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악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 : 창세기 1~3장 독해

 

  제가 여러 번 질문 받았으나, 제쳐두었던 질문이 있습니다.

 

'왜 세상이 악한가요?'

 

  오늘은 이 질문 앞에서 글을 써봅니다. 어쩌면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현대인이 성경이라는 오래된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입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혼란스럽고, 부당한 일들로 가득한, 무질서하며, 눈물 흘릴 수 밖에 없는 세상을 보며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정의롭습니다. 다만 그 정의로운 질문에 답을 얻지 못해 낙담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많더라도, 그 질문만큼은 선합니다. 세상에 대한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자신이 마침내 찾았다고 생각한 답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낙담과 실망은 더 짙습니다만, 그럼에도 마음 속에 떠오르는 저 물음표는 진실합니다. 자신 안에서 모든 정의에 관한 물음을 더 이상 던지지 않기로 다짐하며, 세상은 본래 이러한 것으로 믿기로 작심하지만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언자를 닮았습니다. 

 

  왜냐하면 저 질문은 '악하지 않은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어찌되었든 세상은 본래 그렇지 않았다고. 그런데 어이없게도 기가 차게도 이렇게 악이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타락을 향한 답답한 눈물은 진실하고 정의롭습니다. 이 타락한 세상을 세상의 본래 모습으로 인정할 바에야 저는 더 울고 싶고, 더 답답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저 질문은 다른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만일 세상이 본래 악하지 않았다면, 그 악하지 않은, 좋은 세상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플라톤이라면 영혼의 기억을 상기시키라며 이데아를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플라톤과 다른 전통에 서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오래된 이야기에 귀 기울이라 조언하겠습니다. 그 오래된 이야기는 온 우주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대로 각 기능들이 잘 돌아가고 있었고,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 거주하며 쉼과 성취와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상태로부터의 변화, 거기로부터 떨어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오랜 이야기는 그 떨어짐의 원인을 신이나 세상에 돌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이전 상태라던가 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처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요청되는 기계신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인간의 선택, 세상이 이렇게 된 원인으로서 인간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창세기는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상세한 답변을 주기 위해 쓰인 논문이 아닙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대대손손 노역을 하던 노예들을 광야 한복판으로 데려왔고, 그들에게 창세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 고대 제국의 노예들이 사실 누구였는지를 말하는, 즉 출생의 비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를 객관적 원인 규명을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정체성을 위한 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의 책은 두 남녀의 책임에 집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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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계, 그리고 이 세계 내 존재인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은 명령의 형태로 주어진 인간다운 삶이었습니다.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이 땅을 가득 채우도록 명 받았고, 하나님과 함께 땅을 다스리며 동물들을 돌보는 공동 통치자로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공동 통치자이기에 인간은 NPC가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능력 또한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유와 판단에는 늘 기준이 필요하지요. ’좋음‘이 있어야 ’나쁨‘을 구분할 수 있고, ’나쁨‘을 겪고 나면 ’좋음‘의 가치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의 사람들에게는 좋음은 그저 좋음으로 남아있을 뿐, 그들은 그것의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마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으나, 정보가 없어서 모든 것을 입에 넣어보는 아기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중에는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성소인 에덴을 ‘경작하고 지키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습니다(이 ‘경작하고 지키는’이라는 말을 잘 기억해둡시다. 아담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이 다스릴 동물들을 에덴으로 이끄셨고, 아담은 그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은 아담의 이름짓기를 보러 내려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금지 조항이 있었는데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단 하나의 금지가 사유의 방향, 옳고 그름의 기준을 결정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지만, 그 판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영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 땅을 창조주와 함께 다스리는 공동 통치자의 임무에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미로슬라브 볼프라는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조는 강요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이해하지 못할 때 이 세상 속 존재 간의 관계, 특히 인간의 관계가 폭력적일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정체성을 창조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정체성의 경계는 존재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 자체가 폭력적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계는 자의적이어서 늘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다. 희소한 자원 때문에 경계가 협상의 방식을 띤다 해도 결국은 힘겨룸의 결과물이 되고 만다. 게다가 경합하는 주체 간의 힘겨룸을 중재할 궁극적 외부 존재도 없다." - <광장에 선 기독교> p.77,78

 

