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날씨는 따사로왔다. 오후 세 시, 손님을 만나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까페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경찰을 보며 걱정하는 내담자를 보며, '무슨 죄 지은 것 있으시냐고, 왜 경찰만 보면 겁먹으시냐'고 말하기 무섭게 두리번 거리던 경찰이 커피숖 직원처럼 나를 호명했다. 내가 실종 신고가 되어있고, 이 일대 경찰들이 출동해서 나를 찾고 있었다는 것. 가족의 동의를 받아 핸드폰 위치 추적을 했고, 그래서 이 일대에서 나를 발견했다고.
어이가 없어서 상담 중 무음으로 해두었던 전화기를 보니 부재중 통화가 수십건 찍혀있었다. 그 부재중 전화에는 아버지와 동생 전화도 있었는데, 전화를 걸어보니 두 사람 모두 인사불성이었다. 두 사람을 안심시키고 나서 사건 정황을 파악해보니,
-아버지 핸드폰에 내 이름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걸려온 전화는 10초 정도 살려달라며 우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그 목소리가 내 목소리와 정확히 똑같았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아버지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봤으나 연결이 되지 않음.
-마침 도착했던 대출광고 문자를 보고 겁이 남(납치, 돈 요구 등의 상상)
-아버지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고, 동생이 경찰서에 전화
-경찰들 출동
이렇게 된 것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안정을 되찾고 색소폰 연습하러 가셨고, 급하게 수원으로 오려던 동생도 차를 돌렸다. 나도 집에 와서 아버지 전화기를 열어보니, 아버지께 걸려온 전화는 내 전화번호를 포함하고 있는 006으로 시작된 국제전화였다(번호만 포함하고 있으면, 안드로이드든 아이폰이든 주소록에 저장된 이름으로 인식한다). 얼마 전에 봤던 유튜브 영상 내용이 떠올랐다. 이게 나에게 벌어질 줄은 몰랐지만.
아쉬운 것은 경찰의 대처였는데,
1) 아들이 납치된 것 같다는 신고를 받았을 때는, 일단 발신 번호가 무엇이었는지부터 파악했어야 했다. 동네 방네 나를 찾아서 어쩌겠다는건가? 발신 번호가 006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파악만했어도 가족들을 일단 안심시킬 수 있을텐데 말이다.
2) "우리 가족이 지금 어디에 있죠?" 라는 질문에 "위치 추적 결과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따위의 답변은 법을 지키는 답변일지는 몰라도, 가족을 더 불안하게 말려 죽이는 답변이다.
일단 이런 경우에는 발신 번호부터 확인하셔야 한다고 말하고자 나에게 전화들을 걸었던 경찰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받지 않는다. 해당 수법 관련 영상과 대처 방식에 대한 생각을 문자로 남겼는데, 역시나 회신은 없었다. 수고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불필요한 수고를 덜고, 같은 일을 겪는 다른 가족들은 덜 불안했으면 좋겠다.
이 와중에 생각한 것들.
-읽기에 있어서 사건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나는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 보다는 내 머리 속 추상에 더 관심이 쏠렸다. 사건 그 자체 보다는 이 사건에서의 의미, 문제와 해결, 사람들의 말과 심리.
-스무명의 경찰들 중 어느 한 분이 '이거 보이스 피싱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던데(아버지), 이 사람의 의견은 진실이면서도 사건 처리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어머니 기일에 가족들과 대판 싸운 것과 오버랩된다. 서로에게 소중한 가족이었음을 극적으로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보이스 피싱 같은 걸 누가 당해?' 라고 생각하긴 쉽지만, 막상 상황이 벌어지면 여러 불안요소들과 오판들이 맞물리면서 불안에 압도당하게 된다는 동생의 말을 곱씹게 된다.
-적어도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던 보이스 피싱 일당들은 내 번호와 아버지 번호,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번호가 부자 관계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모두 KT회선 전화기를 사용하고 있다. 어제 KT 개인 정보가 유출되어 "심 스와핑"에 악용된다는 뉴스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지금 중국에는 우는 연기를 밥벌이로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비롯한 보이스 피싱 일당들은 오늘도 수집된 한국의 개인정보들을 토대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오판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돈을 버는 일을 오늘도 할 것.
-누군가는 폭발적인 스피드로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는 레이스를 펼치는 반면(와, 진짜 최민정 👍), 누군가는 실감나는 연기로 사람들을 협밥하며 하루를 살고 밥을 먹는다. 같은 인간, 같은 밥, 그러나 다른 삶, 한심함, 딱함.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맛있게 광어회를 먹었다. 맛있는 선물을 주신 포항 어머니께 샤라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