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성경아카데미> 장학금 심사에 제출했던 설교문(22/1/23)
1. 요한계시록과 다니엘
열린성경교회 청소년 여러분,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요한계시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우리는 다니엘을 살펴보았습니다. 기억나시지요? 다니엘의 환상 속에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 구름을 타고 나아가는 “인자 같은 이”는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으셨지요. 그리고 그 인자로부터 멸망하지 않을 영원한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단 7:13,14). 여러분에게 요한계시록 이야기를 한다고 했음에도 이렇게 다니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은, 다니엘의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서 결말을 맞기 때문이에요. 다니엘에게 주어진 옛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지난 요한에게 풀어지고, 성취되며, 현실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주의 날, 밧모섬에서 있었던 특별한 사건을 소개하는 것으로 요한계시록의 본론을 시작합니다. 요한의 등 뒤에서는 나팔과 같은 소리가 들렸고, 요한은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몸을 돌렸습니다. 그때 그가 마주한 것은, 이글거리는 눈을 가지고서 흰 옷을 입은, 그리고 용광로에서 나온 것 같은 시뻘건 발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정말 기이한 모습이지요? 우리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낯설지 모르지만, 요한에게는 머리에 떠오르는 익숙한 본문 하나 있었을 거에요. 바로 다니엘 10장입니다. 다니엘에게 나타난 존재와 꼭 같은 모습으로, 예수는 나타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과 다니엘의 반응이 똑같다는 점입니다.다니엘도 그분 앞에서 쓰러지고, 마찬가지로 요한도 그분을 뵙고서 죽은 것처럼 엎드립니다(단 10:9, 계 1:17).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받은 메시지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다니엘의 마지막 장에 보면, 다니엘에게 주어진 메시지의 마무리는 이러합니다.
다니엘 12:9, 새번역
“다니엘아, 가거라. 이 말씀은 마지막이 올 때까지 은밀하게 간직되고 감추어질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3, 새번역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에게 “마지막”은 먼 미래였고, 그때까지 하나님의 이야기는 “간직되고 감추어질 것”이었지만, 이와 달리 사도 요한에게 “마지막”은 임박한 때였고, 하나님의 이야기는 이미드러나고 밝혀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편지에 걸맞은 “계시(폭로)”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계 1:1).
2. 계시를 담은 회람 편지이자 요한의 경험담으로서
이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전체 구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나무를 보기 전에 숲을 돌아보는 일은, 우리가 숲 속에서 길을 헤매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에요. 요한 당시의 기록하는 방식을 따른다면, 요한계시록의 글자들은 6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두루마리가 된다고 합니다. 게다가 띄어쓰기 하나 없이 대문자 희랍어로만 기록되어 있기에, 그 편지를 읽기 위해선 전문 낭독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 사람이 교회를 대표해서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나머지 성도들이 그 내용을 경청하는 모습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지요.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당대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답게 인사말(1:1~9)로 시작해서 끝인사(22:21)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이 사이에 놓인 요한계시록의 본론을 살펴보기 위해선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의 몸짓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요한의 등 뒤에서 나팔과 같은 소리가 들렸고, 요한은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다니엘 10장과 똑같은 모습의 예수님을 보고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엎드린 요한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이 돌보던, 오늘날 터키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그때 우리의 요한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여전히 엎드린 채 요한은 요한계시록 2,3장의 내용을 듣고 있었어요. 일곱 교회들을 향한 예수의 메시지가 끝나고 나서야 요한은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고, 그저 하늘에 문 하나가 열려있는 모습이 요한의 시야에 들어왔습니다(4:1). 그리고 그 문을 보고 있는 요한에게 좀 전에 들었던 나팔과 같은 그 목소리가 "이리로 올라오라(4:1)"고 말합니다. 이 장면이 요한계시록 4장이고, 이 4장부터 22장에 이르기까지 요한은 여러 환상을 보고, 여러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 환상과 음성을 모두 보고 듣고 난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이 내용을 회고하며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예수께서 명령하신 대로(계 1:17) 먼저 에베소 교회로 발송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그 다음 교회인 서머나 교회로, 서머나 교회는 버가모 교회로 편지를 차례로 전달하여 돌려보았습니다. 각 교회는 아마 요한계시록을 받아서 크게 낭독하고, 사본을 필사한 뒤 원본을 그 다음 교회로 보냈을 거에요.
