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할머니"란 제목으로 요엘서 2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저에겐 할머니가 두 분 계십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가 두 분 계시지요. 그런데 친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지금은 외할머니만 살아계십니다. 외할머니는 아주 정정하시고, 또 명석하신 분이에요. 요한일서 정도는 통째로 암기하고 그러십니다. 저에게 "전도사님, 전도사님" 하십니다. 마치 우리 교회 할머니들처럼 말입니다. 저보다 먼저 믿으셨던 믿음의 선배님들이시자, 평생 기도로, 또 예수님의 몸인 교회에 대한 헌신으로 살아오셨던 분들 할머니들이시지요. 가 책 몇 줄 읽는다고 따라잡을 수 있는 분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서서 뭔가를 말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부끄럽기도 합니다.
여하튼 저는 할머니들이 좋습니다. 대접받아서 좋습니다. 대접이 싫은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저도 할머니들을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준비한 요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제 요리를 반기지 않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요리에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먹기 어려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잘 잡숴주셨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1.
요엘 3:1 LXX (요엘 2:28)
그리고 이일들 후에 그것이 있으리라,
그리고 내가 나의 그 숨결로부터 모든 나쁜 인간성 위에 부으리라,
그리고 너희의 아들들이 예언을 할 것이고,
그리고 너희의 딸들도,
그리고 너희의 노인들이 꿈들을 꾸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젊은이들이 볼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요엘이란 예언자가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을 히브리어로 했겠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드로, 요한, 안드레 심지어 바울, 이런 사람들은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잘 읽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열심히 읽었던 것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이 아니라 희랍말로 된 구약성경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오랫동안 남의 나라 종살이를 했잖아요? 그래서 모국어보다는 자신들을 지배하는 나라의 언어가 익숙했던 것이죠. 우리나라로 치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군홧발 아래 짓이겨있을 때, 우리말로 된 성경보다 일본말로 된 성경을 더 열심히 읽었다고 생각하면 비슷할까 싶습니다.
어찌되었든, 희랍말, 그리스 말로 된 구약성경을 열심히 읽은 겁니다. 이 그리스 말로 된 구약성경을 70인경이라고 부릅니다.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오는데요. 70명의 학자들이 모여서 70일만에 번역을 끝냈다고 해서 70인경입니다. 그걸 번역한 걸 가져온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여기보면 "나의 그 숨결"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령'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성령은 "거룩한 하나님의 숨결"이란 뜻입니다. 이걸 한자로 줄여서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숨결이에요. 여기 나온 나의 숨결은 성령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결 말고, 나의 숨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걸 가리켜 목숨이라고 부르지요. 70년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5억 4천 4백번 정도 숨을 쉰다고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70이 넘으신 분도 있으니까, 5억번 정도는 가뿐하게 넘기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목으로 숨을 쉬면서 목숨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이건 영원하지 못합니다. 목숨 쉬다가 다 쉬고나면, 우리는 다 잠들 것입니다.
얼마 전 제 친구가 죽었습니다. 나이는 서른이 갓 넘었는데, 두살박이 딸이 있고, 젊은 부인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암으로 잠들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몇 번이나 호흡을 했을까요? 3억번 정도 숨 쉬었을까요? 이렇듯 사람이 얼마만큼 목숨을 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정해주신 만큼만 그렇게 쉬다가, 이제 그만 쉬어라 하면 이 땅에 누워서 잠드는 것이지요.
만일 세상에 목숨만 있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사는 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저 숨 쉬다 죽고 끝이라면, 우리가 숨 쉴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숨 막히는 세상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숨 막히는 나라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는 목숨 말고는 모릅니다. 자기 목숨이 제일 소중한 것처럼 싸우다가, 제 목숨 마저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자꾸 목숨 얘기는 그만 두고 싶습니다. 목숨 얘기는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목숨말고, 거룩한 숨 얘기만을 하고 싶습니다. 여기 저보다 목숨을 많이 쉬신 어르신들을 모시고 목숨 얘기해봐야 제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것 밖에 더 되겠습니까? 제가 오늘 할 말이 있다면, 목숨에 대한 얘기는 아닐 것입니다. 벌써 많이 했지만.
2.
