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헤롯 성전을 "강도의 굴혈", "장사하는 집"이라 말씀하셨지요.

 

요한복음 2:16, 개역한글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그럼 거기서 비둘기를 팔았던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성전은 거룩하니, 이 거룩한 곳에서 세속적인 매매 행위를 했던 것을 예수께서 지적하셨던 것일까요?

 

1. 성전에서의 환전 행위는 불법일까?

 

  그렇게 보기는 어려울듯 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제물을 돈으로 바꿔주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되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이렇게 제물과 돈을 바꾸는 일은 토라에서 허용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래를 꼼꼼히 읽어보셔요.

 

신명기 14:24~27, 개역한글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찌니라

 

  그렇지요? 그리고 만일 장사 자체가 잘못 되었다면, 비둘기 파는 사람 뿐만 아니라 소 파는 사람, 양 파는 사람도 쫓아내셔야 하는데, 예수는 비둘기 파는 사람들만 유독 질책하셨습니다. 그저 열받은 예수의 눈에 비둘기가 들어왔을 뿐일까요?

 

2. 장사하는 집 = 강도의 굴혈

 

  아래는 비슷한 내용의 마태복음 본문입니다.

 

마태복음 21:13, 개역한글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이 본문은 두 개의 구약 본문을 더해서 만든 문장입니다.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이지요.

 

이사야 56:7, 개역한글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예레미야 7:11, 개역한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가 말한 '도적'은 히브리어로 '페리츠'이고, 이 단어는 '폭군', '파괴자'를 의미하는데, 마태는 희랍어로 이것을 레스테스로 적절히 번역했고, 또 이것을 개역한글 성경은 '강도'로 번역한 것이지요.

 

  그럼 우리는 '장사'와 '강도'를 조화시켜야 합니다. 성전을 비판하시는 예수의 머릿 속에는 분명 그리 되어있었을테니 말입니다. 

 

3. 그들은 혁명가 입니다

 

  성전에서의 환전은 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전의 목적은 신명기가 보여주듯, 그렇게 구매한 제물들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에서 벌어진, 유대 민족 전체의 활발한 환전을 통해서 배를 불리는 장사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도적이고 강도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렇게 모인 자금들을 가지고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산적(희랍어 레스테스를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들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하나님의 성전이 평화를 거절하는 이들이 민족 전체를 불구덩이로 집어넣는 일에 모의하는 장소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 성전에서 진행되던 제사 행위를 일시적으로 중단 시키셨습니다. 비둘기를 사는 사람들은 일반 서민이었을 것이고, 그들이 성전에 제사하러 오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둘기 환전을 중단시키는 것은 성전 제사의 중단, 전쟁을 모의하는 유대 공동체의 중심에서 연기가 끊어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 중단은 유대인들에게는 바벨론 침공에 의한 성전 파괴를 상기시키는 끔찍한 일입니다(다니엘 10:31만 보아도 매일 드리는 제사의 중단은 곧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일을 하셨고, 유대 성전을 중심으로 언약 백성 전체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성전 제사를 중단시키는 상징적인 제스쳐로 말입니다.

 

  성전이 산적들의 소굴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예수 대신 풀려난 '바라바'의 인기가 왜 이렇게 높은지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전쟁으로 들끓는 나라, 거기서 '강도'는 로마와 전쟁하고 유대의 독립을 외치는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하면 독립 운동가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혁명가'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들은 유대의 예언 이야기의 결말이 이방 제국에 맞선 유대의 승리라고 부르짖었던 이른바 '거짓 메시아'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드다(희랍어로 '뒤다스'로 읽어야 합니다)'나 '갈릴리의 유다'가 거짓 메시아들이었습니다. 이후 유대 역사에 등장하는 시몬 바르 기오라나 바르 코흐바도 마찬가지이고요.

 

 

  결론입니다. '장사' 라는 한 단어에 꽂히면, 예수의 의도와 다른 의도로 그의 말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당대 역사, 언약과 예언이라는 그들의 세계관,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이 선입견일 수 있다는 겸손이 있다면, 우리는 늘상 봐왔던 본문에서 신선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가능성이 성경이라는 옛 글을 대면하는 모든 순간, 우리 앞에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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