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본문을 살펴보는 것을 시작으로 오늘 이야기를 이어갑시다.
마태복음 24:32~35
그런데 너희들은 무화과 나무로부터 이 비유를 배워라.
그것에 속한 한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그 잎사귀들이 나게 되면,
너희들은 여름이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처럼 너희도, 이러한 모든 것들을 본다면,
그것이 문들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일어나기까지 비껴가지 못한다.
하늘과 땅은 비껴갈 것이다,
그런데 나의 말들은 결코 비껴가지 않는다.
-비유-사건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를 가지고 '비유'를 주셨습니다. 비유는 희랍어로 파라볼레(παραβολη)인데, '파라'는 '곁'이란 뜻이고, '볼레'는 '던지다'라는 의미의 발로(βαλλω)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비유는 사건 옆에 던져지는 이야기입니다. 신천지는 비유에 대해 이렇게 주장합니다. '비유는 천국복음을 제자들에겐 드러내면서도, 제자 아닌 사람들에게는 감추기 위해 주신 것이다'라고. 그런데 이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지금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는 제자들은 그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비유는 비유를 듣는 제자들에게조차 감추어져 있던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22, 새번역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이때 요한복음 2:22가 말하는 "제자들", 즉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비로소 이해해서 믿게 되었던 제자들은 누구일까요? 예수의 말씀을 현장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일까요? 아니면 부활의 사건을 만난 제자들일까요?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후자라 답할 것입니다. 즉 우리는 "제자들"이라고 말할 때, 그 "제자들"이 부활의 사건을 만나기 전의 제자들인지, 후의 제자들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팔레스타인 땅을 걸었을때, 그들은 예수의 비유를 배웠으나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외울 정도로 많이 들었겠지만, 그 비유들이 지칭하는 사건을 만나기 전까진, 비유에 대한 이해는 미진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즉 비유는 사건 곁에 던져지는 것인데, 그 사건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미완성입니다.
오늘 무화과 나무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유에는 '사건'이라는 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라는 짝을 만나기 전에는 비유는 아직 제 의미를 드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에는 위약 효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즉 사건을 만나기 전에 비유만 듣는다해도, 마치 그 비유를 이해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가 지시하고 있는 사건이 벌어지고 나면 비로소 그 비유의 이해와 사건에 대한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자신이 처음 비유에 대해서 들었을 때의 이해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마치 요한복음 2:22 처럼 말입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실 당시에는, 제자들은 분명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들었겠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 비유의 사건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천지가 양산하는 사람은 비유를 마침내 깨달았고 주장하는, 착각 속에 빠진 사람입니다. 이때 신천지는 실상이란 이름의 사건을 제시하는데, 이 실상에 예수의 비유를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이에 대한 기독인의 대처는, 비유에 대한 앎이고, 이 앎은 그 비유가 가리키고 있는 사건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저 무화과 나무 비유 곁에 놓인 사건은 무엇일까요? 실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1) 끝 이전에 벌어질 일 :
2) "해달별이 어두워지는" 야훼의 날 :
3) 끝 :
4) 인자의 표적 :
예수께서 앞에서 언급하셨던 "사건들"입니다. 한 번 문제를 맞춰봅시다. 끝 이전에 벌어질 일은 무엇인가요? 거짓 메시아들의 전쟁 소문입니다. 로마와 유대 사이에서 서로 편 나누기에 열을 올리는 무법의 시절이 옵니다. 해달별이 어두워지는 것은 야훼의 날에 대한 전조입니다. 하나님의 보복이 있을 것인데, 그 보복은 메시아의 몸에서 벌어진 사탄에 대한 처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이 바로 "끝"입니다. 이 환란의 날들 속에서 인자의 표적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승천입니다.
예수께서는 사건을 위해 비유를 옆에 던지셨지만, 우리는 성경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비유 옆에 사건을 던져야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비유의 솔깃함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자들을 막아설 수 있는 것은, 메시아께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들에 대한 증언입니다.
[4] 깨닫지 못하는 와중에(24:36~51)
그런데 바로 이 날들과 시간에 관하여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늘들의 천사들도 한 아들도 알지 못했다, 아빠 한 분 외에는.
