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연구

베드로전서 5:1~7

파다고기 2016. 12. 1. 00:01

 

 

노인과 젊은이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들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에게는 손을 대지 말아라.
너희는 이제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성전 앞에 서 있던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

에스겔 9:6

 

 

  이 잔인한 구절을 나와 당신이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구절을 그 옛날 베드로도 마주했다. 이마에 표가 없다면, 노인이든 젊은이든 처녀든 어린이든 부녀든 모두 죽이라는 신의 명령을 보라. 현대인은 말할 것이다. '신은 너무 잔인하다고. 신이 있다고 믿기지도 않을뿐더러, 있어서도 안될 존재라고.' 그러나 이 구절은 일단 에스겔의 환상 속 상황이다. 또한 신을 대량학살자로 여기는 생각들은 모두 옛 경전(토라) 해석을 통한 결론일 뿐, 오늘날 대량학살은 신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저지르고 있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오늘 본문의 해설은, 저 끔찍해보이는 구절을 베드로가 어찌 읽었는지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도 현대인처럼 몸서리치며 신을 거절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베드로에게 있어서 신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전서 5:1~7
그러므로 장로들, 즉 여러분 안에 있는 그들에게 나는 권면합니다, 
나는 동료 장로이자 메시아 겪으심들의 목격자이며, 
또한 곧 밝혀질 뚜렷(주장)에 연합한 자입니다. 

  베드로는 4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했다. 이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구약 본문들이 연결된다는 점을 우리는 확인했고, 그 본문들 중에서는 저 에스겔 9장도 있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권면한다. 여기서 '권면'은 '파라클레오'로 명사화되면 파라클레시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는 "보혜사"라 번역한다. 뜻은 간단하다. "곁에서 부르다". 여기서 권면, 조언, 충고, 도움등의 다양한 뜻이 파생되었다. 이 단어 자체가 성령을 지칭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즉 베드로는 개인적인 주장을 펴고자 함이 아니다.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집짓기에 꼭 필요한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한다. 바로 장로들에게.


  아마도 베드로의 편지를 받아본 교회의 장로가, 4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관련된 내용을 보다가 5장으로 넘어와 "장로들"이라는 말을 봤다면 기분이 나쁠수도 있겠다. 이스라엘의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 아파하지 않았던(오늘날로 치면 "공감능력의 부재") 장로들은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하니 말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신중하다. 자신도 그 장로에 포함시킴으로써 장로들에 대한 권면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넌지시 보여준다.

 

  또한 그는 자신을 소개하기를, 동료 장로일 뿐만 아니라 메시아 겪으심들의 목격자라 말한다. 따라서 이어지는 내용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베드로의 경험에 비추어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밝혀질 뚜렷에 연합한 자"에서 '뚜렷'은 영광을 대체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번역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경우 명사로 쓰인 '뚜렷'은 어색해보인다. 영광은 희랍어로 '독사'인데, 이 '독사'는 기본적으로 '의견, 주장, 억측'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밝혀질 영광"은 '참으로 드러날 주장'으로 읽을 수 있겠다. 분명한 것은, 아직 그 주장이 참이라고 모든 사람에게 납득되지 않은 상태고, 베드로는 이미 그 주장에 연합된 상태라는 것이다. 이 상태가 "기독교인"이다.

 

 

당신들은 목양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감독하며),

사명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따라 기꺼이,

부끄러운 이득으로가 아니라 성실로,

기업들을 군림하듯 말고, 양떼의 본이 되어서.

그리고 목자장이 나타니실 때,

여러분들은 뚜렷 안에서 시들지 않는 월계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양 떼를 목양하라"라는 베드로의 권면은 베드로 자신이 들었던 권면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21:16
  예수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쳐라(목양하라)."

 

  그리고 옆에는 '감독하며'라는 분사가 따라왔다. 이를 근거로 감리교에는 감독제도가 있다. 이 본문이 '장로', '감독', '목자'를 같은 선상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베드로전서 5:1~7은 교회의 리더쉽들을 위한 본문으로 사용될 수 있다.

