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서론 : '기독교'를 아시나요?


0.

 

  안녕하세요. 저는 오목천동에 사는 윤재덕이라고 합니다. 20068월부터 복음을 믿고, 예수의 뜻을 실천하고자 낑낑대고 있는 서른살 청년입니다(아저씨라 더 많이 불리지만 말입니다). 신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왼뺨대기 운동본부라는 청소년 사회운동 단체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 겪었던 일을 말씀드리는 것이 이 편지의 목적을 밝힐 수 있는 좋은 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느 때와 같이, 저는 교회에서 아이들과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던 친구들이고, 이미 1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하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제가 물었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이라고 생각해?"

 

  제가 들었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한 친구는, '사기극'이라 말했습니다. 뱃속을 바늘로 찔린 것처럼 "!"소리가 나왔습니다. 통증이 가시기 전에 다른 친구가 이야기 했습니다. "부모의 강압이요" 정신이 멍해졌으나 내색하지 않고 마지막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친구 답변은 차마 글로 적는 것이 괴롭네요. 암튼, 그랬습니다. 곧장 다른 교회에 속해있는 아이들은 어떨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속하지 않은 친구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더욱 두려워졌습니다.

 

  아이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아무도 그들에게 이것들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이어지고 이어져, 당신에게도 묻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이 편지를 받는 분들중에는, 기독교인인 분들도 계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도 그냥 물어볼께요.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기독교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길거리에 나가면 십자가가 너무 흔합니다. 사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교회 건물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엇일까요?' 물으면,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듣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건진 기독교의 단상은 '지루함'이었습니다. 청년들과의 대화 속에서 얻은 답변은 '습관'이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무엇'이었습니다. 왜 일까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 오늘날의 기독교는 역동성을 잃어버렸나요? 제가 몇몇 사람들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을 과도하게 일반화를 하고 있는 걸까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장밋빛이 아님을 저는 날마다 확인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요? '기독교'는 다음의 질문에 답을 제공해야 합니다. 1) 당신은 누구인지 2)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3) 당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마지막으로 4) 그 문제의 해법이 무엇인지. 위에 있는 질문들은, 삶에 있어서 정말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들입니다.(기독교에 속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저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기독교에 속해있다면)당신이 알고 있는 기독교가 위의 질문들에 답변을 주고 있습니까?

 

  기독교에 속해있든 그렇지 않든, 기독교가 무엇이고,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아는 것은 결코 의미없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아 보겠다고 승낙한 서른 명 정도의 청소년, 청년들이 이 글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이 두서없이, 지체 없이 써내려간 글을 읽겠노라 결심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 일이 의미로 충만한 일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1. 기독교: '기독'을 담은 질그릇

 

  우리는 기독교에 매력을 느끼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도 자주, 뉴스 기사에는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던질 수밖에 없게 하는 이야기들이 올라옵니다. 그 일들에 대해서 변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잘못된 일들이 많으니까요. 그런 기사들을 볼 때마다 혀를 차기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마치 아들을 보는 저희 부모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스무살 때, 인생의 목적도 없었고, 삶에 대한 의욕도 별로 없었습니다. 대학은 다녔는데 스타크래프트를 전공했고(게임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물보다 술이 더 좋았습니다. 어둑어둑할 때,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게 좋았고, 집에 돌아올 때, 엘리베이터 거울로 보이는 초췌한 제 모습은 정말 한심해보였습니다. 그렇게 좋았다가 한심했다가, 좋았다가 한심했다가를 반복하다가, 20대 초반이 다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저희 부모님은 저 안 버리셨습니다.(너무 감사하게도!) 왜 일까요? 아마도 부모는 극악의 상황 속에서도 자식에게서 희망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요?(<공공의 적>에서 살인범 아들의 살점을 삼키는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를 바라보는 것은 마치 망나니 아들을 보는 느낌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현실들은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면 안돼" 라고 말해도, 자꾸 전기코드에 젓가락 꽂으려는 아들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극악의 상황 속에서도 기독교에서 희망을 봅니다. 마치 저를 보는 부모님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 희망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기독교를 포기할 수 없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서의 해석입니다. 그 성서가 하나님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로부터 언제나 희망을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를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보석을 담은 질그릇'. 기독교는 매끈한 사기 그릇도 아니고, 실용적인 락앤락도 아닙니다. 흠이 파이고 촉감이 거칠거칠한 질그릇입니다. 저는 이런 질그릇이 정말 좋다고 립서비스 하면서, 어떻게든 그릇을 판매해보려는 세일즈맨 내지는 보험사 직원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말한다고 했지만, 사실 저는 그릇 얘기 말고, 그 안의 담긴 '보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기독교인 이유는 바로 그 보석 때문이니까요.