-그 날이 아닌 그 날들
이때 "바로 이 날들과 시간"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예수의 비유가 지시하고 있는 바로 그 사건, 사건의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이는 이미 "그 날들"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19~22,29, 개인번역
그런데 그러한 날들에 임신한 이들과
젖먹이는 이들에게는 화들이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기도하여라,
너희들의 도망이 겨울에 속하지 않고,
안식일에도 속하지 않도록.
왜냐하면 그때 코스모스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결코 없었던 것과 같은
큰 압제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날들이 단축되지 않는다면,
모든 각각의 살몸이 온전해지지 못한다.
그런데 선택된 이들을 통해 그러한 날들이 단축될 것이다.
"이 날들과 시간" 동안 화가 있을 것이라 예수는 방금 전에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날들이 단축되지 않는다면 선택된 이들마저도 나타날 수 없을만큼 그 날들은 가혹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날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가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개역한글에는 "그 날"이라고 단수로 표현되어있지만, 원문에는 "그 날들"이라는 복수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날들에 속한 압제 후에/함께(μετα) 곧장
"해가 어둠에 덮일 것이고,
달이 그 빛을 주지 않을 것이며,
별들이 그 하늘로부터 떨어질 것이고,
하늘의 힘들이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 날들"에 속한 압제로서 메시아의 십자가 처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날들"은 하루가 아니라, 거짓 메시아의 소문, 메시아의 십자가 처형, 인자의 승천, 예루살렘 멸망을 포괄하고 있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모두가 알 수 있는 시간
하늘의 천사들도 알 수 없고, 심지어 아들도 알 수 없는 "그 날들과 시간"은, 아빠 한 분만 아십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재림을 가리키는 말일 수 없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멸망까지의 기간 동안 벌어질 사건들을 지칭합니다. 왜냐하면 "그 날들"이 앞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날들"이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과 달리 원문에 보면 "바로 그 날들"이라고 강조까지 되어있습니다(Περὶ δὲ τῆς ἡμέρας ἐκείνης).
그리고 "그 날들" 옆에 덧붙여진 "그리고 시간(καὶ ὥρας)"이 본문 해석의 관건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는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십자가 죽음, 사흘 뒤의 부활, 자신의 승천. 또 이 일이 벌어질 때 멸망으로 치닫는 예루살렘의 상황. 그러나 예수께서도 어떠한 사건들이 이어질지는 말씀하셨지만, 그 구체적인 시점은 함구하셨습니다. 이 구체적인 시점이 바로 "시간"이고, 이 "시간"은 "그 날들" 속에서 벌어질 사건들의 알 수 없는 타임라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들이 조건절로 표현된 것입니다(개역한글로는 조건절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말입니다).
마태복음 24:15, 개인번역
그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있는 것을 보거든,
마태복음 24:13, 개인번역
'보라, 여기 메시아가 있다'라거나 혹은, '여기다' 한다면
마태복음 24:26, 개인번역
만일 그들이 너희들에게 '보라, 그가 광야에 계신다' 말한다면,
즉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들으면, 그제서야 '시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점은 앞에서 '비유'에 대해 설명드린 그대로입니다. 사건을 만나기 전까지 시간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을 만나면 비로소 시간이 확실해집니다. 그런데 이것의 반대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는 점쟁이가 하듯이, 시간을 먼저 알고서 그 시간에 딱 맞아 떨어지는 사건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본인도 그 사건이 벌어지는 구체적 시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이가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은 "그날들의 단축" 뿐입니다(마태복음 24:22).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사건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몰랐던 그 사건과 시점에 대해서, 우리는 이제 누구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날들과 같이, 그렇게 인자의 파루시아도 있을 것이다.
즉 그 홍수 이전의 날들 속에서 먹고 마시는 이들, 시집가고 장가가는 이들이 있었다,
노아가 그 방주 속으로 들어가는 그 날까지도,
그리고 그 홍수가 올 때까지 깨닫지 못했고 그 홍수는 전부 들어올렸다,
이처럼 인자의 파루시아도 있을 것이다.
그때 들에 두 사람이 있을 것인데, 하나는 붙잡혀 끌려가고 하나는 남는다.
물래방아간에 둘이 곡식 갈고 있는데, 하나는 붙잡혀 끌려가고 하나는 남는다.