거룩한 숨 얘기를 합시다. 그런데 저 요엘서를 보니까, 거룩한 숨이 나온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숨결을 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육신', '육체'라고 된 단어는 몸뚱이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죄악을 따라가는 나의 인간성 자체를 성경은 '육체', '육신'이라고 번역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살 수 없는 비뚤어져버린 고약한 인간성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숨을 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기 계신 할머니들이 고약한 할머니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저에게 잘 해주시고, 우리는 여기서 웃으면서 인사하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혹시 댁으로 돌아가시면, 또 가족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시겠지요? 고약한 할머니는 아니시겠지요? 세종대왕이 다스릴 때, '고약해' 라는 신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고약해라는 놈은 성격이 틀려먹어서, 뭔가 같이 일하기가 어려운 신하였다고 합니다. 왕인 세종을 째려보기도 하고, 회의하다가 나가버리기도 하고, 여하튼 이 고약해라는 놈은 틀려먹은 놈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종은 뭔가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고약해 같은 놈!" 이라고 욕을했다고 해요. 그런데 세종은 이 고약해라는 사람을 대사헌이라는 높은 자리까지 승진을 시켜줬습니다. 세종은 고약해같이 틀려먹은 놈도 세심하게 신경써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린 사실 다 고약해 같은 사람들이지요. 오늘날에는 '고약하다' 하면, 인상을 구기고, 성미나 언행이 사나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다 고약한 성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성경에 '육체'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고약한 나'가 육체에요.
창세기 6: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숨결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고약해졌습니다. 육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가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숨결은 떠나버립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떠나버린, 그저 고약한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이 땅에 많이 있습니다. 혹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닌지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말이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이일들 후에 그것이 있으리라,
그리고 내가 나의 그 숨결로부터 모든 육체(나쁜 인간성) 위에 부으리라,
하나님은 고약한 인간성 위에 자신의 숨결을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을 받는 고약한 사람은, 어떤 고약한 사람이냐 하면, 자신이 고약하다고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고약한 사람입니다. 이 내용이 스가랴 12:10이 나와요.
스가랴 12:10
그러나 내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나 곧 그들이 찔러 죽인 그를 바라보고서,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며,
맏아들을 잃고 슬퍼하듯이 슬퍼할 것이다.
우리의 고약함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걸 인정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구하는 영,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주겠다는 말입니다. 내 고약함 때문에 하나님이 아프셨다. 내 고약함 때문에 하나님이 죽으셨다. 이 사실 모르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저 육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이 사실을 단단히 인정하고 붙잡자는 말입니다. 우리의 고약함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고약한 사람이었지만, 더 이상 고약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의 고약함이 예수를 죽인, 예수의 원수이고, 예수의 원수는 곧 나의 원수이니 말입니다.
나의 고약함이 예수의 원수이다. 이 고약함을 죽여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숨으로는 못죽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구하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성령을 구하면, 성령은 우리의 고약함을 죽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안 끝나요. 이렇게 됩니다.
3.
그리고 너희의 아들들이 예언을 할 것이고,
그리고 너희의 딸들도,
그리고 너희의 노인들이 꿈들을 꾸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젊은이들이 볼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죄다 거룩한 숨을 받은 이들입니다. 목숨만으로만 사는 육체들이 아닙니다. 일단 아들들이 예언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들만 좋아하지 않습니다. 딸도 똑같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딸들도 예언을 합니다. 예언한다는 말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말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지만, 이 사람들이 모두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고, 그 소망을 말한다면 그게 예언입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한 구절은 그 다음 구절이에요. 그리고 그 거룩한 숨결받은 노인들이, 꿈들을 꾸게 될 것이다. '꿈'도 아니에요. '꿈들'이에요. 성령받은 할머니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꿈들을 꾸시나요?
저는 고약함을 완전히 죽여버리는 꿈을 꿨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제 소원입니다. 고약함이 죽어버릴수만 있다면, 통일도 하겠다 싶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 나쁜 것이라곤 죄다 사라져버리는게 소원 아닙니까?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다스림이 탁 이뤄지는 게 우리의 바람 아닙니까? 그러니 이 땅에 고약함이랑 모두 사라져버리는 꿈을, 오늘부터 많이 꾸시기 바랍니다.
또 제가 아까 제 친구 얘기를 해드렸는데, 여러분들도 저도 100년도 채 못가서 다 이 땅 위에서 잠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날 한 시에 모두 다 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치 엄마가 잠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듯, 하나님께서 죽어서 잠들어있는 우리 모두를 깨우실 것입니다. 이 꿈을 같이 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부활에 대해서 꿈을 꾸고, 옆 사람을 부활한 사람처럼 대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이게 우리의 꿈이었음 참 좋겠다.
고약함이 죽는 꿈, 우리가 부활하는 꿈, 또 제가 아주 좋아하는 찬송이 있는데, 거기 가사에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이 가사가 아주 좋습니다. 여기서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가 아주 좋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부활하듯, 이 우주 전체가 부활할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이걸 "새 하늘과 새 땅"이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죽어서 천국만 가면 되었지 가 아니라, 죽어서 천국가더라도,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된 산천초목을 보며, 부활한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하루 하루를 살게 될거라 이 말입니다.
이게 우리의 꿈들입니다. 성령받은 할머니들이 꾸어야 마땅한 꿈들입니다. 고약함이 사라지는 꿈, 우리가 부활하는 꿈, 우주가 새로워지는 꿈. 혹시 할머니들 중에 이 꿈 꾸시면 저한테 꼭 말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