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68일(220409)

from 카테고리 없음 2022. 4. 9. 11:42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고, 누워만 있고 싶은 어제와 오늘. 하지만 누워있으면서도 생각이 멈추지 않는 시간들 속에서, "아무도 이 선을 넘지 않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넘지 않아서 싫은" 감정이다.

 

오독. 오해.

 

우리는 옷을 입고 있고, 그 옷은 역할들의 가면들로 기워져있다. 그 가면들은 이름을 아는, 혹은 모르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모호한 얼굴이며, 우리는 이 얼굴이 공격당했을 때 참지 않고 공격하며, 혹은 참게 되어 스스로 내상을 입는다. 그리고 감정들을 가라앉히고 서로 '오해'였다고 말하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한다. 그 다음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정말 오해였을까? 아니, 서로는 서로에게 잔인하리만치 정확했다. 태도가 문제인가? 표정이 문제인가? 늬앙스가 문제인가? 감정이 문제인가? 오히려 문제를 감정과 태도로 환원하는 것은 문제의 뚜렷한 본질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장치로 기능한다. (대체 '당신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의 기준을 어디에 둘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에 대한 판단을 결정하는 '자리'의 문제이다) 오히려 그 감정 아래 있는 문제의 원인은 추상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파고들수록 구체적이고 선명해서 놀랍다.

 

그러므로 오해가 아니라 '오독'이다. 무엇을 잘못 읽은 것인가?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한 줄의 문장에 대한 오독이다.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야기시키는, 그 한 줄을 잘못 읽어왔기에 여러 다른 이유들을 들어 타인을 탓해왔던 것이다. 마치 욥의 친구들같이. '죄가 있는 사람이 고난을 받는다'는 이 한 줄 문장이 욥의 친구들의 모든 담론을 지배하고 있었고, 저 문장을 문제시하기 전까지는 욥의 이유 없는 고난이 이어진다.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 연결된 단어와 단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그 언어 체계 안에서, 잘못된 명제가 서로에게 '당연히'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정언명법으로 기능하고 있을 때, 고난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누구도 정죄 받고 싶지 않아서 '상황'을 탓하지만, 사실 그 상황이라 말하는 추상성 뒤에는, 그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한 줄의 선명한 문장이 우리 내면에 있을 뿐이다.

 

그 관계 파괴적인 문장은 대개 '이러 저러한 이유로, 남성적 예외가 가능하다' 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그릇된 논리, 문장으로 구성된 거짓을 투쟁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저 '이러 저러한 이유들'을 정당성 없음을 재확인해야한다. 이때 어려움을 겪게 되는 지점은 저 '남성적 예외가 가능하다'이다. 무수한 혁명 운동들이 저 문장에 맞서 '남성적 예외는 없어야 한다'로 맞서 왔으나, 이렇게 남성적 예외를 억압했을 때 돌아오는 결과는, 독재 정권의 탄생이었다. 

 

그러니 권력에 저항하는 투사의 형상이 아니라, '남성적 예외의 자리는 죽는 메시아만이 가능하다'고 적절하게 고백하는 신자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 삼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이것은 '따라서 누구도 죽을 수 없으므로, 그것이 가능한 그 사람만이 우리의 구원자이다' 라는 비겁함이 아니라, '누구나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아름다운 결말을 향해야 한다. 그래야만 남성적 예외의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이것을 말하지 않고 그저 스스로 죽고자 한다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마가복음 3장, 에베소서 6장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누군가가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를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 이유를 언제나 그래왔듯 '사랑'이라 말할텐데, 나의 사랑은 결말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주변부를 어색하게 맴돌고 있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의 태도? 내가 가르치려고만 하기 때문에? 아니, 내가 무엇과 싸워야할지, 그리고 무엇을 말해야할지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다. 나의 얼굴이 신자의 얼굴이 아니라, 랍비의 얼굴이었다는 것은 아무런 이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도 랍비였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랍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로 막는 단 하나의 문장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르게 주장한 사람마저 자신의 말을 (자신도 모른채) 배신하고, 그것을 일깨워준 사람도 자신이 지적한 그 보기 싫은 표정을 하고 있으며, 불의한 대상에게 응당 발휘해야할 정의로운 화는 애꿎은 서로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를 함부로 대하며.

 

어제는 어머니가 낙원에 가신지 7년째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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