-멸망, 심판, 신원
사건들이 제시되었고, 비유도 전달되었지만, 정작 그 사건들의 시점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그리고 아직 사건은 찾아오지 않은 가운데, 예수께서는 인자의 파루시아를 말씀하셨습니다. 파루시아라는 단어는 복음서에서 마태복음에만 사용되는데, 로마 시민에게는 로마 식민지에 황제가 방문하는 것을 의미했고, 유대인에게는 우리가 지지난 주에 살펴봤던 것과 같이, 예언서들이 말하고 있는 '마침내 시온으로 왕이 돌아오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왕의 돌아오심은 짐승들의 멸망과 성도들의 나라가 출범하는 극적인 장면으로 이뤄질 것인데, 이것이 바로 승천입니다. 즉 승천은 역사의 분기점입니다. 예수께서 왕이 되셨다는 우주적 선언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서가 성취되는 이 승천은 예루살렘의 패망을 관통하여 벌어진다고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고통과 희망이 동시에 찾아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엄마의 '산통'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온갖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방 민족들이 심판받기를 염원하던 이스라엘에게 정말로 심판이 찾아오고, 그 심판은 하나님의 아들을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되돌릴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되고, 그 와중에 인자는 승천하여, 옛부터 예언되었던 새로운 나라를 출범시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그토록 염원하던 포로기가, 전혀 염원할 수도 없었던 방식으로 마침내 종결됩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전세계로 보내져서 새로운 왕의 등극을 알립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넘겨받습니다.
이같은 사건 중의 사건을 앞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일상을 영위하는 것 외에는 다른 관심사가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설령 비유를 들었다한들, 자신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자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건을 만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심판이 임박했다는 노아의 목소리는 들었으나 홍수를 피하지 못하고 시체가 된 사람들처럼, 심판이 임박했다는 예수의 목소리는 들었으나 유대전쟁을 피하지 못하고 파멸당한 실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유하려던 이들이 소유를 박탈당할 것이다.
"홍수가 전부 들어올렸다(개역한글은 "멸하기")"고 할 때, "들어올렸다"로 번역한 동사는 희랍어 '아이로(αιρω)'입니다. 이 '아이로'가 마태복음 24,25장 안에서만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확인해보면 의미를 좀 더 분명히 포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4:17,18, 개역한글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태복음 25:28,29, 개역한글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예수의 올리브 산 담화에서 '아이로'는 '무언가를 소유하다(가지다)'나 '소유가 박탈되다(빼앗다)'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홍수는 전부 들어올렸다"에서는 '홍수가 가지다', 즉 '홍수에 의해 모든 소유가 박탈되다'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전쟁통에도 거짓 메시아의 승리 소식을 믿으며, 예루살렘에 남아 먹고 마시며 시집 가고 장가가는 일을 유지했던 이들의 말로가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들이 거짓 메시아를 따르며 예루살렘에 남았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이 살아왔던 방식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데려감을 당하던지, 남던지
그리고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둘 다 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홍수 사건을 앞두고도 일상을 영위하고 있던 사람들처럼, 예루살렘의 파국 앞에서 무감각하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시기 속에서도 무언가를 갖기 위해 들에서 일하고 또 곡식을 갑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붙잡혀 끌려가고 다른 한 사람은 남습니다. 이 장면을 예루살렘 멸망의 배경으로 이해해본다면, 붙잡혀 끌려가는 사람은 로마의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일까요? 운 좋게 남게 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폐허가 된 땅에 남아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두려움에 살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예수께서 "도망가라"고 말씀하신 것에 귀먹은 두 사람입니다. 무화과 나무의 징조들을 보고도 그 때를 알지 못한, 모두 부정적인 예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느 한 쪽은 좋고, 어느 한 쪽은 나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데려감 당하는" 사람을 재림 때 휴거 당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었습니다. "데려감"이란 말자체가 너무 다정하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저는 "붙잡혀 끌려가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게다가 이 구절은 "재림 때"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데려감을 당하던지, 남던지 그들은 전쟁터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어라, 왜냐하면 너희들이 어떤 날에
우리 주께서 가신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바로 이것을 깨달아라,
왜냐하면 만일 집주인이 그러한 지킴으로 도둑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을 것이다, 도둑이 자신의 집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날
"그 날들"에 관해 말씀하신 예수께서 이번에는 "어떤 날"을 언급하십니다. 그 어떤 날은 '주께서 마침내 가시는 날'이고, 이 표현은 다니엘 7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날을 "오시는"으로 읽던지 "가시는"으로 읽던지 이 말씀 뒤에 있는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께서 가신다"는 표현은 예언서들이 예언한대로 시온으로 하나님이 귀환하시는 사건을 의미하며, 이 귀환은 승천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어떤 날"은 주의 승천의 시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승천은 마침내 짐승들이 패배하고, 인자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오는시대의 선언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승천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이뤄지기 때문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거짓 메시아의 소문에 주의하며, 끝까지 견디며,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건들을 보고 '끝의 시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집주인이 도둑으로부터 자기 집을 지키듯, 지금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촉각을 곤두 세워야 합니다.
