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연구

베드로전서 1:22~2:3

파다고기 2016. 9. 21. 17:52

*20160922 강희와 만나서 얘기하다 나온 것을 추가로 정리해둡니다.


베드로전서 1:22~2:3

  여러분의 프쉬케들을 참 안에서 잘 들음으로 깨끗게 해서 시치미 떼지 않는 동료애에 이르도록 하고, 서로의 가온으로부터 실천으로 인(仁)하세요, 위로부터 난 이들이 사멸할 씨로부터 (있지) 않고 오히려 사멸하지 않을 (씨로부터), (즉) 하나님의 살아있고 머무는 말씀을 통하여 (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프쉬케'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1:9에서 베드로는 "여러분 (가진) 신실함의 텔로스, 곧 삶(프쉬케)이 출애굽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신실함의 목적, 신실함의 끝, 신실함의 이룸은 바로 프쉬케의 구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음녀가 사고 파는 목록중에도 "사람들의 프쉬케"가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18:13) 이 단어는 대개 "영혼"이라고 번역되는데, "영혼"이라는 번역어는 육체와 별개의 무언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프스"라는 발음이 보여주듯, 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호흡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점에 착안하여, 저는 이것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삶"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위의 본문은 여러분 각각의 삶들이 어떤 과정을 지나, 어떤 목적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란 "참 안에서 잘 들음"이란 수단을 가지고 삶(프쉬케)을 깨끗게 하는 것'이고, 그 과정이 이르러야할 목적이란 "시치미 떼지 않는 동료애"입니다.

  "참 안에서 잘 들음"은 앞에 있는 '프쉬케'라는 단어와 잘 어울립니다. 마치 호흡에 들숨과 날숨의 두 측면이 있듯이, "깨끗"에는 들이 마셔야 할 "참(진리)"과 밖으로 발산해야 할 "잘 들음"의 순종, 이렇게 두 측면이 있습니다. 욕망의 대상에 거친 숨결을 내뿜는 '에피뛰모스'가 아니라, 이러한 호흡이 깨끗한 호흡, 깨끗한 삶입니다. 참을 먹고, 먹은 것으로 힘내는 지행합일입니다.


  이때 개인의 욕망의 호흡인 '에피뛰모스'와 참 호흡하는 '잘 들음'은 다른 근원을 갖습니다. 에피뛰모스가 '나'를 근원으로 가지고 있다면, '잘 들음'은 내 속에서부터 나오면서도 역사 위에서 벌어진 외부 계시 사건을 수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에 따르면, 욕망하는 것도 욕구의 대상과 매개물을 필요로 하므로, 욕망이 꼭 내재적이라고 볼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욕망과 순종의 문제는, 내재냐 외부가 아니라, 계시 사건이 드러낸 하나님의 인격을 내 인격의 주체로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인듯 싶습니다.(이는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개체로서 삼위 하나님의 관계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하나님 인격의 수용이기 때문에) 욕망은 하나님의 인격이 아니라 사물을 내 인격의 주체로 받아들였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요.


  각 개인이 이러한 삶(호흡)을 추구했을 때, 그들 관계 안에서 시치미 떼는 일은 불필요합니다. 서로 겉치례를 하지 않으니 참다운 동료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다음 문장으로 다시금 정리 되는데, 1) 각자의 가온에 참이 있고(개인으로서), 2) 그 참을 실천하려고 하니(상호관계로서), 3) 인(仁)이라는 공동체적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요구받는 것 자체가, 그들이 에클레시아이기 떄문입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베드로가 사용하지는 않지만, 베드로는 "씨"라는 구약성경의 개념을 통해서 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위로부터 난 이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말합니다. 이들은 어떠한 '근원'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근원을 "씨"라 부릅니다. 마치 씨앗에서 식물이 나와 존재하듯, "위로부터 난 이들"은 "씨"라 불렸던 근원으로부터 생겨난 이들이고, 이 씨는 사멸할 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고, 머무는 말씀"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어쩌면 씨는 자신에게서 나온 식물과 늘 함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이기는 처음 심을 때와, 나중에 거둘 때 뿐이지만, 어쩌면 식물은 씨로부터 비롯되어 씨를 낳기 위해 늘 보이지 않게 씨와 함께 있는 과정인듯 싶습니다. "살아있고"와 "머무는"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것은 씨와 식물의 관계를 반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이 씨가 존재를 낳고서 사라질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함께 계속 기능하고 머무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베드로의 구약 인용을 살펴볼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유명한 이사야 40장을 인용합니다. 사도가 구약을 어찌 읽어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바른 성경 읽기 방법을 찾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또 "씨는 말씀"이라는 말을 써놓고보니 신천지가 떠오릅니다. 그들은 저 말씀을 이만희라는 노인의 입에서 나온 계시록 해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도 이어질 본문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살몸은 풀과 같고,
모든 살몸의 뚜렷은 꽃풀과 같습니다
풀은 말라버리고, 꽃은 떨어져버립니다.
그러나 주의 이야기는 그 시대에 이르도록 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러분에게 (왕의 전령으로서) 전했던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40장을 베드로가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인용의도를 확인하려면, 단순히 단어들을 맞춰보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베드로의 구약 인용을 살펴보면서 그 의미의 소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이사야 40장 전체의 문맥을 고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인 베드로는 그 문맥을 아주 잘 알았을 것이 분명하고, 단어의 의미도 그 문맥 위에서 파악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좀 길어지더라도 전문을 다 확인합시다. 제가 임의로 문단을 나누어 봤습니다.