 

  베드로는 앞에서 자신을 "밝혀질 뚜렷에 연합한 자"라 말하며, 미래성과 현재성이 결합된 상태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이것은 양 떼를 감독하는 목자인 장로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베드로는 자신에게 적용했던 단어들 틈에 더 많은 말들을 추가시킨다. 즉 장로들은 "목양"이라는 현재성을 통해 '연합'하며, 그들의 미래는 '뚜렷' 안에서 목자장으로부터 "시들지 않는 월계관을 받게"된다.

 

  목양이라는 현실적 측면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명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따라 기꺼이,

부끄러운 이득으로가 아니라 성실로,

기업들을 군림하듯 말고, 양떼의 본이 되어서.

 

  사명이라 번역한 단어는 '아낭케'인데, 이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필요성'을 뜻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목양은 그러한 사명으로도 안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따라 기꺼이"해야 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을 따라"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하셨듯이(willingly, as God would have you - ESV)'를 의미한다. 여기서 베드로는 추상적인 신 개념을 떠올리고 있지 않다. 살과 피를 갖고 계신 메시아 에수, 베드로의 스승이 보여주었던 기꺼움이 곧 장로들의 기꺼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저 '이득'이 아니라 '부끄러운 이득'이라는 점에 주목할 것. 이득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주장했듯, 교회를 목양하는 자들은 그것으로 먹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득이 아니라, 부끄러운 이득이다. 

 

  왜 '클레론'을 "기업들"로 번역하지 않았을까? 클레론은 기본적으로 "밭", "상속받는 땅"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기업은 틀림없이 에클레시아 식구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을 기업이라 부른 것은, 클레론이란 단어가 상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는 상속자들이 클레론인 것.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을 하나님의 기업들에게 군림하는 자세로 할 수 없다고 베드로가 말한 것이다. 군림이 아니라 '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신 예수를 따라서. 

 

 

  이와 같이 젊은이들도 장로들 아래 놓이십시오,

그런데 모두가 서로서로 낮춘 마음을 매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빛내려는 이들과는 맞놓이시지만,

낮추는 이들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

 

  입니다. 

 

  장로들에 대한 권면이 끝나고, 이제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이 이어진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위에서와 같은 원칙이 일관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했던 권면의 핵심이 무엇인지, 이 "이와 같이"를 기점으로 연결된 앞 뒤를 확인함으로 알 수 있다.

  일단 베드로는 젊은이들이 장로들(노인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아래 놓여야 한다. 이 "아래 놓임(휘포타쏘)"이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앞선 해설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노인들에게나 젊은이들에게나 적용되는 베드로전서 5:1~7의 핵심은 낮춘 마음이다. 개역성경에는 "겸손"으로 번역되어 있다.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톰라이트는 "예수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의 이 이상한 운동이 나오기 전까지 유대 전통내의 일부 가느다란 줄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겸손을 덕목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말한다[각주:1]. 그런데 메시아 예수 이후는 달라졌다. 겸손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덕목인 것은, 무언가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고 베드로는 그 변화와 아주 가까이에서 그 겸손을 목격하고 배웠던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의 겸손을 생각하며 떠올렸을 구약 본문을 인용한다.

잠언 3:34,35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

 

  비슷하게 겹치는 단어들이 있다.

  또한 이 잠언 구절을 야고보 또한 인용한다.

 

야고보서 4: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들에 관해 말하다가, 이들이 자신들의 교만에서 주께 대한 겸손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문맥에서 잠언 구절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결론적인 문장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으로 이 나라는 홍역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그 해법은 어느 한쪽의 굴종적인 복종이나 무관심일 수 없다. 양쪽의 겸손. 그것을 통해서만이 관계를 왜곡시키는 사탄을 몰아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력의 손 아래 낮추십시오,

여러분들을 카이로스 때에 안에서 들어올리시기 위함입니다,
(ἵνα ὑμᾶς ὑψώσῃ ἐν καιρῷ,)