  궁극적 외부 존재가 결정한 경계로서 금지 명령이 있고, 이 금지 명령은 아담의 정체성을 구성합니다. 아담은 한 분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는 존재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선택이 아니었기에, 이 정체성을 얻고자 노력하거나 투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해주신 경계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인간은 듣는다는 관계 설정이 저 단 하나의 금지 명령을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저 금지 명령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뢰'를 전제했습니다. 창조주와 공동 통치자 사이의 신뢰,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인간은 그 말씀을 토대로 판단합니다. 마치 남녀가 서로 결혼을 약속했을 때, 그 두 사람 사이에 바람 피는 것이 허용되지 않듯이 말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결코 모든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기꺼이 하지 않는 일이 있기 때문에, 양 쪽의 관계가 더욱 단단히 결속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놓인 신뢰의 관계는 아담과 다른 사람의 관계로 확대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를 돕는 상대방(’돕는 배필’로 번역된)‘으로 '잇샤'(여성이라는 뜻으로 이때까지는 이름이 없었다)를 주었습니다. 아담은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의 감정을,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고백했지요. 이 두 사람은 동물들의 이름을 함께 붙이며, 에덴이라는 특별한 장소, 신과 교제하는 성소를 경작하고 지키는 일을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에덴을 산책했다(3:8)는 말은 이들과 나눈 교제가 어떤 것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에덴 여기 저기를 함께 걸으며 나누는 대화, 창조세계 전체를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한 공동 계획들. 잇쉬와 잇샤는 모든 부부가 그러하듯 벌거벗었으나 수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 안에서 삶의 직무를 가지고 성소를 경작하며 지키는 동반자였습니다.

 

-당신의 신뢰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깨뜨리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균열은 아주 일상적이지만 또한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잇샤가 하나님과의 신뢰를 깨뜨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여자에게 이 문제를 말씀하실 때,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은 문제의 결과였을 뿐, 문제의 원인은 더 깊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창세기 3:13

주 하나님이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창세기 3:17a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은 파생된 결과이지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그녀가 신뢰의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귀 기울이고, 그 결과 하나님과의 신뢰를 깨뜨린 것입니다. 하와를 유혹한 그 뱀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으나,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우리는 그것을 '우상'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뱀이 태생적으로 악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오히려 뱀을 가리켜 들짐승 중 영리하다는 긍정적인 표현만 있을 뿐, 악하거나 나쁘다는 식의 부정적인 표현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피조물이 우상이 되는 것은 사람의 선택 때문이지, 피조물 자체가 본성적으로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신뢰 속에서 판단해야 할 인간이, 신뢰 대상을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무엇이 되었든지 우상이 '됩니다'. 잇샤는 뱀에게 귀 기울이고, 잇쉬는 잇샤에게 귀 기울입니다. 즉 여자에게는 뱀이 우상이 되고, 남자에게는 여자가 우상이 되었습니다. 대상 자체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뱀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여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동반자였으니까요. 그러나 그 대상이 하나님을 대신할 때, 그래서 인간이 그 대상에게 귀 기울이느라 하나님과의 신뢰가 깨질 때, 그 대상은 그 사람에게 우상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그러니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한 그릇된 판단 근거’에 다름 아닙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잘못을 지적받고 나서야, 자신이 귀 기울였던 그 이름 없는 여성에게 “모든 생명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비로소 붙여줍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기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이 대목에서 멈추어 이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사람들의 현장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리는 엿보는 중이었죠. 만일 우리가 저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를 듣는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문제냐고 묻는다면, 악의 개념이 무엇이고, 왜 굳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에덴에 두었는지의 답변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제사장이 한 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거두어 다른 대상에게 귀 기울였고, 그로 인해 계명을 어긴 것이 문제'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에서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어떤 말이 남아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에게 귀 기울인 아담과 하와는 본성적으로 악했던 것일까요? 창세기가 인간과 세계와 같은 큰 스케일의 주제들을 다루다 보니 ‘인간’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쉽게 본성론과 결부됩니다. 흔히 성선설, 성악설이라 부르는 단순한 인간성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본성론은 창세기 독해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말과 실천 없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근거 없는 결론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만일 악한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보며 ‘역시 인간의 본성은 악해’라는 결론을 내는 것은 도움은 커녕 절망에 가깝습니다. 만일 악행을 저지른 사람에게 조금의 선한 것도 없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반성을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비인간적입니다. 어느 쪽으로든 공포스럽습니다. 인간이 성찰하는 대상은 선과 악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인간에게 반성과 성숙을 논한다면 그것은 선과 악의 차이를 세밀하게 식별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모두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인간론이었습니다. 순자는 강력한 법으로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악하게 보았던 것이고, 맹자는 왕의 권위에 맞서기 위해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선에 의지했습니다. 즉 성선설과 성악설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인간성에 관한 답이라기보단, 사상가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배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칭얼거리는 아기를 보며 ‘역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단순한 결론을 내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의 본성에는 선한 측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측면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의 본성 취급하지 않고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그리고 선택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창세기에서의 인간의 타락은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는 사람을 보며, ‘인간은 원래 악해’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성급한 일반화일 것입니다. 오히려 창세기는 저 바람을 피게 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자와 뱀 사이의 대화를 살펴보면, 잘못된 선택에는 잘못된 말이 선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와와 뱀 사이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인 말들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 부분을 전체로 왜곡시키고(창세기 3:1,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없는 내용을 추가하며(창세기 3:2,3, “만지지도 말라”)
  • 정면으로 부정하기도 했습니다(창세기 3:4,5, “결코 죽지 않으니라”)