1. 새 출애굽의 선언(이사야 40:1~5)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입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40장은 하나님의 선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선언은 포로기가 마침내 끝날 것("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이라는 내용입니다. 포로기가 끝나기 때문에 포로였던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 내용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화자인 "한 소리"가 나타나 주님이 이 땅이 오실 길을 닦으라고 외칩니다. 그 길을 따라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목적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선언과 한 소리의 외침은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포로기를 끝내시는 것'과 '주님이 자신의 영광을 모든 이에게 나타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것'은 한 그림에 대한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바로 출애굽입니다. 파라오의 압제 상황을 끝장났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신을 열 가지 재앙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본다"라는 말은 출애굽기 33:18의 반영이기도 합니다("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이 본문에서 출애굽을 읽지 못하면, 베드로와는 다른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요는, 이사야 40장은 '이집트에서의 출애굽'을 모티브로 하여, 지금 포로기를 겪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출애굽'이 벌어질 것을 선언하는 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 본문을 어찌 읽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1) 저 "포로기"는 언제인가? 2) 한 소리는 누구인가? 라는 하위질문에 베드로가 무어라 답했을지를 추론해봐야 합니다. 결과는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동시대 사람들이 함께 읽었을 복음서에서 힌트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3:3

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사복음서는 모두 동일하게 '이 인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인물은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사야서 40장을 인용하여, 자신의 사역을 설명했습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새 출애굽'의 주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을 알리는 "한 소리"입니다. 복음서가 구약을 읽는 방식으로 베드로도 생각했을 것이고, 이것은 A.D.1세기에 출범한 에클레시아 역시 공유하고 있던 사고였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즉 새 출애굽을 알리는 한 소리의 역할이 세례요한이었다면, 자신의 영광을 모든 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는 새 출애굽의 주님은, 바로 예수입니다. 본문들의 유기적인 연결 속에서 다른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입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사야 40:5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 새출애굽의 정당성, 그것이 확실히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주의 입이 다음과 같이(6절 이하의 내용)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새 출애굽이 확실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약속"이라는 말을 집어넣어 5절과 6절 사이의 연결점을 잘 보여주지 못하는 새번역성경의 번역에 대해선 유감입니다.)


  이사야는 새 출애굽의 정당성을 자신이 환상 속에서 있었던 한 소리와의 대화에서 찾습니다.


2. 새 출애굽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이사야 40:6~8)


    한 소리가 외친다.

  "당신(이사야)은 외치십시오."


    그래서 나는 물었다.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한 소리"가 외치라고 했던 내용이 남은 이사야 40장이후 길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외칠 내용의 도입이 되는 40:6b~8이 베드로가 인용했던 바로 그 구절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즉 모든 사람과, 그 사람의 아름다움은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베드로가 말한대로 '사멸'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말하는 "이 백성" 즉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입김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주의 영광"을 보길 열망했던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손 아래서, 그 분이 지나가시는 것만을 느꼈을 뿐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사람들은 풀도 아니고 꽃도 아닙니다. 영원히 서 있는 말씀으로부터 비롯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다시 읽어봅시다.


