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난 주 했던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륵스인 나는 죽고, 프뉴마는 나를 살리고' 그런데 지난 주 필기했던 친구들의 질문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어요. 정말 핵심을 관통하고 있는, 저의 뒷통수를 얼얼하게 만드는 질문이 적혀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륵스인 나를 어떻게 죽여요?'
여러분, 어떻게 죽일까요? 이게 정말 중요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사륵스를 죽이자는 이야기는, 일단 뭔가를 죽이자는 것이니까 우리는 일단 킬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게 좋겠습니다. 님은 우리를 고용하셨고, 사륵스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셨지요. 그런데 아무나 죽일 순 없겠습니다. 적어도 사륵스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죽일 것 아니겠습까? 사륵스는 어떤 놈입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륵스는 '나'라는 사실입니다. 결코 '남'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남이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륵스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내가 사륵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륵스인 사람은, 본인이 사륵스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1) 예수 믿기 전의 나
바울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마스쿠스로 가던 도중 예수를 만났습니다(다마스쿠스는 지금 시리아의 수도입니다). 그가 다마스쿠스로 갔던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 없애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생각하기에, 그리고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십자가에 비참하게 매달린 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부활했고,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니까, 그들을 신고해서 모두 죽일 생각을 가지고 다마스쿠스로 갔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봅시다. 이때 예수 믿는 이들을 모두 죽이려는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사륵스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사륵스이면서도 사륵스인줄도 몰랐고, 그 사륵스는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사륵스'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를 거절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며, 율법을 열심히 지키겠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자기 자신이 사륵스임을 예수를 만나고 나서야 비소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륵스는 곧 '예수 믿기 전의 나'입니다.
2) 말뚝을 짊어지지 않는 나
즉 '예수 믿기 전의 나'는 다시는 출몰해서는 안되는 거짓된 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나'는 어떤 나입니까? 예수 믿기 전의 내가 나타나지 않도록, 예수 믿기 전의 나를 죽이는 나, 즉 예수 믿기 전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으려는 나입니다. 믿음은 싸움입니다. 남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 곧 사륵스와의 싸움이 믿음입니다. 자신이 사륵스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사륵스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사륵스인 나와 맞서 싸우는 새로운 나가 믿는 나입니다. 그는 거룩한 숨결을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고 나서가 어떻게 다릅니까? 예수 믿는 것은 사륵스를 발견하고 사륵스와 날마다 싸우는 삶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내가 죽는 삶이에요. 그렇게 날마다 다시 일으켜지는 삶입니다. 사륵스는 죽음 편에 있고, 프뉴마는 삶의 편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륵스와 프뉴마가 다르다는 것을 날마다 더욱 체감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고 나서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어도 별 거 없네.' 아니요. 삶과 죽음이 같습니까? 당신이 사륵스와 싸우지 않기 때문에 정말 다른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체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여전히 사륵스로서 자신과 타인을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따라오려거든 각자 자기 말뚝을 짊어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왠 말뚝이냐고요? 성경에 '십자가'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말뚝입니다. 이 '말뚝'은 고문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묶어서 고문하고, 결국 매달아 죽이는 말뚝입니다. 그리고 이 말뚝의 여러 종류 중에 십자형태의 말뚝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문과 처형의 말뚝을 '십자가'라고 번역을 하고요.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중요한 건, 그 말뚝이 십자가 형태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말뚝이 있는 이유는, 말뚝을 짊어진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뚝을 우리 스스로 짊어지라고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말뚝은 우리의 사륵스를 죽일 말뚝입니다. 즉 사륵스와 맞서 싸우라는 전투의 초청입니다. 말뚝을 짊어졌다면, 나의 사륵스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갖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모습을 죽입시다'라고 말하려다가, 오늘날에는 사륵스가 작전을 변경해서 말뚝을 내팽겨치도록 만들어버리니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예수를 따르지 않는 여러분은 어떤 나입니까?' 그 나를 죽이자는 말입니다. 힘들더라도, 그러한 자기 자신과 맞서자는 말입니다. 말뚝을 짊어지자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0:38
또 자기 십자가(말뚝)를 지지 않은 채로 나를 따르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 이미 죽은, 그래서 유령같은
그런데 우리가 알게 되는 사실은, 우리가 사륵스와 싸우려고 하는 순간, 사륵스는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프뉴마로서 살 때 이미 사륵스는 시체 상태가 되어 누워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싸우려고만 하면 사륵스는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말뚝을 짊어지려고만 하면 그 말뚝은 정말 한 없이 가볍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꽉 막힌 방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짜증날 때, 사실은 창문만 열어놓으면 시원한 바람이 밀려오듯이 사륵스와 싸우려고 하면, 이미 사륵스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11:28,29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이 짊어지라고 했던 그 말뚝은 힘든 말뚝이 아닙니다. 가볍고 쉴만한 말뚝입니다. 내가 말뚝을 짊어지고, 사륵스와 싸우겠다고 하는 순간 사륵스는 연기처럼 이미 사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내 마음이 있는 것 같은 이 사륵스스러움은 뭐죠?' 이미 죽은 것인데 자꾸만 우리를 괴롭히고, 예수와 함께 짊어진 우리의 말뚝을 내려놓게 한다면, 그걸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죽었는데 괴롭히는 걸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유령.
그러나 안심해도 되는 것은, 그 유령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유령이 나타나서 여러분에게 해괴한 말을 한다면, 그 해괴한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겠습니까? 여러분의 사륵스가, '나 아직 안 죽었어. 너는 예수를 따를 수 없어.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 이렇게 말할 때, 유령도 그래야만 하듯, 우리도 우리는 어쩔 수 없습니다. 아니, 메시아 예수께서 이미 말뚝에 매달려 돌아가셨고, 그때 우리의 사륵스도 끝장났으며, 죽으셨던 예수는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유령의 거짓말에 속아서 말뚝을 내려놓고, 내가 사륵스인지 사륵스가 나인지 모르고 살기에는, 우리는 확실한 사실을 이미 알아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럴 땐 찬양 한 번 크게 부르고, 유령을 날려버리는 것이지요. 정리해보겠습니다.
사륵스는 '나'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나입니다.
예수를 믿었어도 말뚝을 짊어지지 않았다면 사륵스입니다.
그러나 싸우기로 하면 이미 죽어버린 나, 유령같은 나입니다.
그럼 오늘 우리 질문에 답변을 해야겠네요.
Q. 사륵스를 어떻게 죽여요?
A. 당신이 사륵스와 싸우려고 하면 이미 죽어 있어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