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2:1~20

from 창고 2014. 8. 6. 07:10

(욥 22: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욥 22: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욥 22: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욥 22: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욥 22: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욥 22:6)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욥 22:7)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욥 22:8)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욥 22:9)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욥 22:10)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욥 22:11)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

(욥 22:12)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 별이 얼마나 높은가

(욥 22:13)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욥 22:14)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욥 22:15) 네가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욥 22:16)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터는 강물로 말미암아 함몰되었느니라

(욥 22:17)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욥 22:18)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

(욥 22:19)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죄 없는 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욥 22:20) 우리의 원수가 망하였고 그들의 남은 것을 불이 삼켰느니라 하리라


  우리가 어제 요즘 보고 있는 욥기의 내용을 제목 붙이자면 이렇게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사람도 모른다" 라 붙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 욥의 친구 소발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소발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란 ‘악인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하니 오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내 친구는 악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너 악인이니까, 하나님께 회개해라”는 말만 실컷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 사람이 악인이라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을 그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입구와도 같습니다. 이 귀한 사실을 소발은 몰랐기 때문에 그저 정죄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제 사람을 정죄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정죄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사람을 정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정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정죄입니다. “넌 안돼! 넌 틀렸어! 넌 죄 있어! 넌 희망 없어!”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닙니다. 심지어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사람들조차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고, 희망을 주십니다. 하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에게든 선한 사람에게든 하늘은 공평하게 비를 내리고, 하늘에 걸린 태양은 공평하게 빛과 열을 내려줍니다. 하늘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다 품어줍니다. 그 하나님은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마음이 무너져 절망하거나, 몸에 병이 있거나, 누군가로부터 소외를 당하거나, 경제적 문제 때문에 곤고한 자에게도 하나님은 희망이 되십니다.


  오늘은 욥의 또다른 친구가 등장합니다. ‘엘리바스’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 역시, 하나님을 몰라서 사람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니 사람을 오해하는 사람입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어떻게 잘못 알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3절에 보면 엘리바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이로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했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혹시 누군가 미워하고 정죄하고픈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엘리바스가 생각한 하나님은, 우리가 올바르게 살려고 해봤자 전혀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잘못한 사람 벌 주는데만 혈안이 되어서 올바르게 사는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는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정말 엘리바스가 잘못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으니, 친구를 정죄하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람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엘리바스처럼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올곧게 사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관심도 없으실까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올바르게 사는 것을 정말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며, 그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응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는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고,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스바냐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냥 기뻐하시는 것도 아니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노래도 부르십니다. 왜 입니까? '구원'이라 함은, 나중에 죽어서 하나님께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생활이 올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삶이 올바르게 되지 않으면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이 올바르게 되는 것을 무척이나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사람답게 살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우리의 삶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시고,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믿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부어집니다. 이 하나님의 영은, 믿음으로 세상의 유혹들을 이겨내고 올바르게 살 수 있게 하는 신자의 힘입니다. 이 힘을 힘입어 삽니다. 성령의 삶이 우리의 생활을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합니다. 마치 아무 것도 없음에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던 바와 같이, 그 분의 말과 숨결로 선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우리의 삶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이 일을 기쁨으로 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엘리바스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올곧게 살아봐야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욥에게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니가 의롭게 살아왔던 지난 과거는 다 부질없으니, 너의 잘못이나 생각해보라.”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바스는 욥기 1장에 나오는 사탄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욥을 자랑하셨습니다. 욥 같은 사람이 세상에 없다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도 모르면서 욥도 모르면서 정죄하기만하는 엘리바스의 모습은 우리가 닮아야 할 모습이 아닙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바로 우리의 삶의 이유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왜 오늘 죄와 싸우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기쁨 때문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보며 웃으시는 것, 이것이 우리의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습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 눈치 보며 하나님 무시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비웃으십니다. 그러나 뭇 사람들의 눈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생각하는 사람에겐 하나님은 빙긋이 웃어주십니다. 


  마치 올바르게 자라나는 자녀를 보며 그 부모가 흐뭇해하고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그러한 사이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모르는 동네 아저씨가 아닙니다. 제가 개판으로 살더라도 우리 옆집 아저씨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상관이 있습니다. 자녀가 올바르게 살아갈 때, 아버지는 그것을 뛸 듯이 기뻐합니다. 원수였던 우리를 수양아들, 수양딸 삼아주신 그 분이 바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그 아버지의 기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사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이십니다. 그 분을 이렇게 부르는 건 어떨까요? 그 분은 '효자'이십니다. 세상에서 제일 가는 효자이십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으니 그 분만한 효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이삭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고자 할 때, 이삭은 결코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듯, 예수님도 골고다로 끌려가시면서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이 반항없이 순순하셨습니다. 다 아버지의 뜻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기쁨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뜻에 따라 올곧게 사신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기쁨되는 삶을 삽시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합시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 아빠 앞에서 효자가 되고 효녀가 되는 오늘이 됩시다. 하나님이 오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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