  위로부터 난 이들이 사멸할 씨로부터 (있지) 않고 오히려 사멸하지 않을 (씨로부터), (즉) 하나님의 살아있고 머무는 말씀을 통하여 (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살몸은 풀과 같고,
모든 살몸의 뚜렷은 꽃풀과 같습니다
풀은 말라버리고, 꽃은 떨어져버립니다.
그러나 주의 이야기(말씀)는 그 시대에 이르도록 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러분에게 (왕의 전령으로서) 전했던 이야기입니다.


  즉 베드로가 읽고 있는 현실은 이러합니다. 그는 "한 소리의 외침"을 소아시아 지역의 난민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난민들 중 일부가 그 말씀을 듣고 출애굽했습니다(1:2). 이 출애굽은 인간 압제자로부터 벗어난게 아니라, 어둠의 악한 권세가 십자가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의 주를 따라 사는 새로운 생활방식(1:15)을 갖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인용한 이사야 40장의 맥락에 따라, 이 사람들이 포로기가 종결된 사람들, 왕이 오실 길을 준비하고, 마침내 왕을 맞이한 사람들, 위로받는 사람들(1:6), 하나님의 새 출애굽의 씨알인 것입니다(1:9). 그리고 이들이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주의 영광"'입니다.(1:7)


  제가 괄호치고 표시해둔 베드로전서의 구절들을 다시 찾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0장의 울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이사야 40장의 문맥을 염두하며 베드로전서의 1장을 써내려가고 있었고, 그가 인용한 이사야 40장의 일부를 통해, 지금 난민들로 구성된 에클레시아가, 현시대의 끝에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새로이 낳으신 새 출애굽의 씨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멸하지 않을 주의 말씀과 하나되는 여정에 올랐으므로, 결국 주의 영광으로 온 세계 위에 밝혀질 자들입니다. 지금 이들이 입은 옷이 누추한 난민의 옷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로써 베드로가 이사야 40장의 포로기를 어찌 읽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당대 유대인들이 이해하던 것처럼 이방제국에 의한 포로기도 아니었고, 신천지가 읽듯 한국교회에 의한 포로기도 아닙니다. 메시아 예수가 자신의 적이라고 규정한, 어둠의 악한 권세, 사탄에 의한 포로기입니다. 즉 창세기 3장의 타락으로부터 메시아 에수를 받아들이기 전까지의 상태가 포로기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이것이 여러분에게 전했던 이야기(말씀)입니다"라는 문장에서는 이사야 40:9에 나오는 왕의 소식을 전하는 전령에 자신을 대입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점은 바울도 마찬가지인데, 로마서 10:15에서 바로 이 이사야 40:9를 인용하면서, 예수의 소식을 전하는 이들을 "왕의 소식을 전하는 발"이라 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개역성경이 '말씀'이라고 번역한 것을 '이야기'라고 한 것은, '레마'라는 단어를 제가 그렇게 해본 것입니다. 말이 가지고 있는 이치와 질서가 '로고스'라는 말에 담겨있다면, '레마'는 그 문장들의 연속된 것을 말합니다. 문장의 연속이라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메시아 예수가 가져오는 새로운 출애굽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A.D.1세기를 절정으로 갖는 유대서사이자, 메시아 예수가 마침내 주로 오셨음을 선언하는 왕의 소식입니다. 이것은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들어도 영원히 서 있는 말씀"입니다.


  웨인 그루뎀은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를 크게 신경쓰지 않는듯 하지만, 저는 베드로가 이사야 40장의 로고스를 밝혀낸 것이 레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전대미문의 해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유대랍비들이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자기 스승을 중심으로 놓은 구약 해석을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베드로가 에클레시아에게 들려주었던 '레마(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레마는 해석의 결과물, A.D. 1세기 예수를 중심으로 놓은 구약해석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레마)"을, A.D.1세기가 아니라 1984를 정점으로 읽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천지 증거 장막 성전이라는 이단이 출현할 것을 이사야가 내다보고, 요한이 내다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도와 전혀 다른 시간표를 가지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의적 읽기를 "씨"라 부르며, 이 씨가 없으면 망한다고 하는데, 참으로 개탄할 노릇입니다.


  그러니 모든 악의와 모든 속임, 연기, 부러움과 모든 뒷담화를 벗어 둔 사람들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이치에 맞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우유를 보채십시오, 자신 안에서 여러분들이 자라서 구원에 이르기 위해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가 인자하시다는 사실을 맛보았다면 (꼭 그리하십시오).