여러분의 모든 나뉜맘을 그분께 던져드리며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 여러분에 대한 돌봄이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단순히 현실의 문제를 타개하려는 방책 중 하나가 아니다. 낮춘 마음은 내 머리 위에 하나님의 강력의 손이 있다는 확신에서 오기 때문에 이것은 나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관련이 있다. 노인도 젊은이도 모두 하나님의 강력(이 '강력'은 3,4장에서 만났던 '크라토스'다.)의 손 아래 있다는 전제 아래, 서로 먼저 겸손해야 한다. 서로의 관계가 고양이와 쥐가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낮춤은 굴종이 아니다. 이것은 보복을 기다림이다. 자세를 낮추고 사람을 위한다. 사탄은 이때서야 비로소 무력해진다. 우리가 자세를 낮추고 타인을 귀하게 여기지 못함은, 우리가 사탄을 무척이나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되갚는 날이 반드시 온다. 그날을 베드로는 카이로스라고 부른다. 사탄과 맞서며 자신을 낮추기 위해 애썼던 이들의 '주장(독사)'이 마침내 모두에게 참으로 밝혀질 날이 온다.

 

  갈기갈기 찢기고 편 나누기에 따라 함께 나뉘어 버린 마음은 하나님께 증거물로 매번 던져드려야 한다. 증거물이 다 모이면, 피의자에겐 반박할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증거물에 따라 양떼를 괴롭혔던 늑대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애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목자의 기꺼움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문장이, 왜 비인칭 동사로 쓰였을지를 고민했다. "그분은 여러분을 돌보신다"라고 쓰면 간단할텐데, 베드로는 어순대로 말하자면, "그분께/ 돌봄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 대하여"라 썼다. 왜 일까? 하나님의 돌봄은 인간의 돌봄과 다르다. 즉각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떄로는 왜 늑대를 죽이지 않으시는지 의아할 때도 있다. 그래서 마치 비인칭 동사 앞에서 1인칭 주어를 찾듯, 우리는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지를 묻는다. 마음은 갈래갈래 나뉘고, 괴로울 떄가 있다.

  그러나 비인칭 동사의 주어는 주어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여격'의 모습으로, 무언가를 주기 위한 모습으로 문장 속에 살아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마지막 문장의 동사가 현재형이라는데 감사를 느낀다.  

 


*베드로는 이 구절을 알고 있을까? 같은 문형.
"ὅτι μισθωτός ἐστιν, καὶ οὐ μέλει αὐτῷ περὶ τῶν προβάτων."(요한복음 10:13) 

돌보는 자는 삯꾼이 아니다. 삯꾼은 돌보지 않는다.

 

**"강력의 손"은 에스겔 구절들을 반영한다. (열방의 심판에 관하여 : 13:9, 14:9,13, 16:27, 25:13,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하여 : 29:33~34) 나의 손(τὴν χεῖρά μου) 과 함께 쓰이는 동사는 ἐκτενῶ. "손을 뻗어..."

  베드로의 카이로스는 에스겔의 "곡 심판"을 가리키고 있다. 손을 뻗어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는 그날.

 

***스가랴가 원묵시 문학이, 원묵시 문학에서 초월자의 개입이 나타나는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손(2:9)"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단순히 신인동형론적 표현이 아니라, 현시대로 돌입하는 오는시대를 나타내는 표상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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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해 통곡하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는 에스겔 구절에서부터 여기까지 스크롤을 내렸다. 성전 앞 장로들부터 죽었던 장면은 환상이었고, 실상은 동족을 위해 울지 않는 공감 능력 없는 이들을 위해 한 사람이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다. 그이가 신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해한다. 신을 폭군으로, 대량 학살자로, 인간이 살아갈 때 별 필요없는 존재로. 그러나 당신은 타인에게 공감하고 있는가? 타자에 대한 공감이 필수적이라면, 당신은 그 필수적인 것을 잘 갖추었나? 적어도 성전 앞에서 죽임당하는 장로들과는 다르게 살고 있나? 나는 나에게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는 메시아를 "따라" 그들의 아픔을 알아주고 있나?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말한 것은, "너 똑바로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어"가 아니었다. 모두를 위해 죽으려고 했던 한 사람의 겸손을 본받자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가져올 새로운 미래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러한 신이 보여주는 '강력'이란 '군림'일 수 없다고 베드로가 이미 말했다. 그 강력 아래서 겸손한 이가 되는 것은 시킨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사명으로 할 일도 아니다. 기꺼움으로 움직이는 영광의 일. 당장 지금부터, 죽음에도 시들지 않는 꽃이 되는 일이다.

  1. 톰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공동서신>, p.137 [본문으로]</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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