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부활한다. 여기서의 부활은 지복을 누리는 영혼이나, 다른 육체로의 환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의 부활을 세 가지 의미에서 조망해보려고 한다.

  첫째, 부활은 죽음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둘째, 부활은 몸의 구성이다.
죽음이 흩어버린 것이 몸을 다시/새로이 얻는(바울은 '몸을 입는다'고 표현한다) 것이다. 그런데 만일 다시 죽을 수 밖에 없는 몸으로 재구성된다면, 그런 부활은 희망이 아니라 고문의 반복일 것이다. 불가가 윤회의 수레바퀴로 다시 떨어지는 것을 열반이라 부르지 않듯이 말이다. 부활은 그저 반복이 아니다. 반복과 새로움은 다르다. 희랍어 팔린(παλιν)은 '다시(agind)'와 '새롭게(anew)'를 동시에 지시하는데, 이는 부활도 마찬가지다. 부활은 나의 몸의 '재(再)'구성이면서도 '신(新)'구성이다. 이전 몸의 '구성력'은 죽음이 흩어버릴 수 있으나, 새로운 몸의 구성력은 죽음을 극복하기 때문에.

   그리고 셋째, 부활은 새로운 시간의 삽입을 가져온다.

   인류사 속에서 단 한 번 벌어진 메시아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 이후 3일만에 벌어졌는데, 이 3일이라는 기간은 부활로 가는 시간이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 공백의 시간이다. 헤겔은 역사상 중요한 사건은 두 번 일어난다고 말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사건도 두 번이다. 예수의 단독 부활과 '모든 사람'의 부활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의 부활은 모든 사람의 동질화가 아니라는 사실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πάντας)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희랍어 πας는 '모든'이지만 개별성에 강조점이 있다. 우리말로는 whole이나 every나 '모든'이라 번역하지만, 희랍어는 이 둘을 구분하고 있다. πας는 전체가 가진 개별성을 지칭하는 단어다. (그런데 이걸 개역한글은 "많은"으로 번역했다. '제한속죄'라는 교리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많은'이라면 πας가 아닌 πολυς를 써야한다.) 바울은 '모든 사람의 부활'이 갖는 개별성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5:23에서 설명한다.

고린도전서 15:23,24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ἕκαστος δὲ ἐν τῷ ἰδίῳ τάγματι·), 먼저는 첫 열매인 메시아요, 다음에는 그이가 ​나타나실​ 임재하심으로 메시아께 속한 자요, 그 후에는 텔로스이니, 그이가 모든 다스림과, 모든 권세와 힘을 무위로 돌리시고, 나라를 아빠 하나님께 바칠 때입니다. 그이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두실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무위로 돌려지고 있습니다.

   '자기 차례대로'라고 되어있지만, '탕마(τάγμα)'는 군인의 '배치'를 뜻하는 말로 기본적인 의미는, '질서에 따라 놓인 것'이란 의미이다. 아마도 위 구절이 부활의 '순서'를 말한다고 생각했기에 탕마를 차례대로라 번역한듯 싶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발 아래 둔다"는 시편 인용은 공간적인 배열, 질서를 말하는듯 하다. 즉 이 구절은 군대의 편성에 관한 본문인 것이다. 첫째로 메시아가 계시고 그 아래 메시아께 속한 이들이, 그리고 "무위로 돌리는(καταργέω)" 운동이 등장하는데, 이 운동은 모든(πας) 다스림, 권세, 힘에 이어 최후에는 죽음 마저도 무위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앞 구절에서 πας를 이렇게 사용했다.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즉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 것은 모든 사람을 개별적으로 옭아매고 있었던 죽음 자체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때의 부활은 메시아께 속한 자시 자신의 개별성을 몸의 재/신구성을 통해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활은 개별성을 희석시키지 않고 오히려 완성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들을 모두 미래로 돌려놓으면 한낯 사변이나 공상에 지나지 않을테지만, 바울은 이런 예상을 뒤집어버린다. 왜냐하면 이 구절의 동사들이 모두 현재시제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고전 15:23의 '파루시아'는 재림이 아니라 임재로 읽어야 한다). 즉 나라를 하나님께 바칠 때는 지금이고,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두실 때도 지금이고, 끝 원수인 사망이 무위로 돌려지고 있는 지금이다. 지금이 마지막 때다. 지금이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때인 것이다. 즉 '마지막' 이란 개념은 이 본문에서 둘로 분할되고(그래서 '마지막'이 되었는데도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남아있다), 하나님 외의 힘들을 무위로 돌리는 운동은 이 마지막이 갈라진 틈에서 메시아께 속한 이들을 통해 이뤄지며, 심지어 이 운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마치 블랙홀처럼 이 운동은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는데, 이 운동이 끝나는 국면은 "그이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두실 때"까지"이다.

   즉 부활은 악을 무위화시키는 메시아 운동의 시작을 선언함과 동시에 이 운동이 '죽음의 죽음'의 결과를 가져올 것을 의미한다. 이때 사람의 몸은 이 운동의 과정 중에 놓인다. 그럼에도 인간은 죽음으로 던져졌다. 따라서 인간의 몸은 죽음의 힘과 신체의 재/신구성의 힘이 충돌하는 경합점이 되고, 죽음의 영향력을 기능부전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메시아에 속한 사람의 약함으로 드러난다.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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