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받는 인간이 노래할 수 있을까?(상)

-<욥의 노래> 수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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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백미인(www.100miin.com)에서 진행되고 있는 김동훈 선생님의 강의 <성경 밖으로 나온 욥의 노래>를 수강하고 있다. 선생님은 최근 <욥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욥기 번역서를 내셨고, 그때 연구했던 결과물을 강연 현장으로 가져오셨다.
  총 세 번의 강의인데, 강의에 대한 요약과 더불어 내 생각을 써보고자 한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따라서 기독교인으로서 내 세계관이 보는 그대로 써보려고 한다.(사실 이렇게 밖에 못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1. 괴물같은 타자들에게 둘러싸여

  선생님은 자신이 욥기를 읽을 때 적용했던 두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하나는 타자에 대한 대립이요, 다른 하나는 법정 논쟁이라는 형식이다.


  여기서 '타자'는 욥의 마누라와 친구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을 집어삼킨 자연, 그리고 평생을 섬겼으나 갑자기 낯설게 다가온 하나님도 포함한다. 즉 타자는 "나 아닌 다른 낯선 존재"인데, 이 "낯섦"의 정도가 심해지면, 타자를 기괴한 물건(괴물)으로 보게 된다. 이걸 쓰는데 "괴물랩퍼"라는 별명을 가진 가수가 생각난다. 저 별명은 그가 다른 랩퍼와는 일관성 없이 낯설만큼 랩을 잘한다는 말이겠지? 이런 의미에서 뭔가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 사는 것은 결국 괴물이 되자는 걸까? 이렇게 귀여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분명한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는 일관성과 개별성 사이에서 놓였다는 사실이다. 타자와의 일관성을 극단으로 밀고나가면 나의 개별성은 사라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남과 다른 나를 추구하면서도 남들과 다르면 불안해한다. 우리는 일관성만을 추구할 수도 없고, 개별성만을 추구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일관적이면서도 개별적이어야 한다. 다원이면서도 그 다원을 아우르는 하나의 전체를 추구해야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욥기를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는 결론의 종교 경전이 아니라, 타자성을 가져다 놓고 읽는 것은 신선한 시도로 보인다. 욥기를 '나와 같음'과 '나와 다름'의 관점에서 읽는다는 것은, 철학, 사회, 문학과의 다양한 접점들을 마련하기 때문이다.생각해보라. 우리 사는 문제가 죄다 하나와 여럿, 보편과 개별, 부분과 전체이니.

"여럿 중 하나인 내가 추구하는 하나는 무엇일까?",
"개별자로 가득한 세상 속에 적용되는 보편은 무엇일까?",
"부분은 전체와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은 모두 삼위일체에 대한 숙고로 이어진다. 개별자인 세 가지 인격들이 하나의 본성인 하나님이다. "이게 말이 되냐?"고 반문하겠지만, 사실 모든 인간들이 개별성과 보편성 두 마리 토끼를 추구하고 있고, 어느 한 마리만 쫓게되는순간 인간성은 붕괴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개별성만 쫓는 놈은 이기주의요, 엠페도클레스나 후기 스토아 학파처럼 나를 포기한 채 전체에 나를 자살로 내어줄 수도 없다. 때론 자기 밖에 모르면서 자기가 보편이라 우기는 사람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이것의 극단적인 경우는 2차 세계대전을 벌인 희대의 살인마를 들 수 있다.

  하여간 삶은 보편과 개별을 어찌 조화시킬까의 문제다. 이점에 대해서 신학은 철학적 숙고와 맞닿아있다. 보편적일수만도 없고, 개별적일수만도 없을 때, 신자는 삼위일체적이어야 한다고 답한다. 그런데 삼위일체'적'에서 저 ''이 어렵다. 보편과 개별이 조화된 한 분이 내가 섬기는 분인데, 그 분의 형상을 이 땅에 어찌 반영하느냐가 저 '적'이란 한 글자에 담겨 있다.

  나는 욥기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욥이 가지고 있던 보편에 대한 이해는 고난을 겪기 전과 후가 어찌 달라졌나? 고난 앞에서 우리가 익히 믿어 왔던 보편이 산산조각났을 때(예컨데 세월호), 고난을 겪은 개체가 그리는 새로운 보편의 형상을 만나볼 수 있을까?

2. 신과의 법정 공방을 벌이는,

  '법정 논쟁의 형식'을 설명하기 위해 선생님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희랍문학에 대한 개괄로부터 설명은 시작되는데, A. 모든 것이 신의 뜻임(보편)을 전제하는 서사시를 지나, B. 개별자의 감정을 노래하는 서정시가 나타났고, C. 개별자의 고립을 관통하는 새로운 보편성으로서 비극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비극은 양쪽이 나와서 말싸움을 벌이는 '아곤'의 형태로 진행되는데, 이 말싸움은 민주정을 오랫동안 유지했던 시칠리아의 사유재산 공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재산을 지키려는데서 치밀한 논리가 발생했다니!) 하여간 이런 아곤의 형식으로 문학을 했던 이들이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희랍 비극의 법정 논쟁 형식을 대표한다.

