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두 명의 요한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고, 다른 요한이 바로 이 요한입니다. 세례를 주는 요한이라 '세례요한'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말하자면, '영화 예고편'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잘 만들어진 예고를 보면, 그 영화를 무척 보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전에, 이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이 나타나시기까지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영화 예고편 같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이야기를 살펴보면 참으로 끔찍합니다. 세례요한이 있던 시절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사람은 헤롯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세례요한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것을 잘 들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자기 잘못을 지적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찔리면서도,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들으면 웬지 마음 한 구석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서 자꾸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헤롯이 동생의 아내와 결혼을 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의 자리에 앉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부적절한 혼인을 한 것은 정말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례요한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설교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 삼는 것이 이스라엘의 왕의 모습인가!"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롯은 세례요한을 잡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헤롯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헤롯의 부인인 헤로디아라는 여자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곧이 곧대로 옳은 말만 하는 세례요한이 눈엣가시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어떻게 하면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는데, 마침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 있으니 잘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이 나라의 정치를 담당하는 대신들과 함께 모여 잔치를 열었을 때의 일입니다. 헤로디아는 모두가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자리에 자기 딸을 들여보내 춤을 추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춤을 보고 기뻐하고, 술이 거나하게 취한 헤롯도 기분이 좋아져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아, 춤을 잘 추어 우리를 기쁘게 하다니 기특하도다! 

  소원을 말해보라! 네가 말하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노라!"


  이 소리를 듣고 딸이 제 어미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헤로디아가 딸에게 끔찍한 소리를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해!" 그래서 곧장 그 딸이 다시 헤롯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세례요한의 머리를 주세요!" 헤롯왕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방금 궁정 대신들 앞에서 딸에게 무엇이든지 주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의 자존심을 구길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잘못도 없는 세례요한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말씀을 듣기는 해도 실천할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세례요한을 참수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머리를 그릇에 담아다가 딸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예고편이었던 세례요한은 이렇게 죽었습니다.


2. 


  이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 하나님이 세례요한을 살려주시지, 왜 이런 위기 속에서 세례요한이 부당하게 죽게 하셨을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어려운 지점을 넘어서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어린이도, 어른들도 듣고, 깨닫고, 살아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헤롯처럼 살더라도 내가 살아남는게 옳은 것입니까? 아니면 죽더라도 세례요한처럼 올바르게 사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지금 당장 살아있느냐 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어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이렇게 묻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럼 세례요한은 죽었으니까 망한 것입니까? 헤롯은 살았으니까 성공한 것입니까? 결단코 그럴리 없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죽었느냐, 살았느냐 생존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찌 살아왔느냐 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헤롯처럼 살고 싶습니까? 세례요한처럼 살고 싶습니까? 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헤롯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말씀을 듣기는 잘 들어도 실천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듣기는 잘 들어도 실천할 줄 모르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습니다. 동생 부인과 결혼을 하고, 심지어 사람을 살해하기까지 하는 이 사람은, 세례요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찔려봐야 무엇 합니까? 결국 자기 자존심 하나 굽히지 못해서, 살아있는 사람을 살해하는 끔찍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반면 세례요한은 올바른 목소리를 내다 죽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구걸한 적이 없습니다. 왜 입니까? 그는 목숨 말고 또 다른 숨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숨입니다. 


로마서 8:15

하나님의 숨으로 인도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주기도문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그 분을 아빠라 부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아빠입니까? 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사람은 그 숨으로 숨 쉬어, 올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 사람이 그렇게 올바르게 살다가 죽었다고 칩시다. 그럼 그 사람의 인생은 끝난 것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을 죽이고서 또다시 번민에 빠져있는 헤롯에게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헤롯이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났구나!"


  헤롯은 예수를 세례요한이라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 아닙니다. 옳은 뜻을 위해서 죽게 된 사람들은 모두 예수와 같은 숨을 쉬던 사람입니다. 무슨 숨입니까? 바로 말숨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숨으로 숨 쉬며,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을 따라 살았습니다. 같은 숨을 쉬는 사람이 땅구슬 위에서 숨을 이어가니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쉬었던 숨이 여전히 땅에 있고, 그 숨은 시들지 않습니다. 주의 말숨은 영원합니다. 게다가 말숨을 따라 올바르게 산 사람 역시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어도 다시 삽니다. 죽음을 이겨냅니다. 이 확실한 진리를 누구를 보면 알 수 있습니까? 예수! 숨 쉬는 아들! 그가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습니까? 죽어버린 세례요한이 안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우리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과 다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자랑스러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옳은 사람을 죽이려는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할 것입니다. 목숨을 지키고 있는 것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목숨보다 더 큰 숨으로 숨 쉬고자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이 죽고마는 몸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처럼 옳은 일에 목숨 내어놓아 죽임당했던 사람들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하늘에 품으셨고, 그들은 하늘에서 오늘도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10

...또 여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숨쉬는 말숨으로 사탄을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니 어찌 죽음이 끝이라 하겠습니까? 어찌 죽음이 두려워, 말숨대로 실천하기를 꺼려하겠습니까? 기꺼이 기쁘게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3.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사람은 말숨을 따라 숨 쉬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바로 세례요한같은 사람입니다. 말숨을 따라 숨쉰다는 것은, 잘못된 것 앞에 침묵하지 않는 사람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죽어도 다시 산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라 믿는 사람은 절대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믿고 숨을 쉽시다. 설령 내가 올바른 일을 하다가 죽는다고 해도, 예수를 살아나게 했던 그 숨이, 나 역시 다시 일으킬 것을 굳게 믿자는 말입니다.


  저 우주를 보며 생각해보면, 땅구슬이 말숨으로 지어진 이래로, 단 한 번이라도 이 하늘과 땅구슬 전체에 말숨이 끊어진 적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단 한번도 끊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하늘과 땅이 말숨으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숨이 끊임없이 불어옵니다. 그 숨으로 세례요한이 숨 쉬고, 예수께서 숨을 쉬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숨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숨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이 숨을 쉬지 못하면, 우리는 헤롯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들으러 왔으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살리는 그 힘을 모르는 것입니다. 말대로 살게 하는 그 숨을 모르면 헤롯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결정적 순간에 하나님을 배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당 안에서나 밖에서나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말숨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삶을 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3:34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은 하나님의 말숨을 하니,

이는 하나님이 거룩한 숨을 끊임없이 주심이라.


요한복음 20:22

이 말숨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시며

이르시되, "거룩한 숨을 받으라!"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너희의 하늘 아빠께서 달라는 자에게 거룩한 숨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 우리 달라고 합시다. 그리고 시원하게, 그 올바르게 하는 숨으로, 우리를 곧게 하는 숨으로 숨 쉽시다. 이 길이 죽음을 돌파하는 길입니다. 세례요한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부활이었습니다. 이것은 헤롯의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와 같은 숨을 쉬었고, 세례요한이 쉬었던 그 숨을 예수도 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고 하늘로 올라가신 지금,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숨으로 숨 쉬자고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숨으로 숨 쉬고 살면,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와 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예수의 부활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우리 모두가 죽음을 이기는 날이 꼭 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우리, 말숨 주시는 하나님을 마땅히 이렇게 부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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