 

  기독교가 담고 있는 그 보석의 이름은 '기독'입니다. '기독'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독'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기독'을 담고 있는 그릇의 의미도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담고 있는 보석

 

  다만 걱정되는 것은 저의 요리 방법입니다. 저는 풋내기 요리사거든요. 인생 경험이 짧고, 생각이 깊지 못해서, 알고 있는 것을 늘어놓을 뿐, 재료를 푹 삶아서 진액을 우려낼 줄 모릅니다. 배운 것은 신학뿐이라서, 신학 용어를 빼고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만약 요리사가 신학적인 용어 범벅의 음식을 제공하면, 먹는 사람은 소화는커녕 입도 대기 싫을 겁니다.

그래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러나 진실하게, 최대한 평범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선 여러분들의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꼭 필요합니다. 음식이 짠지, 싱거운지, 먹기에는 적당한 크기인지, 말씀해주시면, 이 글은 계속 수정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요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요리가 많은 사람들의 잃어버린 입맛을 다시 찾게 해줄 것을 함께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기독'을 설명하기 위한 구름

 

  '홍운탁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에는 붓을 대지 않고, 달 주변에 있는 구름을 그리는 것만으로 달을 표현하는 동양화의 기법입니다.

 

"수묵으로 달을 그릴 때 달은 희므로 색칠을 할 수 없다.

달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달만 남겨둔채 그 나머지 부분을 채색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리는 방법이다."

 

  그리고 저 역시 '기독'을 이야기하기 위해 홍운탁월의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기독'을 설명하기 앞서, 그 주변에 있는 이야기부터 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독을 둘러싸고 있는 그 구름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그 구름의 정체는 ''입니다. 그리고 그 악에 대해서 먼저 말하는 것이, 악의 구름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기독'을 그려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홍운탁월을 위해 이 종이 위에 질문부터 던져 놓습니다.

 

  '악은 무엇일까요?'


2001911

 

  이 사진이 기억이 나실 겁니다. 아니, 기억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미국 한 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빌딩에 거대한 비행기가 쳐박혔습니다. 그리고 세계 무역의 중심을 상징하는 거대한 두 개의 기둥이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 사건 이후, 부시 행정부에서는 오사마 빈라덴을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빈라덴을 숨겨준다고 여겨지는 이슬람 탈레반 무장단체들을 '악의 축'이라 규정했습니다. 그리고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진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덕분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가 탱크와 기관총에 의한 '선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저는 '악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막다른 골목을 맞닥뜨렸습니다. 도대체 악이 무엇일까요? 탈레반 정권이 악이면, 미국은 선이라는 뜻일까요? 이렇게 칼로 두부 자르듯,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걸까요? 더욱 충격적인 것은, '탈레반' 말의 뜻이 '신학생' 이라는 것입니다.(괜시리 제가 뜨끔합니다)

 

  '악이 무엇일까?' 이 질문을 던지면 던질수록, ''이라는 것은 미묘해서, 청문회에서 답변을 자꾸만 회피하는 정치인을 보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떤 말로 규정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가리켜, "너 악의 축이야!" 라고 말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많은 선량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이라크 사람들이 지금도 울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악은 옳지 않은 것'이죠.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죠. '없어져야 하는 것'이죠. ... 이 정도 뿐입니다. 하기사 사람들이 머리 터지게 논쟁하던 문제를, 지금 당장 몇 글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너 악의 축임!" 이런다고 규정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악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의 구체적인 답은 우선 뒤로 미뤄두도록 합시다. 다만, 앞에서 말한대로, '옳지 않은 것', '고통을 수반하는 것', '없어져야 하는 것' 정도로만 생각해둡시다. 우선은 말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우리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는 당분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악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할테니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 "저는 악이 정말 좋아요. 악이 기뻐요! 악 짱!" 이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 편지를 읽을, 아니 인간으로 살아갈 자격조차 없습니다.

 

  허나,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이 편지가 끝날 때쯤, 악의 정체에 대해서 지금보다 훨씬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다음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니까요.

 

1) 악은 무엇인가?

2) 악이 활동하는 방식과 범위

3) 그 안에서의 '기독'

 

