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1~7
고린도후서 연구를 시작합니다. 2017년 1월 4일부터 화요일~금요일, 수원역 스타벅스에서 매일 아침 여덟시에 진행합니다. 제가 번역한 텍스트를 사용하고, 주로 고든 피와 톰 라이트의 책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
0. 네번째 편지에 관하여
먼저 고린도전서 연구를 잇는 강의이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와의 관계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지역에 있는 에클레시아는 총 다섯 번의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세번째에 해당하는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 5:9
앞서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에게 포르네이아하는 이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썼습니다.
고린도전서 7:1
그러면 여러분이 적어 보낸 문제들을 살펴봅시다.
이 구절들은 고린도전서 외에도 고린도 에클레시아와 관련된 두 개의 편지가 더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보려는 고린도후서는 네번째 편지가 됩니다. 이 네번째 편지에 해당하는 것이 고린도후서 1~9장입니다. 그리고 10~13장은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문제가 해결은 커녕 악화되자, 바울이 다시 써서 보낸 다섯번째 편지입니다. 이제 세부 내용들을 본문 안에서 확인해봅시다.
1. 사도와 하나님의 가족이 에클레시아 모두에게
고린도후서 1:1~7
하나님의 뜻을 통해 메시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가족 디모데는 코린토스에 있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게, 더불어 아카이아 전역에 있는 거룩한 이들 모두에게 (편지합니다).
바울은 늘 그렇듯, 이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를 명시합니다. 발신자는 바울과 디모데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통해 메시아 예수의 사도된" 사람이라 말합니다. 이 인삿말에 들어간 짧은 자기소개는 고린도후서 전체의 주제가 됩니다. 지금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바울과 세 번의 서신교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사도가 아닐 것이라는 강한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실천에 대해서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바울의 말들을 통해서 개인과 공동체의 존재와 실천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디모데를 보낼테니 따뜻하게 맞아주라 말한 바 있습니다(고린도전서 4:17). 그러나 아마도 디모데가 바울에게 가져온 소식은 바울을 크게 실망시켰을 겁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제시한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었고, 게다가 바울 자신에 대한 의심이 더욱 커진 상황을 보고받았을테니 말입니다.
디모데를 소개하는 말인 "가족"은, 신약성경의 "형제"를 번역한 말입니다. 메시아의 형제에는 자매들도 포함되기 때문에 남성 우월주의를 반영할 수 있는 번역어들을 신약성서의 주제에 비추어 새로이 번역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여성을 배제하기는 커녕, '여성됨'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성경에서의 여성은 아담과 동등한 파트너로서, 그리고 이스라엘 이야기의 주된 모티브로서, 부활의 첫번째 증인이자, 남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는 제자들로서, 그리고 에클레시아의 지도자로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최종 결말인 새 예루살렘은 여성명사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의 결말은 성경에서 영감을 얻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위대한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 편지의 수신자에 대해서도 살펴봅시다. 일단 1차적으로는 고린도 에클레시아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또한 이 편지는 고린도 에클레시아 뿐만 아니라, 아카이아 지역에 속한 에클레시아 전체가 돌려보았던 '회람서신'입니다. 이 점은 베드로전서나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신약의 서신서들은 교회가 돌려보는 편지로서 개별 교회의 사안을 다룸과 동시에, 전체 교회를 위한 공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아카이아 지역이 어디인지 지도에서 찾아볼까요?
'거저'가 여러분에게
평화도 하나님 우리의 아빠로부터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바울은 서신서에 흔히 쓰이는 '거저와 평화'의 인삿말을 덧붙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별 뜻 없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여기기 쉽지만, 이 거저와 평화는 당대 주류 사상과 충돌하는 이질적인 개념들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 '평화'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로마에 의한 평화(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국가의 목적이 국가의 번영이듯, 당시 세계를 재패한 제국이 주창한 목적이 평화였습니다. 평화를 모르는 사람 없었고, 날마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던 부녀자들이 고대한 바로 그 평화였습니다. 하지만 무력이란 수단을 통해 평화를 가져다 주겠다는 제국의 꿈은 점점 멀어졌습니다. 평화라는 아름다운 목적이, 폭력이라는 무자비한 수단을 정당화하는 가운데, 로마 제국 안팍으로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제국 안에서 몇몇 가정 중심으로 모인 소규모 공동체가 '평화'를 말합니다. 그것도 로마 제국과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거저'입니다.