  욥기는 희랍문학과 시대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전혀 무관하지만, 이상하게도 법정 논쟁이라는 형식상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는데 1) 주인공이 무고하다는 점. 2) 열린결말이 아니라 욥이 옳다는 판결이 결말로 주어진다는 점. 3) 희랍비극은 격행대화의 긴박성을 보여주지만 욥기는 더 호흡이 길게 이어진다는 점.

  선생님은 희랍 비극을 따라 "4배열법"으로 욥기를 읽었다. 4배열법이란, 말싸움하러 대적자가 도착하는 도입부, 사건을 설명하는 진술부, 주장을 확증/논박하고 "상대방의 호감사기"가 벌어지는 논증부, 그리고 결론부로 이뤄진 구성을 말한다. 

  첫 수업이니까 주제와 형식을 간략하게 다루는 것으로 욥기 자체에 대한 내용은 마무리가 되었다. 

3. 몸을 공유하는 인간들


  하지만 강의가 이렇게 진행되었다면, 질문이 다음과 같은 질문이 터져나와야 정상이다.

  "연대나 지리적으로 무관한 희랍 문학의 형식으로 욥기를 읽어도 되는 겁니까?!"

  선생님은 이것을 영향사의 관점으로 풀지 않고, 인간의 육체성때문에 생기는 보편적인 삶의 정황에서 답을 찾는다. 이것은 두 번째 강의에 대한 예고편인거 같다. 두 번째 강의 때 '심리학적인 접근'을 하겠다고 하셨으니. 어찌되었든 간략하게 추리자면,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류의 보편 심리가 있고,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있든, 연대가 얼마나 차이나든, 유사한 사고와 패턴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욥기가 다양한 문학 작품과 만날 수 있는 개연성을 확보한다. 우리는 두 작품을 살펴봤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파우스트>는 욥기와 마찬가지로 사탄의 개입으로부터 주인공의 개고생이 시작된다. 또한 여주인공인 그레첸에게 선언된 돌발적 구원도 욥기의 그것과 유사하다. 저 '돌발적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은 키에르 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설이었는데, 선생님은 "무한한 자기 체념"을 통해 도덕적 단계에서 종교적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구원으로 보았다. 그리고 아마 이 관점은 욥기에도 그대로 적용될듯 싶다. 무한한 자기 체념.

  그러나 나는 무한한 자기 체념이 인생의 끝에 찾아온 그레첸과는 달리, 무한한 자기 체념을 삶의 한복판으로 가져와 사는 사람을 가리켜 신앙인이라 부른다고 생각한다. 무한한 자기 체념은 현실에 대한 낙남이 아니라, 새로운 보편에 대한 수용으로 보인다. 즉 종교적 실존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도덕적 실존으로서 보지 못했던 더 차원 높은 보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고, 바로 그 순간이야 말로 그 새로운 보편을 다시금 괴물로 둘러싸인 개별자의 삶에 적용해야할 책임을 위임받는 때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보편아닌 것을 보편으로 끌어안고 살던 인간은, 마침내 괴물을 끌어안는 사랑의 초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서는 몸을 매개로 하는 기억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 욥이 몸을 통해 겪는 고난도 '기억'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셨다. 희랍어로 '참'은 알레떼이아인데, 레떼(망각의 강)를 거슬러온다는 뜻이 된다. 곧 기억이다. '참'을 '새로운 보편에 대한 기억'이라 부르면 어떨까. 이 새로운 보편에 대한 기억은 창조된 우리 몸에 이미 들어있는데, 타인을 괴물로만 읽던 일상에서는 떠올리지 못하다가, 몸에 부딪치는 충격에 의해 마침내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고난이 기억의 열쇠!

  일단 여기까지. 괴물같은 타자들에 둘러싸여, 신과 법정 공방을 벌이는, 몸을 공유하는 인간들로 일단 정리.


  일단 여기까지 쓰려고 하는데, 문득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생각난다. "하나님과 사람을 이겼다"는 뜻인데, 괴물들을 끌어안고, 이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따지는 아브라함, 모세, 바울은 결국 하나님도 이기고 사람도 이겼다. 하나님은 그들의 소원대로 괴물들을 새사람으로 새롭게 하셨으니. 그들이 이기는 과정을 고난이라 부른다면, 그들의 몸이 괴로울 때마다 그들이 떠올렸던 새로운 보편이란 무엇이었을까? 괴물이 사람되어, 더 이상 괴물이 없는 세계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들은 본인 스스로가 괴물이었다가 사람되었던 첫번째 수혜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새로운 보편에 목숨을 걸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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