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관해 생각해보자. 진작 했어야 했다. 

 

1. 

  성경에 목사로만 번역되는 단어는 없다. 주로 목자로 번역되는 포이멘 에베소서 4:11에서만 목사 번역한 사례가 있을 뿐이다. 이때 포이멘 교사(디다스칼로스)’ 묶여있고,  문장은 에베소서 4:11에서 시작되어 16절로 마무리 되는 거대한 문장의 일부이다.

 

에베소서 4:11~16, 개인번역

그리고 그이는  편으로  사도들을 주셨고

다른  편으로 예언자들을 주셨고

다른  편으로 좋은 소식 전하는 자들을 주셨고

다른  편으로 목자들과 선생들을 주셨고

(τος δ ποιμένας κα διδασκάλους),

거룩한 이들의  갖춤을 위하여

  섬김의 노동 속으로,

   메시아의 몸의 집짓기 속으로

모든 우리가 당도할 때까지

   신실함의 일치와 하나님 아들의 지식 속으로

  끝내주는 남자 속으로,

   메시아의 넘침의 성숙의 정도 속으로,

이는 우리가 결코 유아들로 있지 않기 위함입니다,

(유아들은) 파도에 흔들리고 

벗어나게 하는 기술에 능수능란한 사람들의 

주사위 안에서 가르치는 모든 바람에 끌려가는데,

그러나 우리는 사랑으로 그이 속으로 모든 것을 자라게 합니다

그이는 머리이십니다, 메시아, 그이로부터 

모든 몸이 모든 함께 연결되고 

공급의 모든 연결을 통해 결합되며

하나의  부분들의 측정 안에 있는 작동을 따라

몸의 자람ν αξησιν το σώματος) 만듭니다, 

사랑 안에 있는 그이의 집지음 속으로.

 

   구절을 통해서   있는 것은,

 

-목사(목자) 교회 교사는 바울에게는 동일선상에서 논의되는 직책이며,

-예수의 몸을 구성하고 자라게 하는 일부이며,

-목자의 목적은 성도들이 교회라는 몸에 걸맞도록 하나님 아들에 관한 지식 차원에서 섬길 것이 분명히 드러나있다는 것이다.

 

2.

  베드로전서 5:2도 동사 형태로 목자의 역할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도 장로라 말하고 있는 베드로가 동료 장로들에게 권면하는 대목에 등장한다. 위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교회의 어른들(장로)이 맡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베드로전서 5:1~7, 개인번역
그러므로 장로들,  여러분 안에 있는 그들에게 나는 권면합니다
나는 동료 장로이자 메시아 겪으심들의 목격자이며
또한  밝혀질 뚜렷(주장) 연합한 자입니다

 

당신들은 목양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떼를 (감독하며),

사명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따라 기꺼이,

부끄러운 이득으로가 아니라 성실로,

기업들을 군림하듯 말고, 양떼의 본이 되어서.

그리고 목자장이 나타니실 ,

여러분들은 뚜렷 안에서 시들지 않는 월계관을 받게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의 역할은 곧 장로의 역할로 취급되었고, 이것이 장로회의 근간이다. 감리회는 '감독'이라는 단어를 보고 다른 직책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서로 혼용 가능하다. 목사, 장로, 감독. 그런데 사실 감독은 '돌보는 자(ἐπίσκοπος)'라는 의미이므로, 양떼를 가르치고(교사), 이끌고(목자), 돌보는 역할(감독)이 교회의 어른들에게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도들은 자신들을 선배 장로격으로 취급한다. 

 

3.

  사도행전 6:1~7에서 희랍 과부들이 유대 과부들 우대에 관한 문제 제기가 있었고, 이 문제는 사도들에 의해 다음의 결정으로 이어졌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할 것

-일곱 사람을 선정하여 구체 사역을 균형있게 하도록 할 것

 

  만일 목사를 이 사도행전 6장 이야기를 근거로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그것은 목사를 사도격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당대 늘어나는 제자들과 과부, 구제에 있어서 불균형 등의 문제는 빼놓고, 저 결정만 초월적인 철칙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사도는 목사의 본이 되지만, 목사는 사도일 수 없다. 따라서 사도의 권한과 상황을 목회자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는 없다.

 

  오늘날 '목회직'은 종교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장로 제도, 감독 제도를 중심으로 개신 교회가 분화되었던 것도 종교개혁 이후의 현상이다. 그리고 각각의 제도들은 해당 명사가 등장하는 성구들을 권위의 토대로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는 로마 가톨릭의 제도를 극복하려는 모양을 갖고 있으면서도,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다(이 점에 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루터의 경우 가톨릭 교회의 제도적 개혁을 추구하지 않았으므로 더더욱.

 

  결론은 나는 이미 목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자리 잡은 제도 안에서의 직책을 부여 받지 않았다. 나는 감독도, 교단 소속 목사도 아니다. 더불어 여전히 가르치고 있고, 더욱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거룩한 이들의  갖춤을 위하여

  섬김의 노동 속으로,

   메시아의 몸의 집짓기 속으로

모든 우리가 당도할 때까지

   신실함의 일치와 하나님 아들의 지식 속으로

  끝내주는 남자 속으로,

   메시아의 넘침의 성숙의 정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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