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도움은 어디서 올꼬?"

사무엘상 4~7장을 읽고

 

 

  (기도의 용사인 여전도회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도, 사도들도 읽었을 이야기 한 대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원래 우리의 시간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있고, 우리의 공간에서도 멀리 떨어진 이야기는 졸립기 마련이지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나'라는 마음의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와 사도들이 이 이야기를 읽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면, 우리 역시 이 이야기를 살펴볼 이유가 없었을 거에요. 허나, 여러분은 그분의 제자이니, 우리의 선생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 바로 이 이야기, 오래되어버린 이야기 앞에 서있습니다. 그러니 잘 듣고 상상해보세요)

 

A

  저 멀리 드넓은 들판이 보입니다. 들판에는 다 큰 남자들이 서로 칼과 창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4000명이 넘는 남자들은 싸움을 멈추고, 숨도 멈춘채 눈을 감고서 시끄러운 전장에서도 곤한 잠을 자는듯 누워있습니다. 격하게 싸우는 사람들 사이를 피해 이 시체들을 맛보려는 파리들이 있었고, 머리를 감싸며 이 전쟁에서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살아남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함성을 지르며, 이렇게 소리지릅니다.

 

  "다곤이 야훼를 이겼다. 다곤이 야훼를 이겼다"

 

  나라 잃은 표정으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옵니다. 이 이스라엘 진영의 이름은 얄궃게도 "에벤에셀"이라는 곳입니다. 

 

  '에벤'은 '돌'이라는 뜻이고, '에셀'은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후에 사무엘이 붙인 것인데,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에게 묘한 느낌을 줍니다. '장소의 이름은 '도움의 돌'인데, 이 장소에서 이스라엘은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처참한 패배를 당해버렸으니 말입니다.

 

B

  돌에 관하여 생각해봅시다. 돌에는 단단한 특성이 있지요. 그래서 돌은 늘 맹세와 기억의 동반자였습니다. 그 돌이 갖고 있는 단단함은, 이 돌과 함께 주어진 그 맹세가 확고하고, 또 이 돌과 함께 말하는 이야기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자신의 계명을 단단한 돌에 기록하셨고, 이스라엘도 에발산에 큰 돌을 세우고, 그 돌에 신명기 율법의 내용을 기록하고서 아멘하기도 했습니다. 돌에 기록한만큼 확고하고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 돌에 기록한, 한 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확고하고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이야기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이집트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히브리 노예들이,

  광야를 유랑했던 이 난민들이,

  사실은 창조세계 전체의 희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잊어버린 과거를 돌아보면,

 

  이들의 조상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들을 그 언약에 따라 "제사장 나라"라고 부르셨습니다.

 

  즉 모든 민족들이 바로 이 제사장 나라를 통해서 한 분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타락을 뒤집는 엄청난 계획의 중심에 바로 이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제사장 나라에게, 제사장 나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땅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도 돌이 있었습니다. 한 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열 두 개의 돌을 놓았거든요. 이들의 정체성이, 이들의 이야기가, 이들게 주어진 언약과 맹세가 돌과 함께 확고하게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이 무색하게, 이들은 광야의 타락한 조상들처럼 땅 위에 쓰러져갔고, 심지어 이 모습을 블레셋은 비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C

  다시 에벤에셀로 돌아가봅시다. 어깨가 쳐져있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갑자기 분기탱천하여 환호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방금 전까지 패배감에 젖었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이제는 마치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들처럼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저 멀리서는 흰 옷을 입은 레위들이 무언가를 어깨에 매고 오고 있네요.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의 어깨 위에는 푸른 천에 덮혀있지만, 이스라엘의 형제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 없었습니다. 푸른 천 사이로 금빛이 태양빛을 눈부시게 반사시킵니다. 그것은 '언약궤' 였습니다. 야훼의 발판이 전장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언약궤가 자신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이 소식을 들은 블레셋의 군병들은 이내 사색이 되었습니다. 전장에 나오면서도 줄곧 마음에 걸려있었던 그 소문, 이집트를 박살냈던 그 시내산의 야훼에 관한 소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이 블레셋 군병들의 공포는 우리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로 전환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이번에는 3만명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쓰러진 3만명은 블레셋 군사들이 아니라, 쓰러진 이스라엘 남자들이 3만명입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빼앗겨 버렸습니다. 언약궤를 날랐던, 엘리의 두 양아치 아들들도 함께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제사장 엘리는 98세에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제사장의 아내이자 며느리인 여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렸다"는 비참한 이름의 아들을 낳고 역시나 죽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제사장 나라의 제사장 가족이 비명횡사했고, 언약궤는 빼앗겼고, 하나님의 이름은 땅에 떨어져 블레셋의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돌들에 기록되었던 그 시내산 위대한 야훼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라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처참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고, 한 분 하나님이 모든 민족으로부터 찬양받으실 것이라는 야훼의 말은, 이제 엘리의 비둔한 몸처럼 땅에 떨어져 꺾여버린 것일까요? 그리고 왜 언약궤는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던 것인가요?

 

C'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경건한 블레셋 사람들은 전날 전투의 승리에 감사하며, 아침부터 다곤 신전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신전에 들어서자 블레셋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자신들이 숭앙하던 그 물고기의 신이 마치 강태공에게 낚인 생선마냥 땅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곤의 사제들은 생각하기를, 아무래도 이런 불길한 일이 벌어진 것은, 다곤 옆에 가져다 놓은 저 야훼의 발판 때문에 아닐까 의심스러웠지만, 혹여나 다른 사람들이 볼까 얼른 다곤 신상부터 일으켜 세웠습니다. 

