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 제일 교회 성도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윤재덕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성경 이야기에 죽고 사는 사람들이니, 거두절미하고 성경에 나오는 옛날 도시에서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괜찮으시지요?

 

  여기는 마케도니아에 있는 빌립보라는 도시입니다. 젊은 날을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며,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에 매진했던 군인들이 이 도시에서 노인의 모습으로 여생을 마무리하곤 했지요. 이 자리에도 퇴역 군인분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평생을 헌신하신 여러분의 노고를 국가가 기억할 것입니다. 가정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빌립보도 꼭 그러한 도시였습니다. 퇴역 군인들이 모여 지난 날을 추억하며 이야기 나누는 장면을 여기 저기서 볼 수 있었을 거에요.

 

  그리고 이곳에도 여러분과 같은 교회, 즉 예수만을 온 창조세계의 왕으로 섬기는 이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생긴지 얼마 안되는 공동체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있었지요. 두 발로 걷고자 불안하지만 필요한 발돋음을 내딛는 아기처럼, 빌립보 교회 역시 제국의 선전과 압박 아래서도 불안하지만 모두를 위해 꼭 필요한, 인간다운 삶의 열매를 맺고자 했습니다. 이곳에 예수의 사람들이 심기고 자라게 된 경위에 관해 말하자면, 이 사람에게 벌어진 한 밤 중의 환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이야 환상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환상 이야기를 빼놓고는 성경을 읽을 수도 없어요.

 

  한 밤 중에 환상을 겪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바울 선생님입니다. 바울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유대에서 시작된 복음은 사마리아를 지나, 이방인의 땅에서도 열매 맺기 시작했지요.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빛나는 역사입니다. 바울은 그 복음의 선봉대로서 유대의 오랜 예언이 마침내 예수에게서 이뤄졌다는 특별한 이야기를 전하는데, 삶을 바쳤습니다. 사람들에게 로마의 가짜 뉴스에 속지 말고(디도서 1:14) 이 진실한 이야기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울을 성령께서는, 비두니아로도 못가게 하시고 아시아로도 못가게 하시더니, 바울은 그 날 밤 환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환상 속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 하나를 만났어요.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우리를 도와주세요"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이지요? 

 

  이 말에 우리의 바울은 곧장 마케도니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 했던 빌립보라는 도시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를 대표해서 여기 앞에 계신 권사님이 큰 소리로 읽어주실 거에요. 사도행전 16:12 입니다.

 

사도행전 16:12, 새번역 

우리는...거기에서 빌립보에 이르렀다. 

빌립보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으뜸가는 도시요, 로마 식민지였다.

 

  바울은 이 동네에 며칠 머물면서 또 유명한 사람 하나를 만납니다. 여러분, '루디아'라고 들어보셨지요? 혹시 여기 여전도회 이름이 루디아는 아닙니까? 루디아는 바울의 사역을 도왔던 강인한 여성이었습니다. 고급 옷감을 판매한 거상이기도 했어요. 바울은 빌립보에서 이 루디아를 만난 이후 별별 일을 다 겪습니다. 점치는 소녀를 구해주는 바람에 도시에 소동이 벌어지고, 그 동네에서 발가벗겨저서 매를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게 되더니 함께 갇혀있던 실라와 함께 찬양을 부르기도 하고, 수갑이 끊어지고 감옥 문이 열리는 일이 있었고, 열린 감옥 문을 보고서 자결하려는 간수를 말리고, 그 집 식구들에게도 예수께서 이루신 유대인 이야기를 전하고, 그렇게 복음을 영접한 루디아와 간수의 가족을 중심으로 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한 밤 중에 환상을 본 결과, 이 로마 식민지인 빌립보에도 예수 공동체가 결성되게 된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간수의 물음에, 바울과 실라가 했던 답변이 유명합니다. 옆에 있는 성도분이 읽어주시겠어요?

