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성경아카데미> 장학금 심사에 제출했던 설교문(23/02/17)

 

1. 

  열린 교회 청소년 여러분, 여기 폐허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돌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저 돌들은 얼마 전까지 하나님의 집을 구성하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 자리에 스산한 바람만이 불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잿더미가 되어버린 도시를 보며 고개를 떨구고, 아낙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비명과 같은 울음소리가 도시를 울립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도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침공을 받았고, 이집트가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유다는 떠오르는 신흥 제국의 무력 앞에서 무력하게 당해버렸습니다. 유다의 귀족들은 모조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을 떠난 이들도 있었습니다(출애굽의 민족이 이집트로 다시 들어가게 되다니요!). 그 유명한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이야기가 펼쳐지던 언약의 땅 위에는, 이제 포로로 끌고 갈 필요조차 없는 부랑아들만이 남았습니다. 그 부랑아들 중 하나가 어느 예언자의 노래를 구슬프게 흥얼거립니다.

 

  예레미야 26:4~6
  '율법에 따라 순종하지 않으면

  주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성전은 실로처럼 되고

  예루살렘은 세상 만민의 저줏거리가 되리라'

 

  이 노래의 주인공은 ‘예레미야’라는 사람 입니다. 그는 그 옛날 언약궤를 빼앗긴 도시 실로처럼, 언약을 저버린 유다는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 한탄했습니다. 그는 20여년간 한결같은 메시지를 전했고, 유다의 고관들과 백성들도 20여년간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듣고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왕은 그의 기록들을 모두 불사르고 죽이려고 했으며, 예레미야와 같은 메시지를 예언하던 동료 예언자는 실제로 살해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언자의 입을 막고, 자신들이 누구인지 고집스럽게 망각하려 했던 언약 백성은, 결국 시날 평지의 바벨 공사 현장을 떠나는 사람들 마냥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저주는 현실이 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폐허 위 구슬픈 옛 노래 뿐이었습니다.
    
2. 

  그런데 이 예레미야의 예언 한 복판에는 특별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저주와는 어울리지 않는 벅찬 희망의 메시지, 그리고 그것은 언약에 관한 표현들로 코딩 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예레미야 33장 20절에서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21절의 “나의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이 보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집을 짓고 싶어하던 다윗에게,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지어 주겠다는 언약입니다. 즉 다윗이 아닌, ‘다윗의 자손이 그 집을 성전과 함께 지을 것’이고, 그 다윗의 자손에 의한 ‘다윗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폐허 위에서 이 언약을 상기하는 유대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이 언약이 이뤄진다는 건, 황무지 위에 싹이 돋아나, 그것이 아름드리 정원이 되는 기적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1절에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보입니다. 민수기 25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순결 하기를 열망했던 레위 지파의 비느하스와 ‘평화의 언약’을 맺으시고, 그의 자손인 ‘레위 지파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시지요. 그러나 현실은 제사장들은 포로들이 되었고, 그들이 일하던 성전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22절에는 창세기의 아브라함 언약도 보입니다. 바벨탑의 반역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이후(창세기 11장), 하나님은 우상을 숭배하던 집안의 아들이었던 아브람을 불러내어(창세기 12장) 그의 이름을 바꿔주며(창세기 17장),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 위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고, 그 자손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22:17,18).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들은 유다와 함께 망한 듯 싶습니다.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는 커녕, 그 땅 위에는 포로로 끌고 갈 가치도 없는 부랑아들 뿐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파국을 말한 예레미야는, 그럼에도 이 모든 언약들을 하나로 모아 절망을 소망으로 뒤집습니다!

 

1) 그는 다윗의 자손은 반드시 왕위에 앉을 것이라 말합니다(21절).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언약대로라면 그 다윗의 자손은 성전을 재건할 것입니다. 이 말은 적어도 무너진 건물 성전은 다윗의 자손이 짓는 영원한 성전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짐작 하게 합니다(히브리서 9:24).

 

2) 그리고 성전이 세워진다면, 제사장 나라도 회복될 것이고, 다시 하나님의 용서와 평화를 온 열방에 선언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레미야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하늘의 별들과 땅 위의 모래들”의 정체를 밝힙니다.
 
  넘치도록 번성하는 그들은 바로 이 다윗의 자손과 레위의 자손 이라고 말입니다(22절). 따라서 예레미야 동시대인들이 겪는 파국은 언약의 종결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는 이 언약들로 구성된 원대한 소망을 창조 질서에 결부시킵니다. 그는 낮과 밤의 질서 또한 언약이라 말하며, 이 창조 질서가 확실한 것과 같이 이 서로 연결된 언약들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불순종을 고집하다 땅에서 쫓겨난 언약백성에게 말입니다.


3.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렀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이들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유대인들은 힘겹게 무너진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레미야가 말한 언약들의 총결산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배자만 바뀌었을 뿐 유다는 여전히 포로 신세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역사는 비극적으로 반복되었습니다. 헤롯이 막대한 자금을 부어 리모델링까지 했던 두 번째 성전은, 로마에 맞서 전쟁하려던 유대인들과 함께 다시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A.D.70).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지 600여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억한 사람이라면, 다시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보며 비탄에 잠길 수는 있으나,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절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약백성의 정체성은 건물이 아니라 언약에 있고, 그 정체성은 폐허 위에서도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무렵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킨 끔찍한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제국과 싸우자는 동족 유대인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먼저 알았던 것처럼 조상 때부터 상속받은 땅을 팔아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자신의 손 때 묻은 집과 고향을 기꺼이 등졌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도망자처럼 떠돌며 고난 받던 이들의 호흡에는 찬양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6:25). 마치 다윗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타국 여기 저기에 정착한 이 나그네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제사장’이라 부르고 열방을 향한3 하나님의 속죄를 선언했습니다(벧전 2:9, 롬 15:16).


  우리에겐 이 기이한 사람들의 초기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 기이한 결정과 여정을 이끈 한 사람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사람과 언약들의 관계를 깊이 탐구해봐야 할 것입니다. 역시나 언약으로 코딩 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서 천천히 읽어봅시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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