이 거저는 가진 소유를 나눠준다는 측면도 포함하지만, 그보다 먼저 존재적 차원에서의 거저를 생각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거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베풂의 결과로 모든 있는 것이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 안에 있던 작은 공동체들은,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곧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거저 베푸신 창조로서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거저'는 존재의 신적 토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돈 있어야 산다'는 말을 초등학생의 입에서도 들을 수 있는 요즘이지만, 존재의 토대는 자본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혹은 뭐라 부르든 간에 오늘날 세계사를 지배하는 과정")위에서는 자유를 논할 수 없습니다. 자유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정체를 감춘 강력한 힘이 내미는 피할 수 없는 미끼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신적인 거저 위에서만 참 1'자유'를 논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우리 손을 떠난 선물은 그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그 처분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선물이 아니라 어떤 대가로 준 것이라면 얘기가 끔찍하게 달라집니다. 자유는 설 자리가 없어지고, 그 받은 것에 걸맞는 대가를 돌려주기 위한 최선만이 남습니다. 그리고 받은 것이 크면 클수록 해야하는 의무도 커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에 가격표가 붙었기에, 우리는 구매가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속박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거저'를 존재의 토대로 말하는 성경은 말 그대로 혁명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존재의 토대를 뒤집기 때문입니다. 거저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 어떤 선행도 결국 자기 중심적인 행위가 됩니다. 세금 감면을 위해 기부한 것을 참으로 선행이라 말할 수 없듯 말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거저만이, 그 거저의 수혜자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려받기 위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위에 우리가 자유롭게 서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선물로서 거저 있게 하셨다는 것은(희랍어에서 '선물χαρισμα'과 '거저χαρις'는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그 선물을 받은 우리에게 자유가 보장되었다는 사실로 귀결됩니다. 즉 거저는 자유의 토대입니다. 거저 없이는 자유가 없습니다. 예컨데 서로 간의 계산과 댓가로 점철된 자본주의의 도화지 위에서, 자신의 것을 거저 내놓는 기부는 보이지 않게 찍힌 작은 점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자본주의가 이 '거저'에 기대고 있습니다. 거저 주어진 것 없이는 어떠한 생산활동도 불가능하다는 자명한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그 태생부터 수요와 공급이 아름다운 조화를 갖는 이상을 갖고 출발했는데, 그 이상이란, 거저의 변종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애덤 스미스의 계획과는 달리, 이상을 잃어버리고 수단만 남은 괴물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안에서 '거저'라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삶의 선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 거저 때문에 우리의 있음이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택에 의해서 말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거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 위에 서면,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로이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가진 소유 역시 거저 안에 포섭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쌓고 모으고 채워야 할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하는 은혜로운 교환물이 됩니다. 또한 거저 위에 선 자는, 하늘에 계신 영원한 베풂의 수여자와 함께 베푸는 자가 되고 싶어할 것입니다.
평화(싸움없음)는 그 다음입니다. "가난한 자 없는 마을에는 도둑도 없습니다." 거저와 평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거저 위에 선 자가 빼앗기 위해 싸울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가 이루지 못한 평화를 이 새로운 존재들이 이뤄갑니다. 팍스 로마나가 아니라 팍스 크리스토(PAX CHRISTO)라 해야할 것입니다.