 

사도행전 16:31, 개인번역

주 예수께 신실하세요.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안이 건강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빌립보 교회가 생겼고,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도 예수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요. 그런데 어느 날, 이 빌립보 교회에 불안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다름 아닌 빌립보 교회의 시작을 함께 했던 바울이, 저 에베소라는 옆동네에서 투옥 당했고 심하게 매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에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걱정하면서도, 덩달아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투옥되었던 바로 그 이유가 빌립보 교회의 사람들과도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메시아의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로마 황제 숭배가 극심한 빌립보입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 때문에 고생했다면, 빌립보에서는 더 한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배송되었습니다. 반갑고도 그리운 발신자의 이름이 적힌 편지가 말입니다.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간수는 급하게 편지를 뜯었고, 루디아를 비롯한 빌립보 교회 사람들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인삿말을 지나 편지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있었습니다.

 

2. 

 

빌립보서 1:12~17, 개인번역

 

그런데 나는 너희들이 알기를 바랍니다, 나의 가족 여러분, 

지금 제가 겪고 있는 것은, 복음을 더욱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저의 묶임이

로마 시위대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메시아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이 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주 안에서 신뢰하게 되었기에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교회 여러분, 이 편지 내용을 들었던 빌립보 교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복음의 사람인 바울이 투옥된 것은 누가봐도 복음이 막힌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물줄기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갇힌 와중에도 '메시아'라는 그 오랜 이야기 속 직무가 어떻게 예수라는 사람에 의해 수행되었는지를 뚜렷하게 드러냈습니다. 그 결과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시위대들도 바울의 가족이 되는 전환이 벌어졌습니다. 죄수와 시위대가 메시아의 이야기를 공유할 때, 투옥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두려움 없이"는 두려움을 견딘다는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감옥은 그들을 만나게 했던 고마운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두려움은 이 새로운 신뢰 관계 안에서 사라졌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지역 전역을 돌아다니며, 예수 믿는 이들을 추적해왔습니다. 강성 유대인들에게 메시아가 된 예수의 이야기는 "나사렛 파"라는 이름으로 이단 취급을 받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은 고약한 방식으로 이 나사렛 파를 핍박해왔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을 황제 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혐의로 그들을 로마에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요?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것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을 속이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면서, 예수 믿는 이들의 싹을 짓밟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퇴역 군인들과 함께 살던 빌립보 교인들도, 언제 유대인들의 밀고에 의해 투옥될 것인지 노심초사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심지어 그 유대인들은 때로는 자신들도 예수를 인정한 것처럼, 예수 따르는 사람들 행세를 하며 공동체 안으로 몰래 잠입 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사도로, 때로는 예언자로 자신들을 속이며 어떻게든 예수 공동체를 파멸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신생 공동체로서 교회는, 누군가가 몰래 자신들 안으로 들어와서 그릇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닌지 늘 주의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편으로는 어떤 이들은 질투와 말 싸움으로, 

다른 한 편으로 어떤 이들은 

만족함으로 이 그리스도를 선언한다.

 

한 편으로는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내가 이 복음의 변호를 위하여 누워있음을 알고 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 어떤 이들은 편 나눔으로 

이 그리스도를 알린다, 순결하게가 아니라, 

나의 이 묶임들에 고통을 줄 생각을 한다.

 

  메시아를 선언하는 일은 다름 아닌 오랜 예언의 성취를 말합니다. 언약 백성의 오랜 포로 기간 끝에 마침내 메시아가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고, 그 메시아를 통해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그 회복이 북 이스라엘의 포로였던 사마리아 사람들도 회복시키며, 한 분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열방에 이를 것이라는 그 예언이 마침내 메시아를 통해 이뤄졌다는 소식입니다. 곧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두고서 두 패로 나뉩니다. 한 쪽에서는 이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메시아의 통치에 참여합니다. 다른 한 쪽에서는 복음을 필요없는 것, 해로운 것, 더러운 것으로 취급합니다.