  여자는 약속의 왜곡에 귀 기울였고, 그 결과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어기고 신뢰를 져버린 적이 있지 않나요? 그 경험을 나눠보면 우리는 이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에 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최초의 남녀에게 벌어진 일은 우리의 삶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성소에 있을 수 없는 우상숭배자들로서

  그리고 우상숭배를 저지른 두 사람은 더 이상 성소를 경작하며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소를 경작하며 지키는 것은 히브리어로 ‘코헨’이라 발음하는 직책의 업무이기도 합니다. 코헨은 성소를 돌보며 성소를 찾는 이들에게 선과 악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하나님과의 중재를 통해 생명을 얻도록 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를 “제사장”이라 번역했습니다. 제가 앞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경작하고 지키는" 이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저 두 동사는 제사장 직무를 가리키는 동사들입니다.

 

민수기 3:8, 개역개정
(제사장들은) 곧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맡아 '지키며'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막에서 '시무할지니(=경작하다)'

 

  즉 에덴에서의 타락은 다음과 같이 읽힙니다. 최초의 제사장들은 피조물을 우상으로 만들었고, 성소에서 더 이상 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조세계의 공동 통치자의 타락은 땅 전체와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고, 생명나무에 누구도 접근할 수 없기에 죽음은 그들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3:17, 새번역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주 받은 땅은 이제 인간의 수고 없이는 먹을 것을 내놓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이 '경험'은 그들에게 공감하게 했을 것입니다. 황무지를 경작하는 아담은 자신의 노동에 따른 열매에 기뻐하며,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했던 우주에 질서를 가져왔던 한 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자녀들을 출산한 하와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낳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이 경작의 수고와 출산의 고통은, 인간이 신뢰를 져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세계에 생명과 번영을 가져오려는 신의 의지는 한결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불어 신뢰를 져버린 코헨들이지만, 여전히 제사를 드리며 신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 생명나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생명나무라는 결과에 목말라 할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신뢰를 되찾아야 마땅했습니다. 신뢰를 깨뜨렸던 과거 경험에 맞서, 죽음 앞에서도 신뢰를 선택하는 것을 경험으로 배워야 했습니다. 

 

  사실 죽음은 하나님의 판결이기에, 하나님에게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당연하게 전제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한 분 하나님과의 신뢰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신뢰와 죽음 사이에서 성찰하고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타락입니다. 그런데 타락은 '유기(遺棄)'인가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가죽옷은 신이 그들을 버리기는 커녕, 그들에게 경험을 주고자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인간과 함께 창조세계를 다스린다는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고, 하나님은 이미 완성하셨습니다. 다만 인간에게만 준비가 갖춰지면 되니까요.

 

창세기 1:28~30, 새번역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시며 말씀하시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땅을 정복하라.

물고기,, 땅 짐승들을 잘 다스려라. 그리고 씨 맺는 식물을 너희와 동물들에게 먹거리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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