3. 메시아의 구체적 삶의 현실로서 거저와 평화
그런데 바울은 이 거저와 평화의 출처에 대해서 우리 눈에 불필요해 보이는 구절을 하나 더 첨가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로부터"만 써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모든 있는 것들을 거저 지으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 주 메시아 예수로부터"를 "~하나님으로부터"와 대등하게 기입해놓습니다. 하나님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댓가를 주고받는 분으로 오해하면서 종교의 부패는 시작됩니다. 소위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베풂을 내 종교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이기주의에 다름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분명히 '알 수' 있는 길은, 이 땅에 구체적으로 드러난 거저의 하나님의 길 뿐입니다. 메시아 예수. 그이의 삶과 죽음은 모두 '거저' 부사가 잘 들어맞습니다. 그이는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그 예수를 통해 우리는 거저를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살아서 약동하는 인간의 현실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 첨가가 중요합니다. 후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등한 위치에 기입한 이 인삿말은 삼위일체라는 교리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추상적으로 이해되는 역반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표현입니다. 거저와 평화가 추상개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구현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한 한 단어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아들은 그 아버지를 뚜렷이 드러냈다는 사실은 이 땅에서 벌어진 역사이기 때문에, 추상성에 내어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0:22 개역개정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다시금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는 거저가, 예수를 통해 구체화되고 인간 역사 속에 현현되었다는 사실을 반복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와 소유가 하나님의 거저 안에 있음을 알고 사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들어가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리시는 사랑의 연합의 문이 오늘도 열려있습니다. 곧 삼위일체의 문입니다. 이 땅에 거저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들어가야 하는 문입니다.
4. 새로운 존재의 경험으로서 파라클레시스
찬양하리라
하나님 즉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아빠,
불쌍히 여기는 이들의 아버지이자
모든 파라클레세오스의 하나님,
그는 곁에서 우리 어려움의 모든 것에 대해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도 곁에서 모든 어려움 속에 있는 이들을
(하나님에 의해 우리 자신들이 도움 받았던 바로 그) 파라클레시오스를 통해 돕도록 하십니다.
갑작스러운 "찬양하리라"는 우리에게 이질적으로 느껴집니다만, 베드로, 바울, 요한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신서들 중간에 이러한 찬양시가 불쑥 나타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찬양시의 주제는 바로 '파라클레세오스'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위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파라.칼레오'라는 동사에서 나온 이 단어는 '곁에서 부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권면, 위로, 충고, 도움같은 의미들이 2차적으로 생겼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요한복음의 "보혜사"라는 말도 이 파라칼레오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는 제자들 곁에서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께서 바로 이 곁에서 도우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과 성령을 '보혜사'라 칭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든지, 공통인 것은 일단 부정적인 상황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받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파라클레시스이고, 어려움 겪는 모든 것에 대한 것이 파라클레시스이며,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과 디모데 역시 바로 이 파라클레시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의 서두에 이 파라클레시스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전략적인 의도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앞서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서에서는 단 한 번만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를 통해 그러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더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는 소식 말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질책하고, 그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파라클레시스를 꺼내듭니다. 자신도 어려움을 겪었을 때 누군가 도와주었다고. 그리고 이제는 내가 당신들을 파라클레시스할 차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에 대한 찬양시 속에서 말입니다. 즉 바울이 지체들의 어려운 지경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찬양의 이유가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그대로 거저 흘려보낼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찬양시는 파라클레시스의 하나님이 주어일 땐 우리가 목적어가 되고, 우리가 주어일 때는 어려움 겪는 사람들이 목적어가 됩니다.
지금 우리는 수수께끼같은 야고보서 1:2의 의미를 바울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한 것입니다.
나의 가족 여러분,
갖가지 시련을 만나게 되거든, 전적인 기쁨으로 해석하세요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의심을 덮어둘 수가 없습니다. 실로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우리를 향한 메시아의 겪음들이 넘치듯이, 그처럼 메시아 예수를 통한 우리의 파라클레시스도 넘칩니다.
바울이 메시아를 어떤 맥락에서 언급하는지 눈여겨 봅시다. 메시아를 말하는 순간, 추상적인 의미들은 인간의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성을 띄게 됩니다. 앞에서 은혜와 평화가 그저 그런 개념으로 이해될 위험은, "그리고 우리 주 메시아 예수로부터"라는 표현으로 일축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어려움 겪는 이들을 파라클레시스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텍스트는 준비된 말을 꺼내줍니다. 그 의문을 뒤집을 수 있는 이 세상 유일한 패를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어려움을 겪는 이가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어려움 겪는 이를 돕는 이가 되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 될런지 우리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황의 의외성 속에서 어느 한 부류로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도움을 잘 받아야 하고, 더불어 도움을 잘 줘야 합니다. 어느 한 쪽에만 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쉽게 도움에 인색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파라클레시스할 수 없는 그 이유 말입니다.
