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어머니가 19일간 투병하셨던 병원은 서울 성모병원이었습니다. 카톨릭에서 세운 병원이라 성당도 있고, 기도실도 있습니다. 기도실에는 천주교 성경도 놓여 있습니다. 아직 삶과 죽음이 결정되지 않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 -언제나 무언가 정해져있지 않은 애매한 상황이 힘들기 마련입니다- 아버지와 저는 수시로 성당과 기도실을 들락날락하며, 또 시간이 나는대로 야고보서의 말씀을 계속 묵상했습니다. 왜 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기도실에 앉아 성경을 들여다보는데 야고보서가 눈에 들어왔고, 야고보서의 말씀이 저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줄곧 읽게 되었고, 아버지께도 말씀드렸더니, 야고보서와 함께 하는 병원 생활이 되었습니다. 야고보서를 따라 교회의 어른들을 모시고 함께 기도도 했고, 야고보서를 따라 가족끼리 서로 죄를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야고보서를 따라 '심판이 아닌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여러 번 했습니다. 장례가 끝나고, 노목사님이 수요 설교 본문을 물어보셨을 때도 생각나는 것은 야고보서 뿐이었습니다.


1.


  야고보서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개역개정에 '흩어져 있는'이란 말로 된 이 말은 '디아스포라'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패망하는 바람에 여기 저기 흩어져 사는 피난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나그네요, 떠돌이입니다. 이방인들 사이에 끼어서 사는 이방인들입니다. 그저 떠돌기만 해서는 디아스포라라는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 있이 흩어져 사는 이들이 디아스포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소망일까요? 그 소망은 병원에서 뚜렷이 드러납니다.


  병원이 믿는 것은 죽음입니다. 제가 의사들에게 들은 말은 온통 죽는다는 소리 뿐이었습니다. 이래서 죽고, 저래서 죽고 환자 보호자들의 마음은 죽음의 말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의사들에게는 죽음이 일상입니다. 그것을 벗어난 일말의 가능성도, 희망도 환자들에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무어라 말하든, 그 속에서 희박한 가능성 하나를 끊임없이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환자의 가족들입니다. 그들은 의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습니다. 그들이 붙잡는 하나란, 지금 누워있는 가족의 일어남, 지금 누워있는 가족의 몸이 새로이 힘을 얻는 것. 환자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환자 가족들은 오직 이 소망만을 붙잡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희박한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환자의 가족들은 환자가 다시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을 자꾸만 믿습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하나님 나라의 나그네는 이것보다 더 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들의 소망은 독특하고, 이들의 소망은 정말 믿기 힘든 것입니다. 이 소망을 이런 말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내 사랑하는 가족이 다시 일어날 것이고, 몸이 새로이 힘을 얻을 것이고, 결국에는 죽었던 이 사람이 온전한 사람될 것이라 소망합니다. 그러니 이방인 중의 이방인, 나그네 중의 나그네라 할만합니다. 이 사람들이 야고보가 말했던 디아스포라입니다.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이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환자를 맡기고서, 부활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환자 하나를 가운데 두고, 의사들과 디아스포라가 맞붙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마치 제물을 가운데 두고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 맞서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이 흘러넘치도록 부어진 제물 위에 불이 떨어지는 기적으로 바알 선지자들의 코를 납짝하게 해주셨듯이, 깨어나지 못한다는 엄마의 살아남으로 의사들의 코가 납짝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수치스럽게 하지 마시라고, 보란듯이 이 누워있는 사람을 살리셔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받도록 하시라고, 생명의 주권이 의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마치 이 나라의 광복을 고대하는 조선의 민중을 닮았다고도 생각했습니다. 나라가 망해서 연변에, 상해해, 충칭에, 만주에, 일본에 흩어져 살던 조선의 디아스포라들은 이 나라의 주권이 다시 부활하는 것, 즉 광복만을 기다리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 한반도 땅을 놓고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맞붙었습니다. 저는 김구의 기도를, 유관순의 기도를 생각합니다. 그들의 소망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일제로부터 이 나라가 자유를 얻는 것. 저에게도 소망은 하나였습니다. 병으로부터 어머니가 자유를 얻는 것. 이것 하나를 붙들고 버티며,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말 속에서, 믿음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바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의사들이 이겼습니다. 엄마는 돌아가셨습니다.


  낙담하는 와중에 그제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죽으면 어쩔 수 없기에 죽기 전에 서둘러 해야 하는 응급처치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죽음을 그저 끝이라 믿으면 하나님의 흩어진 열 두 지파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제가 가진 이 소망은 죽음을 이깁니다. 이 사실을 붙잡으니, 제 속에 새 마음이 생겼습니다.


2. 


  야고보서의 다음 구절을 읽어봅시다.