  베드로의 글 속에서 구약 이미지들의 풍성한 울림을 느낀다면, 저 "그러니"의 무게도 가벼울 수 없을 것입니다. 저 "그러니"가 함의하고 있는 바는, "당신들이 하나님의 새 출애굽의 결과물이기 때문에"가 되기 떄문입니다.


  '우유를 보채는 갓 태어난 아기'라는 심상이, '초보적인'이라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마치 히브리서에 나오는 "우유 필요로 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히브리서 5:12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우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신천지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겠습니다만) 베드로가 말한 우유를 보채는 사람은, "순전한(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추구"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심상입니다. 즉 엄마와 아기의 애착관계처럼, 이치에 맞고 속임없는 하나님에 관한 앎을 순전하게 추구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곧 앎의 추구입니다.


  그리고 이 우유는 앞에서 말한 '레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구약 이야기가 메시아 예수를 통해 새로이 이해되고, 그 이해를 삶으로 가져오는 것이 "프쉬케의 깨끗"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이라는 말은, 불순물이 섞인 구약성경에 대한 그릇된 해석을 염두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형용사인 "이치에 맞고"라고 번역한 말은 로마서 12장에도 등장합니다.


로마서 12:1,2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의 갸륵히 여기심으로 여러분을 가까이서 부르고 있어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세요. 이러한 제사가 이치(말씀)에 맞는 여러분의 예배입니다. 이 '현시대'의 틀에 자신을 맞추지 마세요. 오직 생각을 위로부터 새롭게 함으로 변신 되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해보고 인정하는데 이르세요.  뜻은 하나님을 닮아 좋고, 받아들일만 하며, 온전한 목적이 있습니다.


  로마서의 저 "이치에 맞는"을 개역성경은 "영적"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프뉴마티코스"와 오해할 개연성이 있습니다. '로기코스'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단어는 로고스에서 파생된 단어로, "이치, 질서에 맞는"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위의 "우유"가 '레마'를 가리킨다면, 그리고 그 레마를 메시아 예수를 통한 구약해석이라 볼 수 있다면, 이 "이치에 맞는"이라는 말은 그 해석의 성격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그 해석은 로고스(이치)에 걸맞습니다.


  따라서 "불순물이 섞이지 않고, 이치에 맞는 우유를 먹고 자라라"는 권면은, 이치에 맞는 말씀 해석을 삶으로 가져오라는 뜻입니다. 단번에 삶이 온전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자라서"라는 말에서 베드로가 그들의 점진적인 발전과정을 기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메시아 예수를 통한 구약 해석이 삶을 관통하도록 합니다. 인격이 거기에 맞추어지고, 생활방식이 거룩해집니다. 이 위대한 과정 안에 들어온 이들이 에클레시아입니다.


  "구원에 이른다"는 말은,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에 걸맞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겠습니다. 베드로의 권면은 일정한 질서와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앎에 대한 순전한 추구 - 2) 자람(삶으로의 적용) - 3) 구원(완성)에 이름 인데, 이것을 출애굽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속에서 억눌린 삶을 살아가는 난민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그 이야기에 따라 몸을 움직여 에클레이아로 들어왔습니다. 그 공동체의 상호 관계 안에서 그 이야기를 삶으로 구현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그들은 "새"라는 말에 걸맞게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속자에 걸맞는 결말을 맞게 됩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이 얻게 된 땅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프쉬케가 현시대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다"는 표현은, 시편 34:8을 떠올립니다.


시편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맛본다"는 말은 "경험해서 안다"는 뜻입니다.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하심"은 같은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난민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겪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도 복음 전하는 이를 만나서 이치에 맞고 순전한 앎으로 살고자 했던 두, 세사람에서부터 뭔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그들은 "주의 영광"이 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난민들 속에서도 메시아의 몸이 구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몸 밖에 있던 사람들은 그 몸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서 선한성품을 가진, 창조자이시며, 난민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겪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쌍히 여기심이 그저 적선이 아니라, 그들을 새 창조의 주역으로 삼으시려 하신다는 사실에 전율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시편 34:8을 직접적으로 염두하고 있었다면,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는 것" =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나아와 거룩하지 못한 생활방식을 피했던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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