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성경 읽기
0.
처음에 강의 제목을 말해달라 하셔서 잠깐 생각해보고 저렇게 붙여봤습니다. 처음에는 예술론에 대한 칸트와 니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뭘 할까 나름 고심을 했습니다. 이 자리의 성격, 여기 모일 사람들에 대한 상상, 그런데 이런 생각들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 제가 아무리 생각본들 지금 이 순간 여기 오지 않고서야 뭐 알 수 있는게 없잖아요? 그럼 청중이 어떤 분들인지 일단 차치해두고, 저는 제 얘기를 해야겠다 싶습니다. 제가 해야만 되는 이야기, 제가 알아버린 이야기.
오늘 아침에 아버지와 밥 먹으면서 텔레비젼을 보는데 다큐 3일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지하철 정비하시는 분들 일상이 나왔어요. 거기서 고압 전류가 흐르는 무거운 장비를 다루는 두 콤비가 나왔습니다. 한 명은 젊은 친구고, 다른 한 명은 나이가 좀 있으신 분인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로 믿지 않으면 힘들어요.
시간이 지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서로를 위하는 마음 없이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 같어."
VJ에게 웃으면서 한 이 말이, 저는 성경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문헌학자이니까, 저 사람이 말한 단어들의 어원과 고대 언어들에 대한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그걸 좀 분석해보자는 것입니다.
1. 위하다
"먼저 서로를 위한다"는 말을 생각해봅시다. 그저 말을 생각해보는 겁니다. 예술은 다른게 아닙니다. 우리가 보는 무언가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적어도 칸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일상 속에서 일상적이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 그런데 니체는 이 말에 반대했습니다. 무언가를 발견해서만은 안된다. 그 비일상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예술은 '발견과 창작'입니다.
이 '위하다' 라는 말은 고대 희랍어로는 '휘페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휘페르는 '위하여'로 번역하는데, 위하여 뿐만 아니라 "대신하여", "초월하여"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희랍어 개념에서 서로를 위한다는 말은, 서로를 대신한다는 말입니다. 간단한 말입니다. 부인을 위한다는 말은, 부인이 없을 때 부인의 일을 대신한다는 말입니다. 부모님이 자꾸 자식의 방을 청소해줍니다. 자식은 하지 말라고 해도 부모는 습관처럼 자꾸 자식의 방을 정리정돈해주고 싶어합니다. 자식이 없을 때, 자식을 대신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랍 개념에서의 '위하다'입니다. 다시 말해 '위하다'는 그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위하다가 들어있는 성서 구절들을 살펴보면, 또 신기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20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20
우리는 메시아를 위(대신)하여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이 고린도후서를 쓴 사람은 바울인데, 바울은 사도들이 메시아를 '대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발칙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는 영원하시고, 그리스도는 언제나 함께 계시고, 이런 말에 익숙한데,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한다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기독교인, 크리스챤, 교회는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행전이라는 책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는 승천하셔서 이제 눈에 안보이십니다. 그래서 그 예수께서 늘상 설교하고 사람들을 치료해주시던 성전 아름다운 문이란 곳에 더 이상 예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예수 있던 자리에 베드로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다리를 못쓰는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그런데 이 일은 예수께서 하셨던 일이잖아요? 사도행전은 예수를 대신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4:12, 새번역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그 자신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들도 할 것이다.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셨던 일들 대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데, 그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보다 더 큰 일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대신하는 사람들, 곧 예수를 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생각을 하고서, 오늘 아침방송에 나왔던 아저씨의 말을 떠올려보세요.
서로를 위하는 마음 없이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 같어."