 

  찜찜한 마음으로 돌아섰던 블레셋 사람들에게 또 다시 다음 날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다음 날에는 신전을 찾은 이들은 문 밖으로 삐져나온 물고기의 얼굴과 거기 달아놓은 손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다곤 신상의 머리와 팔이 부러져 문지방에 나뒹굴고 있던 것입니다. 후에 이것에 대해 어떻게든 핑계를 대야만 했던 다곤의 사제들은 문지방이 성스러워서 위대하신 다곤의 머리와 손에 적합하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문지방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추가 교리를 내놓았습니다. 그만큼 다곤에 대한 신앙은 블레셋을 응집시키는 구심점이 되는 사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제들의 바람과는 달리 박살난 다곤에 관한 소문은 삽시간에 블레셋 전역으로 퍼졌고, 블레셋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 잡혔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언약궤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피부병이 번지기 시작했는데, 이 피부병은 이집트 사람들이 야훼로 인해 고생했던 바로 그것이라는 소문이 블레셋 전체를 뒤덮었습니다.

 

  이후 블레셋 사람들의 폭탄 돌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금박을 입힌 야훼의 발판은 결국 다곤 신전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에서도 악성 피부병에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으나 그곳도 재앙을 당한 이집트처럼 되었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나 가는 곳마다 출애굽 신에 대한 두려움과 명성만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승리를 축하하기는 커녕 마음만 졸이다가 다시 야훼의 발판을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야훼의 명성과 그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꺾이기는 커녕, 더욱 드높여졌습니다. 게다가 이방인의 입술을 통해서 말입니다.

 

B'

  이렇듯 한 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진실하고 확고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단단한 돌처럼 말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해가실 것이라는 그 의지를, 이스라엘도 확인하고 블레셋도 확인했습니다. 어떠한 쪽도 이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저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승전보만이 팔레스타인 전역을 울리고 있었고, 그분의 명성과 그분의 이야기만이 남았습니다.

 

  이렇듯 그분은 자신의 이야기에 진심이시지요. 이스라엘의 실패 속에서도 그분의 이야기는 고고하게 강처럼 흘러갑니다. 즉 아브라함에서부터 이어진,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민족으로부터 뚜렷이 드러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한 번도 틀어진 적 없이 위대한 결말의 바다로 향하고 있던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 이후의 이야기를 잠깐 드리자면, 언약궤는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왔고, 제사장 나라의 무능한 제사장이었던 엘리가문은 망해버린 대신, 사무엘의 통치가 이스라엘을 이끌었습니다. 사무엘과 이스라엘은 우상들을 이스라엘 전역에서 치워버렸고,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답게 쇄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의 뒤를 이어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20여년이 지났을 때, 20여년만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다시 만났고, 전투가 다시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언약궤를 빼앗던 과거와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천둥소리로 블레셋 사람들을 겁먹게 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도우셨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약속의 땅에서 마침내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승리 이후, 사무엘은 하나님의 그 도우심이 감사해서 돌 하나를 가져와 돌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뭐라고 붙였는지 아시지요? 네, 바로 그것입니다.

 

A'

  '돌'과 '도움' 이지요. 그런데 돌과 도움의 관계는 '도움의 출처'와 '도움'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도움은 단단한 돌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언약궤와 도움'은 어떤가요? 그러나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보여주듯 언약궤가 도움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숱하게 오해를 반복해왔습니다. 긴 리스트를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십계명 돌판과 도움, 할례와 도움, 절기와 도움, 정결예식과 도움, 그리고 무엇보다 예루살렘 성전과 도움. 

 

  십계명 돌판이 있다고(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울이 잘 말하고 있듯), 할례가 있다고, 정결예식이 있다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다고 그들이 야훼의 능력을 얻었던 것이 아님을 유대 역사는 잘 보여줍니다. 도움을 주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고, 우리가 언급했던 것들은 도움을 주시는 한 분 하나님에 관한 표현일 뿐, 도움의 권능일 수 없습니다. 마치 예술작품을 갖고 있든다고 해서 그 예술가의 권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듯, 그분의 도움에 대한 아름다운 표현으로서 언약궤가 있고, 돌판이 있고, 할례가 있고, 정결예식이 있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의 예술작품에 신적인 효력이 깃들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사이비라 불러 마땅합니다(심지어 하나님도 자신의 창조세계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표현'을 '능력'으로 오해하는 우상숭배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한국교회도 저 이스라엘의 리스트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새벽기도와 도움, 주일성수와 도움, 헌금과 도움, 교회 건물과 도움, 그리고 무엇보다 목회자와 도움.

 

  만일 우리가 표현이 곧 능력을 가져오는 무언가라 믿는다면, 망가진 석조 작품을 다시 세워 능력을 복원해보려는 다곤의 사제들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 역시 도움의 원천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지요.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역시 신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신의 도움을 받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의 일부가 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여전도회 여러분, 그래서 여러분 각각은 한 분 하나님 사랑의 표현들이고, 음표들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인지'. 여러분의 각 처지에서, 여러분이 처한 어려움과 그 해결에 관해서, 여러분은 이제 제 목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셔야 합니다. 다만 오늘 기도회 속에, 우리가 우리답게 구하고자 할 때, 한 분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우심임을 확실하게 우리의 심장에 새겨놓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바라는 바라 확신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