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바르트가 죽은지 5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그의 목소리의 울림은 여전할까? 나를 가르치려 하는 이들의 주장 앞에서차분하게 정리를 해보자.
'마태는 (누가와 달리) 예수를 사생아라고 생각했는가?'
마태복음을 마태가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더라도, 적어도 1세기 사도들의 입장이 복음서에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복음서를 읽을 이유가 없다. 복음서 기록 이전에는 예수에 관한 구전들이 있었을 것이고, 복음서 기록 이후에는 '예수'라는 주제에 관해 치밀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통으로 내려온 내용을 무겁게 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역사 비평'이라는 단어들의 차이를 근거로 한 모종의 창작 소설이 초기 교회의 논의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합당한가? 되돌려줄 질문은,
"누가복음에서는 동정녀 잉태라고 말할 때, 마태복음은 다른 입장을 가지고 기록되었을까?"
"예수라는 예민한 주제에 관해서 공의회의 논의는 믿을만한 근거가 될 수 없는가?
어리석은 해석자들은 현대의 문제를 거꾸로 텍스트에 집어넣으려고 한다. 그런데 잘 되지 않으니 복음서들을 찢어놓고 당대 역사가 아닌 다른 문맥을 끌어온다. 하나의 사건을 그리는데 봉사하지 않기 때문에(그럴 수 없다고 믿어버렸기 때문에), 복음서가 가진 증언의 기능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는다. 바르트는 말했다.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에 관한 교회의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가, 그에게로 인도하는가, 그리고 그와 일치하는가를 검증하는데 있다"
교회에서는 말 할 수 없는 것들을 또 학문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훼손하는 이야기가 유식함의 옷을 입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것을 '가르침'이라며 한 줄기 해석으로 인정하라고 한다. 허나 나는 예수는 사생아일수 있다는 것을 보증한다는 근거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얼마나 치밀한지 상관 없이 나는 그저 한 숨을 쉴 뿐이다.
요셉에게 걱정말라는 천사의 말과
천사에게 나는 남자를 모른다는 마리아의 말이
진실하다고 믿는다면, 어찌 예수라는 논쟁적인 주제에 관해서 복음서가 서로 다른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