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32~34

from 카테고리 없음 2017. 12. 8. 12:01

여백

마가복음 10:32~34, 개인번역

그런데 그들은 그 길에 있었다, 예루살렘 속으로 걸어 올라가면서,
그리고 예수는 그들을 앞으로 이끌고 계셨다,
그리고 그들은 놀라고 있었다,
그런데 따르는 이들이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이는 그 열둘을 다시 곁에서 취하시며
그들에게 말하기 시작하셨다
도래할 것들이 그이와 함께 걷는다는 것을. 즉,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 속으로 걸어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인자는 그 제사장들과 그 문법학자들에게 팔아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자에게 죽음으로 정죄할 것이고
인자를 그 민족들에게 팔아 넘길 것이다
그리고 인자에게 모욕할 것이고 인자에게 침뱉을 것이며
그들은 인자를 비난할 것이고 죽일 것이다,
그리고 셋째날과 함께/후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βαινω동사가 이데아와 현실을 매개하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된다면, 그건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예수와 함께 시온을 향해 걷는 이미지'는 폴뤼스에서 시골로 내려온 소크라테스와 반대 반향 아닌가?

-대분의 번역들은 συμβαινω를 '예수께 벌어질 일의 발생'으로 읽었다. 그러나 '함께 걷는다'는 본래의 뜻을 살린다면, 그리고 "그 길 위에 있었다"는 마가에게는 제자도를 의미할 것이 분명한 표현에 주목한다면, 함께 걷는다는 말 그대로, 예수와 함께 걷는다는 의미일 것이고, 이어지는 호티(ότι, "즉"으로 번역) 이하의 문장들은 함께 걷는 이들이 겪는 동일한 결말이 아닐까? 1) 팔아 넘겨짐, 2) 죽음으로 정죄당함, 3) 민족들에게 팔아 넘겨짐, 4) 모욕과 비난과 죽음, 5) 그리고 부활.
  적어도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은, 함께 걷는 이들의 결말이 마가복음 10:34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가?(또 마태복음 16장, 24장, 마가복음 13장) 문제는 우리가 함께 걷지 않기 때문에, 저 '함께 걷기'를 '일의 발생'으로 읽고서, 타협의 장을 무의식적으로 열어놓은 것이 아닐까?

-셋째 날에 붙은 메타(μετα)는 after인가, 아니면 with인가? 셋째날은 다시 일어나는 주체에 언제나 붙어있는 시간인가? 아니면 일어나지 못한 이가 기약없이 기다려야 하는 이데올로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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