나의 가족 여러분, 

갖가지 시련을 만나게 되거든, 전적인 기쁨으로 여기세요.

여러분의 신실함은 시험에 맞서 견딤으로 힘을 내는 줄 

여러분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견딤이 끝까지 힘을 내도록 하세요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믿으면 힘낸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힘냄입니다. 힘내면 믿음있고, 힘 못내면 믿음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마치 자동차 기름과도 같습니다. 기름이 있으면 전진하고, 기름이 없으면 못가듯, 믿음이 그 속에 있으면 힘이 납니다. 이 땅의 광복을 맞이했던 이들이, 마치 베데스다 연못에서 기다리던 환자처럼 38년을 기다렸던 것과 같이, 저도 더 기다려야 합니다. 허나 그냥 기다리면 안됩니다. 힘있게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와중에 더욱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부활은 '돌아올 부(復)'에 '살 활()'입니다. 삶이 돌아옵니다. 돌아가신 분이, 다시 돌아오십니다. 우리 하늘 아빠는 능히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도 하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도 말씀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었으나, 하나님에게는 늘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새 몸으로 일으키시는 날, 우리 어머니도 일어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죽음을 잠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이 천양지차인데, 이것을 잠이라 부르실 수 있는 분이 나의 구주이십니다. 그러니 어찌 힘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생각과 삶이 죽음에 점령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 아빠를 믿으면 믿을수록 힘이 납니다. 마침내 죽음의 제국이 파멸되고, 죽음 아래 갖혔던 모든 이들이 광복의 노래를 부르며 되살아날 것을 지금도 저는 무척이나 고대하는 중입니다. 그 날에 우리 어머니도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좌절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 힘냅니다. 그러니 믿음은 부활을 믿어 죽음 앞에서도 힘내는 것입니다. 풍랑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예수는 다독이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오히려 예수는 그들을 혼내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딸이 죽어버린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두려워 말아라, 믿기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 말씀에는 "두려워하는 사람은 둘째 사망에 처한다" 했습니다.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 이기는 사람들로 부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 생각이 다 달라도, 그들이 전부 믿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죽음입니다. 죽으면 끝이니, 현세에 제 뜻대로 살면 된다고 합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허나 우리는 정반대의 사람들입니다. 이 죽음이 다스리고 있는 세상에 대해 예수는, "두려워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몸을 죽이는 이는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요한이 한 다음의 말이 곧 저의 고백, 우리의 고백입니다.


요한일서 5:4,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디아스포라 여러분, 우리는 남들과 전혀 다른 것 하나를 소망하는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우리가 두려워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다만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볼 뿐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음식을 만드는데, 아버지 손에는 식칼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제가 그 식칼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 아빠 손에 쥐어진 것은 그것이 무엇이더라도 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빠를 믿으면 식칼이 두렵지 않듯이, 하늘 아빠를 믿으니,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 뜻 안에, 우리에게 견디지 못할 시련을 주지 않으시고, 심지어 죽음이라도 아버지 뜻 안에 있으므로, 두렵지 않습니다. 몸을 움추리지 않습니다. 제 뜻 보다 더 큰 뜻이 우리를 온전케 하신다고 했으니, 죽음이 끝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죽음보다 더 큰 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하늘 아빠를 믿는 우리입니다. 


3. 


  슬픔과 두려움의 차이에 대해서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슬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수는 없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은 다릅니다. 슬픔은 아파도 전진할 수 있는 것이 슬픔이요, 두려움은 아파서 뒷걸음질치는게 두려움입니다. 예수는 "손에 쟁기를 붙잡았으면 뒤 돌아보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은 신경쓰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더욱 현실에 충실히 사는 것이, 이미 죽은 자들의 부활을 기다리는 합당한 자세라는 말입니다. 어머니가 죽음을 이길 것을 믿으면, 나 역시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음의 협박 아래 당당히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믿음이 미래와 현재를 연결합니다. 돈도, 명예도, 당 짓는 일도, 모두 죽음 앞에서 안죽어보고자 하는 일 아닙니까? 이러한 일들은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돈 문제도 부활로 이기고, 내 이름 내고 싶은 문제도 부활로 이기고, 편 나누고 미워하고 싶은 문제도 부활로 이깁니다. 예수의 말씀은, "내가 부활할 것이니"가 아니라 "나는 부활이요"였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지금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현재여야 합니다. 매순간 죽음을 극복하는 현재가 우리의 상급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어머니가 천국에 계시다는 말로 위로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 말이 위로가 되었지만, 저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것으로는 참된 위로를 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계신 곳에서의 삶과 우리가 날마다 맞닥뜨리는 일상의 삶이 말그대로 천지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살고 있는 이 삶과 질적으로 차이나는 그 곳에 엄마가 계시다는 말은, 죽은 이와 산 자의 거리를 더 떨어뜨려 놓습니다. 예수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그저 자고 깨고의 차이라 하시며, 아주 가깝게 말씀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엄마가 저에게 멀지 않습니다. 죽어서만 갈 수 있는 먼 거리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마라나타 그이가 오시면 당장 만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속히 올수 있는 그 날입니다. 헤어짐에 절망하기엔, 삶과 죽음이 아주 가깝습니다! 