어려움을 겪는데는 의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돕는데에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상하게도 어려움을 겪는데 힘을 쓰는 최초의 의지가 있습니다. 그이가 그렇게 했던 이유가 아주 간단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고 그이가 우리를 향해 어려움을 자처할 때, 아무도 그이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어려움-도움의 연쇄작용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서, 누군가를 위해서 어려움을 겪어나가는 바로 그 자리가 파라클레시스가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하지만 그 원천은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홀로 돕고자 하는 이.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처참한 광경 속에서 무언가 경계가 깨지고, 상황이 뒤집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편하게 사는 세계와 힘들게 사는 세계 사이의 담벼락이 무너집니다. 돕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을 지옥이라 부르고, 그리고 도와주려는 사람이 사는 곳을 천국이라 부른다면, 천국과 지옥이 만나는 새로운 공간이 생겨납니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해야했느냐?' 저는 이 이유를 답하려는 것이 별 소용없이 느껴집니다.
다만 움직이는 몸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웃집 초인공을 누르기 위해 불 붙은 건물로 뛰어들었던 사람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민간 잠수사들은 왜 세월호로 몰려들어서 자신의 건강을 잃는데로 그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었습니까? 저는 그 이유없음이, 그러나 그럼에도 몸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이유가 없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저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그렇게 거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는 일을 시작하셨고, 우리가 그것의 수혜자가 된 것을 '알게' 되었다면(그 수혜자는 모든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방향은 그 메시아로부터 정초됩니다. 그래서 파라클레시스는 메시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 됩니다. 거저 위에 서 있는 자만이 누리는 새로운 현실 경험입니다.
5. 흘러오는 겪음들과 흘러가는 파라클레시스
"메시아 예수의 고난들이 넘치면, 메시아 예수를 통한 우리의 파라클레시스도 넘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의 파라클레시스"는 우리가 하는 파라클레시스일까요, 우리가 받는 파라클레시스일까요?
그런데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여러분의 파라클레세오스와 구원을 위한 것이며, 우리가 곁에서 도움을 받는다면, 여러분의 파라클레세오스를 위한 것입니다. (그 파라클레세오스는 우리도 겪고 있는 여러분의 겪음들의 견딤 안에서 활성화됩니다),
저는 이 구절이 앞서 메시아를 말할 때 사용했던 "우리를 항하여"에 대한 부연이라 생각이 듭니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파라클레시오스를 위한 것"입니다. 넘친다는 말은, 제한선을 넘어버렸다는 말이고, 이 말의 의미는 '나처럼 너도 한다'는 말입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소통'입니다. "나처럼 너도 새롭게" 된 것입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파라클레시스가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고, 그 과정 속에 어떠한 제한도 극복해야 합니다(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이것이 현대인에게 무례해보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동의도 받지 않고, 무언가 자신에게 하려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을 향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에클레시아를 향한 에클레시아의 메시지입니다. 파라클레시스에 대한 독려는 '아는 이들' 사이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이러나 저러나(얼마나 개판을 치고 있던지간에)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를 에클레시아답게 하는 일에는 포기가 없습니다. 메시아로부터 시작된 파라클레시스는 이제 바울과 디모데를 통해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파라클레시스로 이어져야 합니다.
앞에서 제가 "우리의 파라클레시스"가 주는 것인지 받는 것인지를 물었습니다만, 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겪음들 - 공통의 파라클레시스 - 너희들의 겪음들 - 공통의 파라클레시스 - 그들의 겪음들...
즉 파라클레시스는 너와 나를 하나되게 하는 영역이고, 이 영역은 기꺼이 메시아의 겪음들을 견뎌내려는 새로운 존재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 낳음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구원"이라 말합니다. 즉 파라클레시스하는 인간성이 곧 구원이란 말입니다.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인간성이 파라클레시스이기 때문입니다.
