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인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저는 그간 이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만 생각했었고, 배울 것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건데, 이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를 때렸을 때, 내가 때린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겪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벨이 죽었을 때, 아담도 살아있었고, 하와도 살아있었으니, 가인이야 말로 죽은 사람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는 무척이나 놀랬을 것입니다. 더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숨 쉬지 못하는 동생을 보고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머리를 감싸쥐고 절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처음 겪은 사람. 죽음의 현장은 처음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 처음으로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2015년 4월 8일 오후 12시 10분에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의 심장이 완전히 멎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저에게 좋은 것만 주셨는데, 저는 어머니에게 드린 것이 없고, 어머니가 그토록 아프셔는데도 병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해서, 모든 기회를 놓쳐버린채 어머니를 죽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생이 죽을 줄 모르고 미워해서 때린 가인이나, 엄마가 죽을 줄 모르고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던 나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2.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한 사람의 죽음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예루살렘으로 나귀타고 들어오신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구하오니, 구해주세요!" 하고서 겉옷을 벗어다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죽으러 들어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왜 죽으셨냐?'고 물으면, 흔히 '우리 죄 때문이에요' 라고 말하지만, 이런 대답은 과정 없이 답만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학 문제 마냥, 답도 중요하지만 왜 저러한 답이 나왔는지 풀이과정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습니까? 잘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람을 두 패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 병든 사람을 나누었습니다. 나누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왜 나누느냐 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둘입니까? 죽이기 위해 둘입니까? 유대 사람들은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은 저주받은 사람이고, 더러운 사람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자신들만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병든 사람들을 한 쪽에 치워놓고, 그들이 죽던 말던, 가난한 사람들을 길가에 버려두고 그들이 죽던 말던,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 성전에서 예배드렸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로마사람 살자고, 다른 여러 민족들을 처들어가서 정복했습니다. 로마 황제를 숭배한다고 하면 살려주고, 숭배하지 않으면, 무참히 전멸시켰습니다. 이 사람들도 둘의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둘로 나누어, 미워하고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둘로 나누어 사랑하지 않으면 죄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할 것없이 예수님에게는 니 편 내 편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로마 사람들이라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마저, 저들이 지금 하는 일을 잘 몰라서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둘은 사랑하기 위한 둘이었습니다. 하나로 가기 위한 둘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무참히도 죽였습니다. 하나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싫어서 사람들은 예수를 쓰러뜨리고, 십자가에 못박아 들어올렸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없는 둘 사이에 끼어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랑없는 둘이 죄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미워하지 않고, 하나될 길을 찾아야겠지만, 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것이 하나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는 우리의 원수입니다. 이 사람없는 둘이 우리가 미워해야 할 유일한 것입니다. 이 죄 때문에 사람이 죽게 되었고, 이 죄가 오늘도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것도 바로 죄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땅에서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죄는 우리 어머니의 목숨도 앗아갔습니다. 그러니 죄는 나의 원수입니다. 나는 죄를 증오합니다. 나는 죄를 철저히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죄와 철저히 맞서 싸우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4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맞서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는 누가 죽인 것입니까? 죄가 죽인 것입니다. 그 죄는 누구의 죄입니까? 둘로 나누어 사랑하지 않는 그 죄가 내 속에 있으니 나의 죄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살인자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동생의 죽음 앞에 목놓아 울고 있는 가인처럼, 예수의 죽음 앞에 목놓아 울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그간 왜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예수를 죽였고, 지금도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 앞에 죄인으로서, 살인자로서 섭니다. 마치 동생의 시체 앞에 서있는 가인같이,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 앞에서 울부짖습니다.


3.  


  사람을 죽인 살인자,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표를 받았습니다. 


창세기 4:14,15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이 표는 살인자의 표입니다. 살인자라도 죽이지 말고, 살 수 있게 지켜주는 표입니다. 우리역시 예수를 죽인 살인자라서, 우리도 이 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살고 있는 것은, 사람을 미워하는 우리가 오늘 즉사하지 않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덕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반전이 벌어집니다. 역전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자리에 아들을 죽인 그 죄 가진 사람들을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가인들에게 다른 표를 받으라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자가 받는 새로운 표입니다.


갈라디아서 6:17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 


  바로 예수의 상처자국입니다. 이 예수의 상처자국은 내가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죽이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표입니다. 내가 아프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입니다. 내가 제물이니, 타인을 제물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제물의 삶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자연을 둘로 나누어 사랑하지 않았던 나를 미워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과 하나된 나, 다른 사람과 하나된 나, 자연과 하나된 새로운 나로서 살아가며, 모든 끊어진 것들을 다시 통하게 합니다. 예수의 상처자국. 그것은 하나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이의 표, 자격, 삶의 이유입니다. 예수의 상처자국 속에서,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존재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느낍니다. 같은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졌다는 사실에 아멘인 사람들이, 새로운 표를 가지고 살인자들에게 전진합니다. 사랑으로 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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