  '악의 문제 속에서 그리스도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입니다. 그리고 그 강줄기 위에서, 악이 활동하는 방식과 범위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국에는 악의 현실 속에서 기독교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2000년 그리스도와 비슷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3. 구름을 그려내고, 달을 밝히는 붓 : 성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 시리아 훌라 학살에 대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정부군이 민주화 운동을 하는 시민들에게 발포했고, 어린이들을 포함한 민간인 400여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악의 현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 글을 처음 썼던 초고에는 사령까페 대학생 살인 사건 기사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벌어진 이후 한 달이 채 안된 오늘까지, 이 지구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지구 위의 인간은 단 한번도 악을 저지르는 것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개인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는 인종학살을 하지 말자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지만, 오늘도 계속 누군가를 죽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죽은 것일까요?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런 일들을 보고도 ''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걸까요? 제가 말하는 악은 막 귀신이 떠다니고, 어둠이 덮이고, 이런 주술적인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부당하게 죽고, 억울함을 당하고, 전쟁이 벌어지고 하는 실제적인 것들입니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괴로워 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악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통을 수반하고', '없어져야 하고', '옳지 않은 일'들 입니다. 그리고 이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니까,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럽지만(우리들 중 대부분은 살인 사건 뉴스를 보면서도 과일을 집어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옳지 않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성서를 열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악의 정체에 대해서 모호함을 느꼈습니다. 입 밖으로 뱉지만, 정확히는 알지 못하는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성서는 구름을 그려낼 수 있는 신이 주신 붓입니다. 따라서 '성서를 읽음'은 악의 정체를 밝히는 붓질입니다. 바르게 붓을 놀리다보면, 우리는 짙게 칠해진 구름들을 그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름 사이로 찬란하게 떠오른 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바른 붓질을 위한 사용 설명서' 격입니다. , 이 글은 여러분의 성서해석을 돕는 가이드입니다. 사용설명서를 읽고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이 여러분의 성서 해석을 돕지 못한다면 그저 목요일 마다 트럭에 실리는 폐휴지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가 무엇인가'의 물음의 답변으로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성서를 열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기독교 자체가 성서 해석의 역사니까요.

 

  성서의 이야기가 오늘날 악의 문제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함께 열어 보십시다. 이것은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하나 퍼즐 조각을 구석에도 맞춰보고, 돌려서도 맞춰보고 하듯, 하나하나 성경 구절들의 의미를 다각도에서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글자들을 우리네 현실로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시급하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열어 글자를 읽는 행위는, '세상은 원래 어차피 그래'로부터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할까' 로의 전환입니다. '어차피'에서 '어떻게'로의 전환. 이것이 글자들과의 교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신의 글자들과의 교감. 저는 이것을 '해석'이라 부릅니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딛었을 때, 세계는 '인류의 위대한 약진'이라 열광했습니다. 허나, 한 사람이 성서를 열어 '어차피의 세상'에 대한 '어떻게'를 찾을 때, 그것이야 말로, 인간의 위대한 약진입니다. 신이 바라는 진정한 인간으로의 가는 한 걸음입니다.

 

 < 

오른쪽 사진은 오늘 찾은 사진들 중에 베스트

 

  그리고 또한 성서 해석의 희열과 기쁨은

i) 신학생(탈레반?!)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ii) 모든 이가 성서를 열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독교가 이어받은 종교개혁의 전통입니다.

iii) 그리고 당신에게도 성서에서 오늘을 발견하는 기쁨이 열려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성서 안에서 바른 의미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빛나는 퍼즐 조각이 되고, 그 퍼즐 조각들이 하나의 위대한 그림에 맞아 들어가고, 그 위대한 그림이 현실이 되는 충격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해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 말고도 당신이 성서를 열어봐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많습니다.

 

당신의 자리

  이미 우리보다 먼저,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난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남긴, 자신들의 여행에 대한 지침들을 참고 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걸으려는 이 길을 위해서 기도하는 여행 후원자들도 있습니다.


  혼자하면 어렵지만, 함께 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자의 의미를 깨닫도록 도우시는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의미의 주관자이십니다이 여행에 필요한 것은, '집중력'이라는 물통과 '상상력'이라는 튼튼한 신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 안에 자신을 담그려는 '의지'라는 두 다리입니다.

 

  우리는 다음의 순서를 따라, 우리는 약 두 달에 걸쳐, 악의 문제에 대한 성서해석을 진행해나갈 것입니다. 인간의 악의 문제에 답하는 신의 위대한 서사시를 보게 될 것입니다.

 

 

0. 서론-지금 이 편지

1. 에덴에서

2. 갈데아 우르로 부터

3. 이집트로부터

4. 바빌론으로부터

5. 이 사람을 보라

6. 악으로부터

7.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고 이 편지들을 다 읽고나면,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입니다.

자진해서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그리고 편지를 읽어가다가, 주변에 이 편지가 필요한 친구가 있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알려주세요. 직접 만나거나, 아니면 당신을 제가 만나거나, 아니면 우편을 통해 전달해 드릴 수 있습니다. 메일이나, SNS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별 다른 이유는 아니고, 손에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을 전달해주고 싶어서요. 이참에 프린터도 하나 장만했답니다.

암튼,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편지 내용을 기대해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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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가 여기서 끝났더니, 많은 사람들이, "이게 끝이냐? 왜 중간에 끝나냐? "고 물어왔습니다.

끝일 리가 있나요. 이제 시작입니다.

 

 

 

 

 

같은 글자들 앞에 모이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2012.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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