  만일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라면, 유족들은 현재를 그저 견디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만나려면 죽어야만 만나겠구나 하는 낙담이 찾아옵니다. 하니 목사님이 장례 설교 때마다 늘 말씀하시듯, 죽어서 가는 천국은 버스 정류장 같은 것입니다. 정류장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이 없듯, 천국은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 소망은 부활입니다. 왜 부활이 소망입니까? 죽었던 이들이 부활하는 그 날에, 돌아가셨던 분들이 돌아오는 그 날에, 하늘에서 천국이 내려옵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룹니다.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이 기독인의 궁극적 소망입니다. 그러니 죽었던 사람이 죽어서 행복하게 살더라가 아니라, 죽었던 사람이 몸을 입고 다시 이 땅으로 돌아와, 서로 손을 붙잡고 얼싸안는 결말입니다. 이래야 오늘을 살만합니다. 이래야 소망이라 부를만 합니다. 그 돌아옴의 맨 앞에는 예수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새로운 세상이 있습니다. 모든 잠자는 자들이 깨어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에 뚜렷이 드러나는 마지막입니다. 이 날만을 기다립니다. 이 날을 믿으니 힘이 납니다. 갈라디아서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숨쉬며, 하나님을 굳게 믿어, 하나님의 옳음이 마침내 드러나는 그 소망을 기다립니다."


  이 날을 믿으면, 부활은 미래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가 됩니다. 죽음은 우리의 끝이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이길 거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요한을 통해서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길 것을 믿는 자는, 정말 죽음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지금, 현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헤매지 마세요! 모든 좋은 받음과 모든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옵니다. 

그 빛들의 아빠로부터 말입니다. 

그는 변함이 없으시며, 어느 한 면도 어둔 구석이 없으십니다.

그가 뜻을 정하여 우리를 참말씀으로 낳으시어,

우리를 그의 창조 세계의 이를테면 첫 열매 되게 하셨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빛들의 아버지". 이 구절은 짜장 충격입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빛입니다. 우리는 빛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정말 빛이에요?" 그럼 빛이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이 빛은 가시광선으로 빛나는 태양빛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보다 먼저 있던 빛, 낮과 밤보다 먼저 있던 창세기 1장의 바로 그 빛입니다. 이 빛은 해가 져버린 어둠 속에서도, 산 위에 있는 동네도 감출 수 없는 빛입니다. 그 빛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어 사는 현재가, 바로 하나님의 빛입니다.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믿어, 주저앉지 않고 일어나 사는 현재가 바로 빛입니다. 바디메오를 통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통해, 야이로의 딸을 통해, 예수께서는 빛을 보여주셨습니다. 살라고 명 받은 것이 생명인데, 주께서 명하시는 바는, 일으키시니 일어나 살라는 말입니다. 믿어서 힘내라는 말입니다. 부활로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 속에서 주저 앉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혹여나 누군가를 낙담시킨다면 이것들은 온통 어둡고 더러운 것들이니 덜어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빛입니다. 우리 아빠가 빛들의 아버지시니 우리가 빛입니다. 빛은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끝도 없이 뻗어나가고, 어둠을 밝히며,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습니다. 부활을 믿어, 힘내어 사는 우리가 빛입니다. 현실을 온통 뒤덮고 있는 죽음의 영향력 속에서, 그것이 짙으면 짙을수록 우리가 찬란히 빛납니다. 어둔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어서, 변동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우리 아빠께서, 우리에게 위로부터 온전한 선물을 부어주십니다. 부활을 믿어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힘과 부요함이 우리 아빠께 있습니다. 우리 아빠가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한량없이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것은, 우리 하늘 아빠가 이 죽음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창조세계 속에서 우리를 새로운 창조물이라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죽음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가운데, 그 죽음을 이기는 사람들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마르다에게 자신을 부활할 사람이 아니라 부활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생명을 얻을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활할 사람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생명입니다. 오늘도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으로 살고, 우리가 죽는 그 날에도 다시 부활로 일어날테니, 우리는 지금도 부활이고, 나중도 부활입니다.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변이 캄캄해도 우리는 빛입니다. 곧 죽어도 삶입니다. 다 망해도 새창조입니다. 바로 신실함으로 시련을 견뎌나가는 디아스포라입니다. 제가 그 어떤 말로 이것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믿고 일어나 살아가는 삶으로만 뚜렷하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지금부터 우리가 어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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