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교회 오후 예배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옛날 이야기 부터 시작해봅시다. 옛날에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 아브라함은 참 유명하면서도 중요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이 사람 엄청 부자입니다. 많은 재산, 가축들, 종들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흔히 복받은 사람의 전형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들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집중하고자 하는 바는 아브라함의 '잘남'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물론 이름이 '아브라함' 아니었고, '아브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말씀을 찾아볼까요? 창세기 12장 1절입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집떠나면 무슨 고생이라는 어느 cf멘트처럼, 집을 떠난 아브라함의 험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이 사람, 밥먹듯이 이사다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13번입니다. 같이 떠난 친척이랑은 땅문제 때문에 분란이 일어납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겁먹었던지,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속이기 까지 하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네. 우리는 압니다. 약속.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언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 고생길을 견뎌내고 참았다면 참았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무엇이었습니까?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네.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뭇별과 같은, 바다의 모래같은 자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15장 7,8절도 봅시다.
창 15:7,8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그리고 땅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과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 부분에서 주목해야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셨습니까? 아브라함은 수많은 자손과 땅을 받았습니까? 아니요.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본 자식이라봐야 이삭과 이스마엘이 전부입니다. 별과 같은, 바다의 모래와 같은 자손의 티끌만큼만을 눈으로 본 것입니다. 땅은 어떠합니까? 아브라함의 일생동안 단 한번도 제대로 정착해서 부락을 이루어 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 갈데아 우르를 떠난 이후 단 한번도 떠돌이가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거짓으로 약속하셨다는 것입니까? 아니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성취를 진정으로 맛보지 못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드넓은 땅도 허다한 자손도 보지 못한 나그네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지 60년이 지나도록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에는 장사지낼 묏자리 땅도 갖지 못했습니다.
허나, 이 우울한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우리네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받았습니다. 우리는 '나라에 임하옵시며 하늘에서 이룬 그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질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 나라는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어마어마한 땅과 자손을 약속받은 아브라함이 그 약속의 이뤄짐을 보지 못하고,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던 것과 너무도 유사하게, 오늘 우리도 하나님 나라라는 감히 입에 담기 황송한 그 영광중의 나라를 약속받았으나 그 나라는 아직 이 땅에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가 임했다구요? 적어도 수원역에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곳의 사람들은 엄동설한에 시린 손으로 구걸을 멈출 수 없는 형편이니까요.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그것을 기다리는 크리스챤. 우리는 아브라함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나그네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그네인 것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진정으로 갈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과 100년도 채 안되어 이 나라가 일제의 총칼에 신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말하길, 이 나라의 광복이 찾아올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미국과 소련의 몇사람 빼놓고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누군가가 1945년 8월 15일. 그 날 일제가 항복할 것을 알았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이 나라에 다시금 자유의 파도가 넘실댈것을 알고 있었다면 8월 14일이라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말한 사람은 자기가 주장하지 않아도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사람은 이 한반도에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얘기는, 조선의 광복은 뜬금없는 광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뜬금없는 광복이 일어났을 때 다양한 종류의 조선인들이 있었습니다.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동포를 해하던 나카무라 순사가 있었습니다. 한편, 조국을 등지고 멀리 미국으로 일본으로 몸을 피해 살아왔던 동네 부자들도 있었습니다. 연해주와 만주일대에서 피눈물을 삼키던 독립군들이 있었습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정말 올지 안올지 반신반의 하지만 그 광복을 기다리고 소망하던 이 땅의 민초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이 조선의 광복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었겠습니까? 광복은 내 일이 아니요, 관심없이 살았던 사람입니까? 일본 제국주의에 기대어 자신의 안위를 꾀하던 사람입니까? 밥으로 명예로 세상 권세로 어떻게든 정착해보자 민족을 팔아먹었던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들은 기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누구도 알지 못했던 뜬금없는 광복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일제에 무릎꿇지 않았던 사람일 것입니다. 힘들고 괴롭지만 견디고 견뎌냈던 사람만이 그 날 진정으로 눈물 흘릴수 있었을 것입니다. 창시개명과 징용의 압박에서 민족혼을 잃어버리지 않은 그 사람이 광복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분명, 나그네 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그 날은 이 나라의 광복과 마찬가지로 뜬금없이, 아무도 모르게 도적과 같이 임할 것입니다. 그 날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기대어 자신의 안위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의 앞잡이는 그 날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나그네일지언정,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던 그 사람. 그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처럼 희미하나,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그 날!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진정한 본향집에 안긴 탕자의 눈물입니다. 돌을 맞고 흘리던 스데반의 눈물입니다. 이 땅에서 좁은 길을 걸었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의 눈물입니다. 나그네의 눈물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13,1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러나 나그네로서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그네로 살리라 결심하고 우리의 의지를 불태우는 일을 원치 않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로서 살아가려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13절을 봅시다.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네. 주기도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시험'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예수님의 경험에서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려 하실 때, 예수님께 사탄이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께 세 가지 시험을 합니다. 첫번째 시험은 무엇이었습니까? 40일 금식하시느라 시장한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바꾸면 되지 않느냐고 사탄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두번째 시험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면 사람들이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주지 않겠느냐는 사탄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유혹을 뿌리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이 세상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 나에게 절하라. 유혹자는 그 이름처럼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시험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착'입니다. 이 땅의 나그네로 살고자 하는 사람을, 진정한 본질인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을,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즉, 나그네를 정착시키는 것이 이 세 가지 시험의 공통점입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 시험은 오늘 날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야 하는 먹는 문제 때문에,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얻을 수 있는 명예 때문에, 사탄에게 절하면 얻을 수 있는 세상 권세 때문에 우리의 발목을 잡히고 나그네로서의 삶도 저당잡힙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닌 다른 것들을 따라 갑니다.
이것이 사탄의 시험의 본질입니다. 우리를 자신의 왕국에 정착하게 하려는 사탄의 시험인 것입니다. 먹을 것으로, 명예로, 세상 영광으로 어떻게든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나그네로서의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예수쟁이들을 유혹하는 오랜 전통의 전략인 것입니다. '정착의 시험'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도처에 존재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나그네로서의 삶을 끝내라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서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파쇄하십니다. 그리고 사탄의 시험을 산산히 부수어 내는 영적 해머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나그네로서 살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딸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세가지 사탄의 시험에 대해 대답할 말씀을 가슴에 새깁시다. 그것은 이 말씀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나그네에게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보내십니다. 땅위의 들풀보다, 공중의 나는 새보다 귀한 하나님 나라의 나그네들을 주께서 귀하다 말씀하십니다.
아직 임하지 않은 그 나라. 그 나라를 기다리는 나그네. 그 나그네를 세상이 먹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그 나그네는 세상을 먹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