 

  이는 마치 거라사 지역에서 벌어졌던 일과 같습니다. 오랜 세월 자신을 군대라고 믿고 몸과 맘을 상하게 하고 있던 사람이, 메시아의 도래로 인해 회복되었을 때, 이 메시아 통치의 소식을 선언하던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 회복의 당사자였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떠나시려는 예수께 함께 따라가고 싶다고 했으나, 오히려 예수는 그를 자신의 가정과 마을로 파송하셨습니다. 보냄 받은 그는 메시아 예수의 통치를 기쁘게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돼지를 치던 이들은, 예수의 통치로 인해 자신들의 재산이 바다 속으로 사라지자, 온 마을로 달려가 그 위험 인물이 벌인 일들을 전하고, 급기야 예수에게 자신들의 지역에서 떠나달라 요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의 소식이 환호와 비아냥를 가져올 때, 그럼에도 이 예수께서 이루신 옛 이야기의 소식이 로마 지역 곳곳으로 퍼져나갈 때, 바울은 자신의 처지와 무관하게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 무엇이겠어요? 모든 방법으로, 

즉 외식으로든 참으로 하든, 메시아는 알려집니다, 

그리고 저는 이 안에서 기뻐해요.

또한 앞으로도 기뻐하고자 합니다.

 

  어찌되었든 예수의 소식이 온 땅으로 퍼져나가는 것. 그 오랜 예언이 마침내 성취되었다는 새로운 이야기가 퍼져나가고, 그 이야기 안에서 사람이 새로이 태어남을 알기에, (또 자신이 그렇게 새로 태어났기에) 바울은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새로이 태어난 이들인 빌립보의 제자들에게 그 새로이 태어난 사람의 형상으로 말을 건내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복음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예리하고 넓은 시야를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이 내용을 듣고 있는 빌립보 교회 사람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들은 걱정스러운 상황이 해결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요원하기 때문에 또 다시 걱정하며 마음 졸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정작 위기의 순간에 그들의 시야에는 자신들의 처지 외에는 다른 것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망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지요. 바울의 투옥은 바울의 망함이요, 바울의 망함은 복음의 망함이요, 복음의 망함은 자신들의 망함이라 말입니다. 유대와 로마의 위협 속에 자신들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존재의 소멸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통 속에 기뻐하고, 그가 기뻐하는 이유는 복음의 나아감 때문이며, 그 나아가는 복음이란 다름 아닌 메시아 예수의 부활의 소식입니다. 망했다가 다시 일어난 새로운 아담의 소식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망함을 지고서, 스스로 망했다가 다시 일어선 한 사람의 소식이고, 그 사람이 우리의 왕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니 이 희망의 소식을 전하는 이들에게 감옥은 왕의 통치 안에서 친구를 만나는 곳이었듯, 삶이 감옥과도 같다면, 오히려 좋습니다. 상상하건대 루디아를 비롯한 빌립보 교인들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형제된 바울의 글을 보며, 자신들의 시야를 넓히고,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는 삶을 배워나갈 수 있는 새로운 시간을 누리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3.

 

  여러분, 교회는 망할까요? 코로나 상황 속에서 마치 교회가 망할 것처럼 걱정하며 기도하는 많은 형제, 자매들을 보았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바울이라면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망할 것 같은 두려움은 바울과도 어울리지 않고, 우리가 함께 모시는 왕에게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죽을 것은 죽고 살아날 것은 살아날 것입니다. 살아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땅에는 필요 없는 것이기에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을 붙들어매고 우리는 바울처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어떠한 파국 속에서도 기쁨을 전하며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것 사람이고, 부활은 바울을 그런 사람으로 새롭게 했습니다.

 

  삶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은 우리의 모태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거기서부터 탯줄을 끊고 새로이 태어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섬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망할 것 같아서 두려워할 때, 교회는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파국의 순간에서도 모든 이들과 복음 안에서 형제가 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지, 파국 속에서도 복음의 나아감을 기뻐할 수 있는지가 교회의 숙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파국의 상황은 친구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적절한 배경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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