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해석 입문>이라는 책의 p.17에 있던 단의 문장

 

  "주전 2,3세기 경에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될 떄 '마샬'이라는 단어가 그리스어 '파라볼레'로 번역...사실 칠십인역이라 불리는 번역 성경에서는 두곳(전 1:17, 시락 47:11)외에는 마샬이라는 용어를 번역하기 위해 파라볼레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제대로 번역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일단 시락서(집회서) 47:11에는 파라볼레가 나오지 않으며, 저 '외에는'이 포함된 문장의 의미가 잘 잡히지 않는다(뭐 하나 실수한 것이 나오면, 번역 전체를 의심스러운 시각으로 보게 되기 때문일지도). '마샬-파라볼레'를 마가복음 4장에 적용한 것은 최근 일이었는데,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마샬-파라볼레'가 언급되어 반가운 마음에 흔적들을 추적해갔다. 그런데 사유의 방향은 예측하지 못했던 엉뚱한 곳으로 흐른다.

 

전도서 1:17, LXX, 개인번역 

그리고 나는 나의 심장을 주었습니다

지혜와 깨달음을 깨닫는,

그래서 나는 파라볼레들과 에피스테메 깨달았습니다,

 이것들은 실로 바람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κα δωκα καρδίαν μου

το γνναι σοφίαν κα γνσιν,

παραβολς κα πιστήμην γνων,

τι καί γε τοτ στιν προαίρεσις πνεύματος·

 

  마소라에서는 "미친 것들(홀렐라)", "미련한 것들(써클루트)" 번역한 것을 LXX에서는 "파라볼레들" "에피스테메" 부정적인 늬앙스들을 제거하여 번역했다. 이로인해 "바람을 추구하는 " 허망하다고만 해석할  없게 하는, 모종의 '비틈' 발생한다. 사실 마소라 판본만 보더라도, '바람을 욕망하는(라욤) '이라 옮겨야 옳다. '써클루트' 전도서 안에서 "미련한 ", "어리석은 "으로 번역되기 때문에(홀렐라는 성경 전체에서 여기  번만 사용된다),  문장 전체가 쓸모없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해석을 갖게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차치하더라도, 주목해야 하는 것은 파라볼레의 복수형(히브리어로는 '마샬림')이 에피스테메의 단수형과 조응한다는 사실이다. LXX 역자들에게 이 둘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2013 10월에 써둔 메모에서 에피스테메를 찾았다. 다빈치가 과학과 예술을 접목시킨 것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양한 분야를 하나의 에피스테메로 연결한 것이다.  에피스테메는 사상이라기 보단 극것의 표현 방법. 다빈치에게 있어서  하나는 미술이었다. 사물의 표현."

 

  키케로의 글을 번역한 것에도 에피스테메가 등장한다.

 

<De Oratore>, 60(크라수스의 말이다), 개인번역

"나는 묻고파요.

통치권(사령관) 반하든지,

통치권(사령관) 위하든지,

군대일 경험 없거나

종종 또한 영토나 해안접경 지역에 관한 지식없이도

이야기   있는지 없는지 (묻고파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법을 인준하고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도 (묻고 파요)

그리고 원로원에는 공화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도시 일에 대한 가장 탁월한 조사와 지혜(에피스테메) 없이 말할  있는지 묻고파요.

 

sine summa rerum civilium cognitione et prudentia;

연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있는지 묻고파요.

마음에 불을 붙이거나 가라앉혀서 움직일  있는지,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과 관습에 관해서 철학자들이 설명한 모든 이치를 면밀히 조사도 않으면서,

  하나만이 연설자 속에서 지배적이기 때문이에요."

 

  나는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프루덴티아를 에피스테메로 옮기고 있다.

 

  플라톤의 글들에서도 에피스테메에 관한 번역과 메모가 있다. 향연에서는 아예 에피스테메를 주제로 나눈 이야기가 있다.

 

<향연>, 100p., 개인번역

"...그는 한편으로는 결코  자신 속에서  자신과 같은 것을 갖지 않음에도 같은 모습으로 그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새롭게되면서도 오랜 것들은 잃어가지요. 머리털, , , ,  전체가 그러합니다. 몸만 그런 것이아니라, 혼도 그래요. 태도, 습관, 자기 주장, 욕구, 기쁨, 고통, 공포. 이러한 것들은 결코  동일한 것으로  각각에게 주어진적이 없어요. 오히려 생겨나고 없어지고 하지요. 지금  시점에서, 이보다 훨씬  이상한 것은, ('에피스테메'에요) 에피스테메도 우리에게서 없어지다가, 생겨나다가 하면서, 결코 동일한 에피스테메였던 적이 없었다는 거에요. 오히려 모든 에피스테메 하나하나가 이러한 과정을 겪습니다.   

  에피스테메로부터 사라짐이 있어서, 때로는 에피스테메 '마음씀'이라 불려요. 왜냐하면 망각은 지식의 사라짐이라서, 잃어버린 것을 대신하여 다시 새로움을 넣어, 에피스테메의 기억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것이에요.  결과 에피스테메가 (언제나)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요."

 

<국가> 1(p.73~78), 개인번역

"그런데 무식한 이는 어찌할까? 

한편으로 지식있는 이보다 넘치게 못하, 

이와 비슷하게 지식없는 이보다도 넘치지 못하겠지?"

 

  이 문장을 번역하면서 에피스테메에 관하여 "테히네를 갖춘 전문지식"으로 필기를 해두었다. 

 

  그래서 소결론,

1. 파라볼레들이 모여서 하나의 지식 체계를 갖춘다면, 그것을 에피스테메로 부르는듯 하다.

2. 플라톤에 말하는 에피스테메는 지식의 보존성, 사유들을 붙잡하 항구적으로 만드는 체계처럼 읽힌다.

3. 에피스테메와 프루덴티아 사이의 연관관계는 좀 더 탐구가 필요하다(선생님의 말을 확인 없이 수용한 부분).

4. 마샬 하나는 에피스테메를 구성할 수 없다. 마샬들이 모여 에피스테메가 될 수는 있을 것. 이것이 LXX역자들의 입장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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