따라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교회들이 돌려본 편지이고, 그 편지의 내용이란 요한이 직접 경험한 환상과 주님의 음성이라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용을 다루기 전에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부터 다루는 것은, 여러분이 이 책을 어려워하거나 멀리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이 책은 교회인 여러분을 위한 책입니다.
3. 교회에 관한, 교회를 위한, 교회를 향한 책
유대인은 가장 중요한 내용을 글의 한가운데 기록하는 글쓰기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우리의 요한 역시 유대인이기에 그러한 글쓰기 방식에 익숙하고, 요한계시록 역시 그 핵심이 요한계시록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길 보면, 해를 두르고 달을 밟고서 열 두 별의 관을 쓴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만삭이었는데, 머리 일곱과 뿔이 열 개 달린 붉은 용이 등장하여 이 여자의 출산을 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고, 그 아기는 용이 손 쓸 수 없도록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갑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사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이미 알고 고백하고 있어요. 이 아기는 바로 메시아 예수이십니다. 이 이야기는 메시아 예수의 성육신과 그분이 하늘에 오르신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예수께서 옛적부터 계신 분으로부터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승계받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을 포함한 창조세계 전체는 하늘에 오르신 예수의 발아래 놓였습니다. 그런데 땅에는 막 출산을 마침 여인이 남아있습니다. 그 아들의 승천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용은 여인을 추격하고, 그 여인에게 분풀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승천한 아기는 여인을 떠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늘에서 땅 전체를 통치하시기에, 여인은 광야의 보금자리로 인도되어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이 여인이 누구일까요? 이 이야기에서 우리의 자리가 바로 이 여인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돌봄과 보호의 시간, 광야에서의 시간을 "한 때 두 때 반 때", "1260일"이라 말합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접하는 “마지막, 종말”이란 삶의 보금자리가 파괴되는, 겁을 집어먹게 하는 것이지만, 정작 원출처인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마지막”이란 예수의 승천 이후를 사는 교회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패배한 용이 발악을 하는 시기이자, 사탄을 대면하고 있는 여인이 우편에 앉으신 하나님의 보호와 돌봄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이 메시지는 용에게 겁먹고 떨고 있으라고 주신 메시지가 아니에요. 오히려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를,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노래하는 복음으로서 요한계시록입니다. 이렇게 다니엘에게 주어졌던 옛이야기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바로 사도적 교회를 말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교회로서 확인하게 됩니다. 이 메시지가 메시아 예수로부터 요한을 통해 교회들에게 전해졌고, 오늘 여러분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당시 교회들은 로마 제국으로부터는 우상숭배의 압박(계 13:18)을, 유대인로부터는 거짓 교리의 속임을 받는(계 2:2) 샌드위치의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예수의 메시지가 그들에게 힘이 되었다면, 우리 역시 환란 속에서도, 같은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요한도 자신을 환란과 그 나라와 인내 속에 분투하는 교회의 동료로 자신을 소개합니다(계 1:3). 본문에 환란과 인내 사이에 놓인 ‘나라’가 보이시지요? 그냥 나라가 아니라, “그 나라”입니다. 다니엘이 말한 대로 말입니다(단 2:44).
이 땅의 푸르른 청소년 여러분, 우리는 옛이야기의 성취이자, 옛사람의 갈망이며 사도의 동료입니다. 우리가 인자의 나라, 승천하신 메시아 예수의 통치 안에 있음을 서로 축하합시다. 그리고 환란 앞에 교회로서의 인내와 분투를 보여줍시다. 지금은 “1260일”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야기 안에서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셨지요? 좋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