성경 말씀 같은 말 아닙니까? 예수를 대신하고, 이웃을 대신하려는 마음 없이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 같다는 말. 상호 신뢰는 대신함 속에서 생긴다는 말.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대신하고 있습니까? 아무도 대신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위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은 고립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4:7, 개역한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2. 믿음
그럼 믿음은 또 무엇인지 생각을 해봅시다. 현대인들은 믿음을 '동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생각함' 정도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믿음은 취향이 되어버렸습니다. '개취'라는 말이 있지요. 개인의 취향. 그 사람이 그 취향을 갖던 말던 크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라틴어로는 fides입니다. 그런데 이 fides는 아무 때나 쓰는 말이 아닙니다. 계약상 사용하는 단어가 fides입니다. 영어단어 중에 confidence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게 저 초등학교 중학교 때 많이 팔리던 음료수 이름이기도 한데요. 이 단어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con이란 접두어는 '둘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계약 당사자 모두가 서로 신뢰할만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confidence고, 이 사이에 들어있는 fide가 '믿음'입니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다섯가지 기치를 내걸었거든요? 그게 sola scriptura Solus Christus sola gratia sola fide soli deo gloria이렇습니다. 여기에 또 fide가 보입니다. 즉 fide는 인간과 신을 계약 당사자임을 전제하는 말이고, 또 그 계약 내용에 충실할 때 fide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알랭 바디우라는 철학자는 믿음을 "충실함"이라고 말합니다. 신과의 계약 내용에 충실함이 곧 믿음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계약 내용이란, 메시아가 사셨던 삶을 충실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메시아를 대신함이 곧 계약 내용인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메시아를 대신하는 삶에 충실함이 곧 믿음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이 이 믿음으로 살기 시작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중간에 믿음을 포기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업하시는 분들은 아실거 아니에요? 계약이 체결되어서 하청업체가 물품을 납품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물건을 가져다주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합니다. 이런 경우 일방적인 계약 파기에 해당하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이 점을 무겁게 언급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6.27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다만 두려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들을 삼켜 버릴 맹렬한 불만 남아 있을 뿐이다.
즉 계약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함부로 계약을 파기한 사람은 메시아를 대신할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3. 시간이 지난다
아저씨가 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이 말도 성서의 핵심을 관통합니다. 성서는 두 가지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흐르는 시간, 그저 지나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부릅니다. 설국열차라는 영화가 이 시간을 표현하고 있는데요. 긴 기차가 이 크로노스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기차 앞으로, 즉 기원을 찾아서 앞으로 가려고 하지요. 이때 마약처럼 먹는 약이 있는데, 그 약의 이름이 크로놀입니다. 그런데 이 크로노스에서는 예술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술을 창작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를 만날 수도 없고요, 예수를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지나는 시간 속에서는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성서는 크로노스 아닌 질적으로 다른 시간을 말합니다. 그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흔히 크로노스를 수평적 시간, 카이로스를 수직적 시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6:10, 개인번역
그러므로 우리가 카이로스를 가졌으니,
모든 것을 향하여 그 좋음을 일하자.
즉 신이 창조 이후 '보시기 좋았더라'라고 말했던 그 좋음을 구현하는 역할이 자신들을 '우리'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맡겨졌고, 이들은 카이로스를 가진 사람들, 즉 새로운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신약성경이 진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지나는 시간을 살지 않습니다. 좋음을 구현하는 위로부터의 시간, 새로운 시간을 삽니다.
크로노스는 가만히 내비두어도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마치 국방부의 시계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 크로노스 안에서는 fide도 없고, 서로를 대신함도 없습니다. 만일 어떤 이들이 메시아를 대신하는 삶에 충실하다면, 즉 fide, 믿음으로 산다면, 그 사람들의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결정된 시간, 돌입한 시간, 새로운 시간, 카이로스입니다. 이 카이로스로 살지 않으면, 그 아저씨 말대로,
"서로 믿지 않으면 힘들어요."
이게 성서에 있는 개념들로 이해해본 한 아저씨의 진술의 결론입니다. 믿음 없이는, 즉 서로를 대신하겠다는 충심함 없이는, 그저 크로노스에서 힘겹게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아니 모두 새로운 시간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