌 그리워할까요? 고개를 들어 위를 봐야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도행전 1:10, 11
(예수께서)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말하길,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는 땅에서 하늘로 가신 것처럼 하늘에서 땅으로 오실테니 우리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위가 아니라 옆을 봅니다. 거기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를 정말 그리워한다면, 위가 아니라 옆을 봐야 합니다. 사람과 상관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은 위가 아닙니다. 빈 데 입니다. 빈 데 안에 너와 내가 있고, 하나님도 계십니다.

2. 

  땅에는 사람과 사람이 있어 둘입니다. 너와 내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세상에 둘이 가득 있습니다. 너와 나의 둘, 잘 생긴 것과 못 생긴 것, 큰 것과 작은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많은 것과 적은 것. 힘 센 것과 힘 약한 것. 요새는 이 둘을 표현하는데에 이 말만한 것이 없습니다. 갑과 을.  
  이 둘이 없을 수는 없는데, 이 둘이 지금 서로 미워하고, 싫어하고,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밀어내고, 벽을 세웁니다. 서로를 무너뜨리려고 욕합니다. 그러나 그러다가는 큰 일 납니다.

갈라디아서 5:15
만일 서로 물고 뜯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우리는 한 번 이렇게 큰 일이 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6.25입니다. 같은 동포, 같은 민족인데, 생각이 하나되지 못하고, 둘로 나뉘었습니다. 생각이 둘로 나뉜 것을 참지 못하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죽어라고 총질을 해댔습니다. 옆에 친구들은 이 싸움을 말리기는 커녕, 서로 편들면서 뒤에서 돈을 대고, 이 싸움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이 나라가 반으로 두동강 나버리지 않았습니까? 이 나라의 이름은 하나라서 '한국'인데, 한이 둘로 찢어졌습니다. 

  나라 꼴이 이러하니, 나라 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도 둘로 나뉘어서 서로 물고 뜯습니다. 학교에서도 둘로 나뉘어서 서로 물고 뜯습니다. 가정에서도 둘로 나뉘어서 서로 물로 뜯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둘로 나뉘어서 서로 물고 뜯기도 합니다. 그럼 둘 다 망합니다. 

  예전에 학교다닐 적에, 학교 선생님이 이런 노래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우다 한 마리가 물 위에 떠오르고
그 놈 살이 썩어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죠

  붕어끼리 싸우면, 연못은 썩습니다. 흔히들 어른들이 세상은 썩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정말 썩었다면,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그 세상 속에 있는 붕어들이 싸우기 때문입니다. 

  주먹을 쥐고, 다른 친구에게 휘둘러야 싸우는 것입니까? 그 친구가 잘 되길 바라지 않는다면 그게 싸우는 것입니다. 남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없는 마음은 언제 싸울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자기 속을 들여다보고, 다른 친구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날마다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살피고 있습니까? 내 통장에 돈이 얼마나 들어있는지가 아니라, 내가 어제 먹은 아이템이 잘 있는지가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잘 있는지 아닌지를 날마다 살펴야 합니다.

3.

  이런 얘기를 자꾸하니까, 오해하는 사람들도 생깁니다. '그럼 둘이면 다 나쁜 것이냐?' 이런 소리 합니다. 그러나 둘이 있는 것이 나쁜 게 아닙니다. 다리도 두 개 아닙니까? 다리가 두 개인게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 나간 사람일 것입니다. 한 쪽 다리가 성하지 못하면 절름발이요, 두 쪽 다 고장난 사람은 앉은뱅이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경>에 여러명 등장합니다. 

  성전에 아름다운 문이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문 옆에 앉아서 구걸하던 거지 한 명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두 쪽 다리를 못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습니다. 그가 불쌍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리는 두 쪽다 못쓰게 되었으나, 그나마 쓸 수 있는 두 쪽 손을 그 두 사람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말했습니다. "나는 돈은 없소만, 내가 가진 것을 주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서 그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습니다. 그 다음 구절을 읽으면, 왜 다리가 두 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7,8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왜 다리는 두 쪽인 것입니까? 함께 서기 위함입니다. 두 쪽 다리가 함께 서면, 걸을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뛸 수도 있고, 그렇게 하나님을 찬미할 수도 있습니다. 다리가 두 쪽인 이유는 함께 서서 하나를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은 온통 둘이라 했습니다. 그 둘은 나와 너의 둘입니다. 나는 한 쪽 다리입니다. 그럼 너는 무엇입니까? 다른 한 쪽 다리입니다. 그럼 그 너와 내가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함께 섯! 우리말 '셋'이란 말은 선다는 말입니다. 
  우리 아까 들은 이야기에서는 걸을 수 없는 두 다리가 함께 섰습니다. 어찌 섰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섰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함께 설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앉은뱅이의 주저앉은 다리와 진배없습니다. 함께 서본 일이 없는 불쌍한 다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름으로 함께 섭니다. 너와 내가 싸워야 할 사람이 아니라, 함께 서야 할 두 다리임을 알고서, 이 예수님의 몸이 하나되어 함께 일어섭니다. 모든 죽은 자와 함께 일어나시는 예수의 이름은, 능히 모든 주저앉은 다리들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이걸 믿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제 일어설 때입니다.

  정리해봅시다. 하나는 우리가 그리워하는 하나님입니다. 둘은 너와 나입니다. 싸워야 할 너와 나가 아니라, 우리는 다리들입니다. 어떤 다리들입니까? 섯! 함께 서야 할 다리들입니다. 둘이 함께 서니 하나와 가까워집니다. 함께 선 이들이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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