이를 통해 너희도 준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인자가 가는 시간을 추측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로 누가 신실하고 현명한 종이겠느냐?
주인은 그를 주인의 식구들 위에 임명하였고,
그가 식구들에게 카이로스에 양식을 주도록 했다.
주인이 왔(갔)을 때 그렇게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바로 그 종이 복되다.
-우리도 신실하고 현명한 종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인자가 가는 시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자들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 준비란,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안에 벌어질 메시아 승천에 대한 준비입니다. 즉 제자들은 예루살렘 멸망의 산통 속에서 오는시대의 새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하고 현명한 종에 대한 비유가 이어집니다. 이 비유를 제자들이 처음 들었을 때는, 아마 자신들이 이 비유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들이 이 비유에 대해 정말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는, 자신들이 이 비유의 사건(승천)을 만나 스스로 신실하고 현명한 종이 되었을 때(성령)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그들의 최초 이해가 제대로 된 이해가 아니었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서는 그들의 새로운 이해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랑으로 견뎌야 할, 그 끝 속으로 돌입하는 시대의 변혁 속에서, 그들은 식구들에게 그런 시절에 맞는 양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주인의 원하는 바였는데, 만약 그들이 그렇게 견디지 않았다면, 최초의 에클레시아는 출범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인이 왔을 때"의 동사도 에르코마이로서, 앞에서 우리가 "가다/오다"라고 번역했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주인의 도래는 곧 인자의 승천, 다니엘 7장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인자의 승천은 성도들의 영원한 나라를 가져올 것입니다.
다니엘 7:14,18, 개역한글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끝"은 예루살렘 멸망과 더불어 성도들의 영원한 나라가 회복될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그리고 위의 본문은 주께서 승천하셨을 때, 예루살렘에 남아서 에클레시아의 출범을 준비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신의 모든 재산들 위에 그를 세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악한 종이 그의 가온에 '나의 주인은 늦으시는구나'말하며,
자신의 동료 종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면,
그러한 종의 주인은 기대하지도 않은 날에, 깨닫지도 못한 시간에 도착해서는,
그를 두동강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몫은 위선자들과 함께 두어질 것이다.
그때 우는 이, 이를 가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이 마지막 문단이 말하는 "그"는 주인의 재산을 맡은 자, 곧 '청지기'입니다. 그리고 이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들 위에 임명됩니다. 즉 그 종은 창조세계 전체를 돌보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승천과 신실하고 현명한 종의 출현을 연결시키십니다. 즉 승천은 새로운 왕의 등극과 함께, 창조세계 전체를 돌보는 "신실하고 현명한 종들(에클레시아)"의 출현을 알립니다.
그런데 이처럼 주의 모든 재산들 위에 세워질 그 종이, 시온으로 왕이 돌아오실 사건이 임박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맡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부여될 임박한 영광을 스스로 걷어차는 꼴이 됩니다. 다행히 우리는 이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이 심판당하지도, 위선자와 몫을 나누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복음서에 기록하면서 섬뜩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자신들이 견디지 않았다면, 이 중요한 시기에 방만했다면, 그들은 시대의 분기점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지 못한 아쉬움에 울며 이를 갈았을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었던 자들 중에는 가롯 유다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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