이 파라클레시스가 어떻게 활성화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겪음들"이라는 말이 시작된 것은, 앞에서 언급된 메시아에서부터 였습니다. 그 최초 의지로부터 시작된 겪음들이 승계됩니다. 메시아가 겪음들을 견디셨습니다. 그 겪음들이 바울에게 주어졌고, 바울은 그것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견딤들이 연결되는 것은 다름 아닌 파라클레시스들을 통해서 였습니다. 우리와 너희들 겪음의 접점에 파라클레시스가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만 겪음들이 전유됩니다.
다시 말해 에클레시아는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파라클레시스 할 수 있고, 그 파라클레시스가 다른 에클레시아를 '낳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더욱 견디려고 합니다. 그리고 더욱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파라클레시스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생명으로서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낳으려고 합니다. 아직 산고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이 파라클레시스의 결속은, 나와 너를 진정으로 '가족'으로 재창조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가족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 파라클레시스는 바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야고보도 파라클레시스하고 있음을 확인합시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야고보서 1:2 뒤에도 같은 단어들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나의 가족 여러분,
갖가지 시련을 만나게 되거든, 전적인 기쁨으로 해석하세요
여러분의 신실함은 시험에 맞서 견딤으로 힘을 내는 줄
여러분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견딤이 끝까지 힘을 내도록 하세요.
이는 여러분이 끝에 닿은 이,
부족함없이 모든 면에서 몫을 해내는 이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만일 견디려고 하지 않는다면, 파라클레시시는 활성화되지 못할 것이고, 견디지 않으려는 인간성은 구원의 인간성은 아닐 뿐더러, 다른 이도 도울 수 없는 힘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그럴위기에 처해있습니다.
6. 파라클레시스의 소망
그리고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분이 겪음들에 연합하는 이들이 될 것처럼, 마찬가지로 파라클레세오스에도 연합하는 이들이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망이 든든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 "될"을 말합니다. 바울이 갖고 있는 든든한 소망의 내용입니다. 먼저는, 하나는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겪음들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파라클레시스에도 연합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견딤입니다. 즉 메시아의 겪음들을 에클레시아로서 승계받아 싸워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인 파라클레시스는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같은 어려움을 겪는 다른 이들을 돕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물을 전달하는 파이프라면, 전자는 물을 받는 것이고, 후자는 물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저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정체입니다. 바로 이 파라클레시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 나타납니다. 바다의 모래 같이, 하늘의 별 들 같이.
바울은 어찌 막장 공동체를 보면서도('고린도전서 연구'를 참조), 어떻게 저 두 가지 "될"을 소망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은 하나님 하시는 일에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든든하게 말입니다. 죽음을 삶으로 뒤집으신 이가, 반드시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그 '에클레시아'라는 이름에 걸맞게 달라지게 하실 것이고, 지금 이 일에 자신이 통로로서 사용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일 때문에 자신이 사도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내용이 고린도후서이고, 이 내용으로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바울에 대하 가지고 있는 의심을 씻어내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1~7
하나님의 뜻을 통해 메시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가족 디모데는 코린토스에 있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게, 더불어 아카이아 전역에 있는 거룩한 이들 모두에게 (편지합니다). 은혜가 여러분에게 평화도 하나님 우리의 아빠로부터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찬양하리라
하나님 즉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아빠,
불쌍히 여기는 이들의 아버지이자
모든 파라클레세오스의 하나님,
그는 곁에서 우리 어려움의 모든 것에 대해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도 곁에서 모든 어려움 속에 있는 이들을
하나님에 의해 우리 자신들이 도움받았던 바로 그
파라클레시오스를 통해 돕도록 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메시아의 겪음들이 넘치듯이, 그처럼 메시아 예수를 통한 우리의 파라클레시스도 넘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여러분의 파라클레세오스와 구원을 위한 것이며, 우리가 곁에서 도움을 받는다면, 여러분의
파라클레세오스를 위한 것입니다. (그 파라클레세오스는 우리도 겪고 있는 여러분의 겪음들의 견딤 안에서 활성화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분이 겪음들에 연합하는 이들이 될 것처럼, 마찬가지로 파라클레세오스에도 연합하는 이들이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 <도래하는 공동체>, 조르조 아감벤, p.11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