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깊게 읽는, 스데반의 '최후 변론' (2)
우리가 지난 시간 살펴보았던 스데반의 최후변론 이야기(7:2~10)를 중요한 두 가지 선으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물론 스데반이 말하지 않아도, 스데반과 그를 둘러싼 동족 유대인들은 모두 그 약속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테지요. 왜냐하면 이 아브라함 약속이 유대인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 때문입니다(정체성). 스데반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바로 그 질문과 답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아브라함 약속에 나오는 씨가 우리야!" 그러나 스데반은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 질문과 답변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전의 낡은 질문과 답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지금 투석형에 처할 위기를 맞게 된 것이고요. 그 아브라함 약속이 무엇인지 확인해봅시다.
"너는 너의 그 땅으로부터,
너의 그 가족들로부터 떠나라,
지금 내가 너에게 보여줄 그 땅으로.”
일단 땅과 가족으로부터 떠나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를 떠나서 하란을 지나서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도착은 했지만, 상속받지 못한 그 땅에서 아브라함은 난민, 나그네, 손님으로 지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대체 언제 땅을 얻게 될까요?
아브라함 약속이 세로로 떨어지는 선이라면, 스데반은 가로로 길게 이어지는 선도 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약속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한 이야기에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 아들 야곱(나중에 이름이 이스라엘이라 바뀌지요), 그 아들 열 두 족장들. 이 열 두 족장들은 아브라함의 씨라는 증표로 모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들을 다 묶어서 이스라엘이란 야곱의 바뀐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대단한 사람들이 자기 동생 요셉을 팔아먹는 범죄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범죄도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의 그 씨가 다른 곳에서 거하는 자가 될 것이고,
그들이 그 씨를 노예삼고 압제할 것이다, 400년 동안.
그리고 노예삼는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할 것이며,"
아브라함의 씨(후손)는 가나안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게 되고, 또 그냥 사는 게 아니라 노예가 되어 압제를 당합니다. 무려 400년 동안. 그리고 그 400년이 지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를 노예삼았던 민족을 심판하십니다. 바로 그때가 상속의 때입니다. 그럼 정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대로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런데 기근이 온 이집트와 가나안에 왔고, 큰 환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두 번째로 떠날 때, 파라오는 마침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일가친척" 곧 이스라엘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이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집트에 들어가게 되었는가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가족들 전부, 즉 이스라엘을 이집트로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요셉만 나그네였지만, 이후에는 야곱의 아들들 모두가 나그네가 되었고, 이제는 야곱 가족 전체, 이스라엘 전체가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이집트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은 손님이겠지요.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손님인채, 나그네인채 죽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들은 땅이 없어서, 이방인들에게 무덤으로 쓸 땅을 사야할 정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들은 줄곧 나그네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그 알림의 시간이 가까이 붙었습니다. 그 '알림'이란,
"그의 그 씨가 다른 곳에서 거하는 자가 될 것이고,
그들이 그 씨를 노예삼고 압제할 것이다, 400년 동안.
그리고 노예삼는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할 것이며,"
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그 씨는 다른 곳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른 곳이란 이집트라는 사실이 밝혀졌지요. 그리고 그들은 그 다른 곳인 이집트에서 노예로서 압제당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 고난의 40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400년의 시작은,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가 등극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즉 그 파라오는 요셉의 가족이 이집트의 손님이란 사실을 모르고, 그들을 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땅에 살고 있는 낯선 사람들에게 온갖 노역을 시켰습니다. 게다가 그 일가친척, 이스라엘의 아기들을 모두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400년 중에 고작 40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모세의 나이는 40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돌봐야겠다는 마음 위에 올라섰습니다. 왜 이 마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모세의 마음 속에 불연듯,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파라오 딸의 아들로 자랐으나,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도중, 이스라엘 형제 하나가 이집트 사람에 의해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사이에 끼어 들어가 이스라엘 형제를 보호했습니다. 또 동족의 고통을 갚아주었습니다. 그 갚아줌은 이집트 인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폭력을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맞은 만큼 돌려주는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정의로운 마음으로 동족의 아픔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는 이스라엘 사람끼리 서로 싸우고 있는 장면을 모세가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 싸움을 말리고 서로를 화해시키고 평화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모세는, '너희들은 서로 형제니까 서로에게 불의하게 해선 안된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생각을 달리 하는 이스라엘 사람이 말합니다. '너는 우리의 지도자도 아니고, 재판관도 아니야!', '니가 어제 이집트인에게 행했던 그 방식을 우리에게 하길 원하느냐?' 이때, "그 방식"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똑같이 갚아줌'입니다. 정의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묻는 것입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이집트인에게 폭력을 행사했듯, 여기 폭력을 쓰는 동족 이스라엘 사람인 나에게도 폭력을 행해야 하는 것인가?"
모세는 이 말을 듣고 도망갔습니다. 바로 이 말, '똑같이 갚아주는 방식'으로는 자신도 폭력을 사용했던 자신도 똑같이 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동생을 살해하고서 자신도 살해당할까봐 두려워했던 어떤 사람과도 같습니다.
모세도 떠돌이가 되었습니다. 지금 스데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떠돌이였습니다. 요셉도 떠돌이였고, 야곱의 아들들도 떠돌이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존경하던 모세도 떠돌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단 한 사람도 땅을 얻지 못한채 노예로서 압제당하는 400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예수행전, 성령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천히 깊게 읽는, 스데반의 '최후 변론' (4) (0) | 2018.02.24 |
---|---|
천천히 깊게 읽는, 스데반의 '최후 변론' (3) (3) | 2018.02.17 |
천천히 깊게 읽는, 스데반의 '최후 변론' (1) (2) | 2018.02.04 |
그 이름 안에서 할 수 있는 할 수 없음 (0) | 2018.01.21 |
사도행전 1:8, 개인번역 (1) | 2018.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